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했고
리암니슨과 앤드류 가필드 애덤 드라이버가 주연한 영화인대
수백년전 일본에서 벌어졌던 키리시탄 박해당시 일본에간 선교사에대한 영화임
일본 조정에선 배교를 거부한 키리시탄들을 붙잡아 바닷가에 산채로 매달아 파도에 절여져 죽게만들고
선교사인 주인공을 붙잡아선 굴복시키기위해 안간힘을 씀
단순한 신도들은 종교교리와 경전도 자세히 모르니 몇몇따윈 놓쳐도 상관없지만
종교교리를 깊히 이해하는 선교사들을 굴복시키는건 뿌리를 뽑아버리는일이고
천주교에선 미사를 드리는걸 라틴어로 했고 세례도 라틴어로 해야했기때문에 신부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거든
주인공의 스승으로 등장하는 리암니슨은 이미 오래전에 배교를 했고 일본내에서 관직을 얻고 가정까지 꾸린채 등장함
일본조정의 명을듣고 제자인 주인공을 배교 시키기위해 찾아와서
이 땅은 자신들의 종교가 뿌리내리지못하는 늪이라면서 일본인들은 천주교의 신앙을 그대로 믿지못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왜곡해서 믿는다
일본인은 삼일만에 부활한 예수님보다 하루에 한번씩 죽고 부활하는 태양을 숭배한다
말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이에 스승은
자신도 끝까지 버텼지만 다른이들을 붙잡아 고문하는걸보고 그들을 살리기위해 배교 한것이라 말하며
과연 예수님 본인이라면 이럴때 자신의 믿음을 위해 다른이들의 목숨을 희생시켰을까? 라는 말을 남긴채 자리를 떠남
주인공도 자신이 배교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다른사람들을 잡아와 죽일것이라는 협박과
키리시탄들을 붙잡아와 거꾸로 매단뒤 목에 얕은 칼집을 내어 서서히 출혈로 죽이는 고문을 보게되며
결국 다른이들을 살리기위해 눈물을 흘리며 예수가 그려져있는 동판화를 밟고 배교 하게되는대
이때 동판화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주인공의 귀에 울리는 환청이 인상깊었음
"밟거라 나는 너희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위해 이땅에 임한것이고 그러기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괜찮다 나를 밟거라"
기독교 교리적으로 생각하면 주인공들은 왜 이 고통속에서 예수와 신은 침묵(사일런스)하는가 라고 부르짖지만 예수는 신도들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게 아니라 고통을 함께하고있던 것이었다는 교훈
많은 이를 살리기위해서 십자가를 밟는것 정도는 예수도 하느님도 백번천번만번 용서해줄꺼임 오히려 그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었다면 어서 십자가 위에서 탭댄스를 추지않고 무얼하느냐고 하셨을꺼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당시 천주교쪽에서 먼저 사고친게 있긴해서...
사일런스
반면 조선은 백성들이 나서서 교리를 찾음. 조선말에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네...
1801년 신유박해부터 우리나라 조정은 진짜 왠만하면 봐주고 박해안할려고 노력을 많이함 근데 일부 신도들이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병크를 몇번 터트리면서 천주교 = 역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버림
조금 급이 다름.
오페르트 말고도 양반집에 천주교 신도가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짓이 미신 타파한다고 위패 박살내고 제삿상 엎어 버리기라 당시 조선에서 '아니, ㅅㅂ 저런 미친 놈들을 봤나'가 절로 나오는 사례가 많았음. 탄압이 심해지니까 프랑스에 조선에 함대 보내서 공격해달라는 밀서 보내려다 걸리는 놈도 튀어 나왔고.
기득권에게 위협이 되니까 당연히
아 이거 침묵?
의사양반이 이거 연극이후 소식없었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네...
사일런스
ChP病む.
기독교 교리적으로 생각하면 주인공들은 왜 이 고통속에서 예수와 신은 침묵(사일런스)하는가 라고 부르짖지만 예수는 신도들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게 아니라 고통을 함께하고있던 것이었다는 교훈
오 이건 좀 아프다 내가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이 해석엔 눈물이 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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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우리나라는 당시 천주교쪽에서 먼저 사고친게 있긴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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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기득권에게 위협이 되니까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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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반면 조선은 백성들이 나서서 교리를 찾음. 조선말에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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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조금 급이 다름.
