1602년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귀부해온 로툰을 조선의 무산 인근으로 복귀시켜 그로 하여금 자구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게 하는 동시에 번호들을 공략, 복속시키게 했다. 본인이 직접 번호 복속에 나선다면 조선과의 갈등이 유발되기에 한 때 조선의 번호였던 로툰을 번호 인근으로 재차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번호들을 복속케 함으로서, 마찰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당시 건주를 압박하던 식량난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함으로 보인다.
로툰은 누르하치의 지시를 상대적으로 잘 이행하여, 조선에 항복 의사를 내비친 뒤 다시 조선의 변경에 세거하면서 여러 번호 세력들을 병합해 나갔다. 1602년부터 최소 1604년까지 이러한 로툰의 번호 병합은 계속되었다.
한편 1603년 초엽 울라의 부잔타이는 다시 여허에 손을 뻗어 그들과의 화친관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당시 동여허의 버일러였던 부양구의 누이를 처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이 때 부잔타이가 처로 맞이하고자 한 대상은 누르하치가 1598년 취하고자 했던, 하지만 여허측의 돌변으로 혼인이 실패했던 부양구의 누이로 보이는데, 부잔타이는 그녀와의 정략혼을 통해 건주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울라-타세력간 정략혼 관계에 변화를 주려 했다.1
부잔타이는 여허와만 정략혼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여허를 통해 몽골 세력인 코르친 좌익의 군주 밍간의 딸 역시 처로 맞이하려고 했다. 코르친과 여허가 양자간 긴밀한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부잔타이는 여허, 코르친과 동시에 정략혼 관계를 맺고 그들의 동맹관계에 자신 역시 참여하여 세 개의 세력으로 이루어진 대항전선을 구축코자 했던 것 같다.
이 때 부잔타이는 10마리의 마구를 완전히 갖춘 말, 10벌의 갑옷과 투구, 담비가죽과 시라소니 가죽옷 10개, 모피옷 10개, 6마리의 낙타, 금과 은 10냥을 혼처에 폐백으로 보냈다.2그러나 여허와 코르친은 부잔타이의 폐백은 폐백대로 취하고서는 부잔타이에게 딸들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부잔타이와 대놓고 혼인동맹을 맺자면 건주의 누르하치가 이에 대해 반발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부잔타이가 요구한 여허의 여식 자체가 누르하치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청측의 실록상에는 마치 밍간의 딸만이 보내지지 않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3, 사실 여허 역시도 이 때에 부잔타이에게 부양구의 누이를 보내지 않았다고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첫째로 부잔타이가 혼인대상으로 거론한 것으로 유추되는 '부양구의 누이'는 앞서 설명했듯이 '여허의 노녀', 즉슨 누르하치와 약혼했다가 돌연 혼인이 취소되었던 여인으로 추정되는데 해당 여인은 1615년까지 혼인을 하지 않았다.4
둘째로 울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조선에 송환된 이난의 1604년 당시 공초에 따르면 1603년을 기준으로 하여 부잔타이의 부인은 세 명이었는데5 이 중 두 명은 누르하치의 조카였으며 한 명은 누르하치의 조카들과 혼인하기 전에 맞이한 본처였으므로 '1603년에 혼인한 부양구의 누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없었다.
즉, 이 때 부잔타이는 여허와 코르친 모두에게 폐백만 지불하고서는 혼인에 실패하고, 동맹에도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잔타이는 자신이 애써 폐백까지 지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허, 코르친과의 연대에 실패하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여허, 코르친과 연대를 하고자 했다는 것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자면 누르하치에 저항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맹이 성공했다면 몰라도 동맹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부잔타이는 거의 즉시 친건주적인 행보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재빨리 먼저 본인의 행동에 대해 실토했다. 그는 자신이 여허와 코르친측에 혼담을 제의했으나 이에 대해 여허와 코르친측은 폐백만을 받고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서 본인을 능욕했다고 한 뒤, 이제 누르하치가 자신에게 또 한 명의 여식을 보내주면 그 여식, 그리고 이미 자신에게 시집을 온 어시타이6와 함께 매년 건주를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건주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들의 압박을 피하려는 판단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에 대해 별 다른 질책성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자비를 보여 부잔타이의 울라를 완전히 친건주 세력으로 만들려 한 듯 하다. 이 때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슈르가치의 또 다른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온저'를 부잔타이에게 시집보내었고 그에 따른 사신단 역시 파견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가 자신의 해명을 받아들이고 조카딸을 보내자 일촉즉발의 외교 상황에 대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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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당시까지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조카딸과 결혼했고, 본인의 누이 후나이를 슈르가치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자신의 조카딸인 아바하이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다. 비록 자신의 형수인 두두후를 여허의 나림불루에 재가시키려 폐백을 보내긴 했었으나 이 시기까지 울라와 타세력간 정략혼 관계는 대부분 건주에 쏠려 있었다. 이상 만주실록 1597~1603년 기사중 울라와 타세력간 정략혼 기사 참조
2.만주실록 권 3 계묘(1603년). 문맥상 해당 예물은 코르친에 보내진 예물만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3.yehe monggo de sargan gaiki seme gisurefi, monggo jafan gaime jabdufi, jui b e buhekv kiyangdulaha/만주실록 권3 계해(1603년) 기사. 처를 보내지 않은 대상으로 몽고만이 언급된다. 한문본 청태조무황제실록과 고황제실록 역시 비슷한 서술이다.
5.만문노당 을묘(1615년)조 음력 6월 기사
6. 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연구 51, 명청사학회, 2019, p.68. /등록유초 14책, 邊事, 갑진년(1604) 4월 22일.
7.누르하치의 조카, 슈르가치의 딸
님. 사군사주에서 제일 쎈게 수부타이 맞죠?
사준사구. 일단 가장 평가가 높은게 수부타이긴 함
근데 이건 칭기즈칸 이야기가 아닌데 먼가 질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