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명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수만명 규모의 병사들을 파병할 때 조선에서 쌀이라도 잘 사먹으라고 '은자'를 화폐로 주었음.
그래서 명나라의 병사들은 조선에 파병이 될 때 이 은자 몇걔씩을 쌀을 사먹을 용도로 지급 받았고. 명나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지.
하지만 이 당시의 명나라는 조선의 실상을 전혀 몰랐는데, 당시의 조선은 화폐 경제로 돌아가는 경제 체제가 전혀 아니었다는 거임.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쌀과 베, 무명 등을 화폐의 대용으로 쓰고 있었고, 이걸로 물물 교환을 하는 물물 교환 경제에 머물러 있었다는 거임.
즉, 당시 조선의 경제는 화폐 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은자는 쌀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었다는 거고.
결국 화폐에 해당하는 은을 가져가도 쌀을 사먹지를 못하다 보니까 명나라 병사들 입장에서는 약탈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음.
물론 약탈이 잘했다는 부분은 결코 아니지만은 화폐 경제가 전혀 통용되지 않는 나라에서 화폐가 무용지물이니 남은 방법이 결국은 약탈이었지.
조선에 왜 화폐 경제가 안돌아갔냐도 언급을 해야겠지. 고려 때 원나라 교초같은 신용 화폐에 달러마냥 쓰다가 인플레로 원나라 경제가 뒤져버리면서 고려 경제도 같이 뒤져버렸는데 조선 입장에서 그꼴 다 봤는데 화폐 도입한다고 쉽사리 손댈리가. 세종대왕도 실패했었음. 거기다 금, 은의 경우 명나라에서 조공으로 뜯어간다고 '아 우리나라에선 안나와요!' 라고 했는데
침략으로 떡실신된 땅에서 돈으로 보급 받는 게 지금이라고 쉬울지는 모르겠다만...
저 꼴을 다 봐놓고도 대동법 이 악물고 반대한놈들 클라스
금광 은광 개발 안한 이유가 조공으로 안뜯기려고 이미 고갈됨ㅅㄱ 해서 그런거긴 한데 그 이전에 조선이 화폐경제 할만한 경제력이 못됐음
물물교환은 상대방 한테 유용성이 있어야하는데 쌀파는 농민이 은이 뭐가 필요하겠슴.. 그나마 삼베나 무명이 조선사회에서 등가교환상품으로서 역할했었던거고..
조선도 당연히 은 귀한줄 알았음... 구리로 만든 동전은 안 썼지만, 은은 기본적으로 통용했음. 고려 때도 은병을 만들어 비자금 비축하고 했는데... 전쟁 전에 은들고 왔으면 그게 귀한 걸 아니까 은 받고 쌀 줬지. 조선 백성이 아프리카 원주민인 줄 아나... 은자를 안 받은 것은 은 귀한 줄 몰라서가 아니라, 전쟁 땜시 은보다 쌀이 귀했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 6.25때 국토가 개박살 났는데, 미군이 달라 들고 밥 달라하면 누가 해줌. 달라가 뭔지 몰라서 안 해준게 아니라, 그거보다 쌀 한 되가 더 귀하니까 안 해준 거지.
조선사회에서 은으로 할수 있는게 없었음. 그나마 평시야 관에서 시전이라도 열어서 어떻게든 사용하겠지만 전쟁중엔 그게 안되니까.
평시라면 또 모르겠지만 심지어 전시잖아. 조선인들 입장에서도 더더욱 식량이 필요한 상황이니 당장 식량으로 교환이 용이하지 않은 은을 안받는거.
워낙 내륙산지가 많다보니 수운을 제외하고는 상업을 확대하기가 어려웠지. 그나마 작은 내수상업규모를 다름아닌 선조 때 시전의 5도 확대로 해소해보고자 하였으나 호저에 그것을 논의한 바로 이듬해에 임진왜란크리가...
이 분은 이짤만 계속 쓰시네요 그나저나ㅋㅋ.