오페르트쉑
동동-
선교사가 종교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기득권을 위협하는 침공의 선두주자들임
동동-
ㄴㄴ 차원이 다름
동동-
애초에 시작된 지역들도 먼저 오랜기간 박해받으면서 존버한거니까 동양쪽도 스타트는 고생한거지 뭐 그당시로써는 사회 시스템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줬으니까 기존 가치관과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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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1801년 신유박해부터 우리나라 조정은 진짜 왠만하면 봐주고 박해안할려고 노력을 많이함 근데 일부 신도들이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병크를 몇번 터트리면서 천주교 = 역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버림
로보사피엔10
오페르트 말고도 양반집에 천주교 신도가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짓이 미신 타파한다고 위패 박살내고 제삿상 엎어 버리기라 당시 조선에서 '아니, ㅅㅂ 저런 미친 놈들을 봤나'가 절로 나오는 사례가 많았음. 탄압이 심해지니까 프랑스에 조선에 함대 보내서 공격해달라는 밀서 보내려다 걸리는 놈도 튀어 나왔고.
동동-
단 일본은 선교사까지와서 전파하고 임진왜란시기에도 이미 천주교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고 악질적으로 한끝에 그때 줄어든 천주교인구를 회복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행정구 하나를 싹 지워버렸는데 천주교는 커녕 외세 끌어들여서 자국 백성 탄압한 동학농민운동이랑 비교해도 학살의 규모나 사상검증 수준이 비교할게 못됨
그래서 한국 천주교가 잘 하다가도 황사영 포장질 시도할 때마다 개쌍욕을 처먹는거임 을사늑약 이전에 황사영이 자신의 종교적 광신질을 위해 천주교 국가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를 짓밟아달라고 침략을 구걸한 최악의 매국행위를 했던게 레전드였지
그게...선교사들이엇나? 양키들인지 코쟁이들이 와서 유교 사상 갈아엎겟다며 흥선대원군 아버진가 할아버지 묘를 들쑤셧다고 햇다던가? 흥선대원군이 그거땜에 빡쳐서 쇄국정치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거라며? 맞나?
동동-
조선이 물탄 핸드드립 커피 정도면 일본의 천주교 탄압은 에스프레소 2샷 정도? 황사영 백서 사건이나 절두산 순교가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일본이랑은 비교가 안됨. 일본의 키리시탄 박해는 강도도 훨씬 크고 박해의 지속기간도 훨씬 길었음
그건 장사꾼. 오페르트가 유교 국가에선 조상의 유골을 중요시하는 걸 이용해 흥선대원군 할아버지 유체를 인질삼아 통상을 뚫어 보려고 미친 짓 한 거.ㅋㅋㅋ
동동-
조선시대 박해는 성격이 다름. 주로 양반 계급을 처벌했지 백성들을 처벌 하는건 삼갔거든. 사고 몇번 쳤는데 정조때도 일 안키우고 덮으려고 했고, 순조때도 수렴청정때 더 규모 안키우려고 했음.[신하들은 킬하고 싶어했는데 정순왕후선에서 컷] 그러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짐. 대충 해외에 우리나라가 천주교 박해하니 군대 끌고와서 조선 정복해주시고 천주교좀 풀어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려다가 걸림. [이때조차 정순왕후는 적당히 문제 일으킨애들만 손보고 덮으려고 했다.] 200명 가까이 걸린적이 있는데 증거가 너무 확실한 사람들만 죽이고 증거 없는 사람들이나 아 나 배교할께요 말로만 해도 풀어줌. 저런 짓은 안 시킴. 그리고 너무 사람 많이 죽으니까 12월22일에 토사교문을 반포했는데.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올해안에]에 끝내며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 그러니까 왕실은 계속 왕권에 도전하는 행동이나 들키지만 않으면 일 크게 안 일으키려고 했는데 자꾸 천주교 신자들이 사고를 쳤음.
원래 조선은 유교 외에 종교는 다 억압했음. 승유 억불이라고 불교가 대표적으로 억압받았고 도교나 무교[무당] 같은것도 억압했음. 근데 불교 믿는다고 사람죽이거나 그러진 않았잖냐. 조정에서도 이게 포교 되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초기 한국 천주교 포교 방식은 어디 모여서 그냥 모임이나 기도만 하는 것이었고 사회 혼란을 유발하거나 왕실에게 적대적인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었음. 근데 여기서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동생 권상연이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신주를 태우고 가톨릭식 장례를 지냈고, 조선에서 신주를 태운다는 것은 역모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강상죄를 저지른다는 뜻이었기에 국가에서 처벌한건데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유배시켰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음. 사실 조정에서는 박해를 원하는 신료가 많았는데 정조가 걍 이 정도까지만 하자 하고 넘어간 수준임. 정조가 박해를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냥 성리학이 바로서면 알아서 없어질 종굔데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말자 이런 느낌. 이게 신해박해임.
그리고 정조가 죽고나서 순조 수렴첨정때 성물이나 서적을 숨기는 와중에 하필 존나 재수없게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이라고 낙서한게 발견 됨. 정확히는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다.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 이 말을 앞뒤 다 자른게 '무부무군' 당연히 천주교 신자들 50여명이 역모죄로 잡혀가 죽음. 그다음 위에도 언급한 황사영 백서사건 터짐. 이게 신유박해 참고로 이말을 쓴건 정약종이고 이 사람 동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 정약용 선생은 배교하고 살아남는다. 배교도 예수님 얼굴 밟아라 이런게 아니라 나 천주교 안믿어요 안믿을게요 말만 하면 넘어가는 순한맛 수준이었음.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교황청의 제사 금지였는데 이것도 1939년도에 해제했음. 애초에 제사금지 안했으면 안 죽었을 500여명이 죽었고, 조선내에 천주교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천주교가 서양의 종교다 보니 서양에 대한 이미지도 같이 나락으로 떨어짐.
황사영 백서 사건때 정약용도 죽이시죠. 이랬는데 유배지만 옮기고 말았음.
이렇게 양반위주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사이에서는 큰 문제없이 퍼지고 있었음. 그뒤에 헌종이 즉위한뒤 우의정이 상소를 올리면서 기해박해 ,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이 잡히고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 하고 통상을 요구 김대건 비롯해서 10명정도를 처형한 병오박해가 일어남.
마지막으로 병인박해가 있는데 이 건 주교가 타이밍을 놓친 탓도 있음. 애초에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 아니었음. 당시 조선 천주교 내부에서도 대원군의 집권을 낙관적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이제 조선에서 더 이상 천주교 박해는 없다는 소문이 퍼져 외국 선교사가 사제 복장을 입고 조선에 입국을 하려 들기도 했을 정도. 흥선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정부 내부의 천주교 신자인 도승지 남종삼을 설득해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추진했는데 베르뇌 주교가 만나기를 거부함. 근데 이 타이밍이 천주교한테는 황금 타이밍이었음. 왜냐면 프랑스랑 우호관계를 맺는건 러시아 견제를 위함이컸는데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중단했거든, 그리고 슬슬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세력들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해서 병인박해가 일어남. 박해 당시에 관례에 따라 조정에선 약간의 융통성을 보였는데 신자들에겐 "배교한다면 죽이지 않고 석방해 주겠다"고 권고하였으며, "어린아이들과 노인은 죽이지 말라"고 대원군이 직접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음. 또한 프랑스인 사제들에게는 "원할 경우 처벌 없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함.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고, 프랑스인 사제들 역시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는 길을 택함.
동동-
사실 조선이 훨씬 심했음. 한국 천주교 성지는 대부분 순교성지일 정도로. 일례로 남한산성 순교성지에는 도모지 상이 있음. 상투를 말뚝에 묶어 땅에 박고 얇은 한지에 물을 묻혀 죽을 때까지 꿇어 앉혀 두는 거임. 한여름에 그렇게 반나절이면 픽픽 쓰러지는데 이게 죽은 건지 산 건 지 도무지 모르겠네. 그것도 한번에 수십명씩.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순교자가 배교자보다 훨씬 많은 건 민족성이라고 해야할까, 조상 때부터 독한 사람들이여.
지금으로 치면 이슬람 국가가서 기독교 포교하는 데 조심히 몰래 몰래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여기있소 하고 하면서 포교한건데[물론 이건 왕실이 포교하든 말든 반역만 안 저지르면 냅뒀기 때문에 그런 것이긴 함. 나중가서는 앞서 한 병크들 때문에 이미지가 나락이 되서 별 수 없었고], 일본이랑 비교하면 순한 맛으로 대처했고, 스노우볼링의 시작은 교황청의 제사금지 병크 탓이 컸음. 나중에 취소 시킬정도면 그냥 애초에 금지 안 시켰으면 문제 될 일 없었음.
도모지 상 그거 경신박해로 알고 있는데 1839년(헌종 4) 기해사옥 때 천주교 박해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이던 임성고(任聖皐)의 아들인 좌포도장 태영(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우포도장 신명순(申命淳)과 함께 자행한 옥사였다.원래 철종은 온건한 성품인데다가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김씨(安東金氏)도 비교적 유화정책을 썼으므로, 천주교는 조용한 가운데 착실하게 교세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이에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사학시(邪學視)하고 반감을 품고 있던 임태영은 신명순과 의논하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 30여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시켰다.그러나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의 약탈과 방화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야기되고,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씨 집안의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인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 등이, 천주교도 학살로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왔다는 예를 들어 천주교인 체포를 반대하고 나섰다.결국, 두 포도대장은 파면되고 천주교인 체포도 금지되었으며, 이어 8월 7일(음력) 투옥된 교인들이 철종의 명에 의하여 모두 석방됨으로써 9개월간에 걸친 옥사가 종식되었다.박해기간 중 숨어서 전교활동을 해오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재빨리 피신하였고,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경상도 죽림이라는 곳에서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신박해(庚申迫害))] 이걸 국가가 나서서 하는 박해로 취급하면 안되는거 아닌가?
조선 말기 비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 도모지 처형이 소개된다. 천주교나 화폐위조, 무고 등에 연루된 1천여 명을 죽일 때 도모지를 활용했다고 적었다. 사형 집행관이 무수한 사람을 처형하는 데 질려서 백지로 얼굴을 가리고 물을 뿌려 죽게 했다는 것이다. 도모지는 민간 차원에서 이뤄져 불법이었으나 처벌 사례는 드물다. 도무지라는 단어는 도모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도모지를 당할 때처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부사다. 이 유래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빈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박해에 도모지가 활용된다. 1860년 대규모 천주교 탄압(경신박해) 당시 도모지 처형 기록이 있다.
이거 말고 다른건 도모지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못찾겠네
많은 이를 살리기위해서 십자가를 밟는것 정도는 예수도 하느님도 백번천번만번 용서해줄꺼임 오히려 그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었다면 어서 십자가 위에서 탭댄스를 추지않고 무얼하느냐고 하셨을꺼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용서해도 목사나 그 신도들이 용서안함
ㄹㅇ 자기를 밟으면 자기가 사랑하는 애들 살린다는데 당연히 웃으실것
라고 생각해서 탭댄스를 췄다는거지 ?
이상으로 피고인의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
그래서 일본에서 발로 밟는 걸 해도 된다고 교황청에서 허가 했던가 그랬을 거임. 그런데도 못밟고 죽은 사람들도 많다고.
기독교 안 믿고 왜 믿는지 이해가 안가는 입장으로써 아니 종교 자체를 믿는게 이해가 잘 안가서 이런 영화들 보면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이해가 잘 안가더라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 뭔가에 의지하고 싶어지잖아. 그럴 때 의지하라고 있는게 종교야.
종교가 아니라 사람에 집중하면 괜찮기는 해
교회 다니면 인맥 쩔거든요.
종교를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인류사와 뗄 수 없는 거니 그러려니 하는 수 밖에 없음 종교정도로 인류와 함께 한게 별로 없으니까
별로없긴. 의 식 주 세가지야말로 인류와 함께한거지.
종교를 제외하고는 술 정도밖에 생각이 안나네
근데 사람들이 모여서 문화가 생기면 거의 반드시 신화가 생기고 종교도 생기지 않냐 4대문명도 다 신화가 있고 한국만 해도 단군신화랑 토속신앙이 있는데
그 의지 자체가 이해가 안감 이성을 버리고 맹목적으로 믿는것이 나도 사후세계의 두려움이나 그런건 있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함 결국 회피하는거지 제3의 입장에서는 망상속으로 회피하는걸로 보임 차나리 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게 아니라 어떠한 도덕적 윤리를 따르는 종파라면 이해가 가는데 사실 이게 한자로써 종교라는 단어의 원류긴 하지만 신을 믿음으로써 모든게 해결되고 그 신의 말만 맞다고 생각하는게 이해안감
내가 현대 시선으로 봐서 그렇긴 함 만약 나도 과거에 아무것도 모른체 살아왔다면 당연히 그런 신화는 믿었을듯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인 동물은 아니잖아.
이해 안가면 그냥 넘기면 된다 굳이 이해 가는사람들 속에서 그러지 말고
지금이야 종교 위상이 떨어졌지만 근대 이전까지 종교는 사회시스템과 세계관 그 자체였음 조선 관료주의도 유교사상 아래 건국되었고 서양 봉건사회는 기독교가 지탱했지 이슬람은 아직도 종교가 사회시스템 그자체이고 심지어 민주주의도 기독교적 교리 아래 유지됨 천부인권-하늘아래 인간은 평등하다
현대에도 '나쁜짓을 하면 결국 다 자기한테 돌아온다' '좋은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같은걸 은연중에 믿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그런 믿음이 인격화된게 신이겠지 뭐
인간이 평등한 이유를 종교말고 다른 증거로 찾을수 있을까?
킴칸사
아트 그것이야말로인류와함께했지.
유교는 신앙이 아니다.
요즘 고대유적들근거로 종교☞정착☞농경 순으로 인류가 발전했다는 가설이 지지받고있지않나?
학문에서 시작했지만 종교가 되었지 분류상 종교임
킴칸사
내가 말한거랑 조금 다른 소리긴 한데 당연히 그런 부분은 알고 있음 역사적으로 종교의 역활이라던가 동양쪽 종교는 현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느낌이 강하다면 서양쪽은 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깔고 들어가서 그럼 사회현상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와 대중들을 어떻게 공동체로 만드느냐로 보이겠지만 근데 만약 신을 믿는 대중들에게 종교의 근본은 신이 아니라 본질은 신을 믿는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그들이 이해할까? 우리학교가 기독교학교라 기독교교육시간에 저거 가지고 피터지게 이야기 했었음 신학의 영역에서는 인정하지만 개인의 영역에서는 항상 신이 먼저더라고
근데 종교宗敎라는 단어가 서양의 그것religion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긴 함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라면 얼마든지 밟으라고 했을거같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원작이 있다..
저런 박해가 있기 전인 임진왜란 당시엔 침략 선봉 가토 기요마사도 기독교 다이묘일 정도로 기독교가 공공연히 전파되고 있었지 근데 전국통일 되면서 엄청나게 박해당했고 개항 직전까지 비밀 결사 형태로 간신히 존재하게 되면서 이후로도 일본은 기독교의 세가 약한곳 중 하나가 됨
고니시
아 이런 고니시 유니나카 인데 앙숙관계라서 헷갈리게 적었네.. ㅠㅠ;
고니시 유키나가 가 맞음
고니시겠지
한반도 : 아 그래서 "자발적" 일어났냐구요? ㅋㅋ
유기농슈크림
이미 반란 일어나고한지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결국 살아남았지만 찬송가나 기도의 음등만 남고 거의 원형이 안남았지
저 당시 선교사들도 교리 면에서 어설펐던 게,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우상숭배가 금지돼 있음. 예수 모양 십자가든 동판이든 어차피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하기 위한 매개체니까 신성하고 중요한 거지,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인 건 아님. 축성했다고 해서 그게 신일 수는 없기 때문에 저런 상황에선 그냥 밟아도 됨. 그거 밟았다고 스스로 실망해서 배교하고 이러는 것 자체가 사실 신앙이 모자랐던 거.ㅋ
조선은 천주교가 저리 박해받고 길 뚫었는데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수월하게 들어온 느낌
저런거 보면 기독교인들은 참 자기들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는것 같음. 굳이 기독교 안믿는곳에 꾸역꾸역 와서 교육수준이 낮거나 선동당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거쟎음. 불교나 다른 토착신앙이 있음에도 그거 밀어내고 들이대는건데 당연히 저항이 있고 그 나라입장에선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도는 느낌일꺼임. 반대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종교가 유럽에 저런식으로 전도하면서 세력이 커졌다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같은 기독교끼리도 갈라서서 죽이고 배척하는 놈들이 퍽이나 이해해 줬겠다.
ㅂㅅ같은 댓글이네.그 불교도 처음에는 애니미즘,샤머니즘 밀어내고 들어온거고 그 과정에서 저항과 순교가 빈번하게 일어났음.그럼에도 결국 정착했지.니 말대로라면 우린 아직도 애니미즘,샤머니즘 믿어야 됨
불교 전파과정 알고 하는 소리임? 불교가 기독교 처럼 무작정 밀어내고 들어온거면 산신령벽화는 왜 있는데? 흰두교 신들은 왜 나란히 있고. 기본 전파 매커니즘이 흡수, 융화 이고, 그나마 저항이 적었던 이유가 그건데 뭔근거임? 전파 과정 자체가 완전히 평화로웠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기독교처럼 진짜 박살내면서 쳐들어 갔던 종교가 또 있음?
거기다가 타 종교를 거의 다 악마화 시키지. 우리가 악마로 알고있는 대부분의 이름도 알고 보면 지금은 사라진 다른 종교의 신이름들이 기원임.
어느 국가나 종교가 확장하면 기득권을 가지게 됨. 종교박해는 종교관점보다 정치적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