날먹 최적화임.
강제징발
침략으로 떡실신된 땅에서 돈으로 보급 받는 게 지금이라고 쉬울지는 모르겠다만...
저 꼴을 다 봐놓고도 대동법 이 악물고 반대한놈들 클라스
그런데 은 안받는 경제가 된 이유가 결국 명나라 때문으로 기억하는데
시라토리 히메
금광 은광 개발 안한 이유가 조공으로 안뜯기려고 이미 고갈됨ㅅㄱ 해서 그런거긴 한데 그 이전에 조선이 화폐경제 할만한 경제력이 못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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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촌
워낙 내륙산지가 많다보니 수운을 제외하고는 상업을 확대하기가 어려웠지. 그나마 작은 내수상업규모를 다름아닌 선조 때 시전의 5도 확대로 해소해보고자 하였으나 호저에 그것을 논의한 바로 이듬해에 임진왜란크리가...
조선에 왜 화폐 경제가 안돌아갔냐도 언급을 해야겠지. 고려 때 원나라 교초같은 신용 화폐에 달러마냥 쓰다가 인플레로 원나라 경제가 뒤져버리면서 고려 경제도 같이 뒤져버렸는데 조선 입장에서 그꼴 다 봤는데 화폐 도입한다고 쉽사리 손댈리가. 세종대왕도 실패했었음. 거기다 금, 은의 경우 명나라에서 조공으로 뜯어간다고 '아 우리나라에선 안나와요!' 라고 했는데
화폐 도입은 계속 시도했어. 여건이 안 되는데 화폐 안 쓴다고 곤장치던 게 세종대왕임....
그니깐. 그 세종도 밀다밀다 안된거면 그냥 전반적으로 화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서 답이 안나오는 상황인거지.
불신이 문제가 아니라 화폐 경제를 시도할만한 사이즈가 안 나온 거야 그냥......
은 같은 경우는 교환수단으로 유효했는데도 화폐경제가 성장을 못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임.
태종 때 저화 도입했다가 조지고 나서, 사헌부/사간원이 원인이라고 올린 상소에 가장 먼저 나온게 '백성들이 신뢰 안함' 이었음..
그건 도입하고 얼마 후에 쌀이나 면포로 교환을 안해준 게 문제였음. 태종 정부가 쌀을 확보하겠다고 개수작을 부렸던 거거든. 단순히 신뢰가 문제였던 거면 금속 화폐를 도입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그것도 안 됐잖아.
거기다 관공서조차도 자기네 화폐에 대해 신뢰를 못하고 현물은 받아버린 게 치명타였고.
애초에 태종 대에 도입한 저화는 사기쳐서 쌀을 긁어모으려고 발행한 거였음. 그러니까 그 꼴이 나지.
금속화폐 문제도 구리라는 실물을 쓰다가, 그 구리가 철저하게 수입에 유지하는 자원이라 통화량 부족으로 좇망했잖아. 그마저도 오히려 녹여서 써버리는 케이스가 나올 정도였고.
그러니까 금속 화폐는 제대로 활용만 했다면 가능했다는 거지. 그걸 못한 게 바로 국가 경제 사이즈가 ㅈㅁ 이기 때문이었던 거고.
고려 때엔 화폐 경제가 가능했던 게 몽골제국의 경제권에 편입되어서 가능했던 거지만, 명나라 서고 조선 건국되면서 독자적인 시장이 만들어졌는데, 그 상태에서는 화폐 경제를 진행할 사이즈가 안 나옴.
그 경제 사이즈가 좇망한 이유가 애초에 고려때 한번 인플레 쳐맞고 달러마냥 기축화폐로 쓰던 교초가 좇망했닥 했잖아... 아니 고려때에도 쓰던 게 금속화폐고 지폐인데 그게 왜 조선 때 안쓰겠냐고. 고려때 잘나가던 경제가 왜 조선때 좇망했는데??
바로 위에서 말했잖냐. 고려 때는 경제권이 조선보다 훨씬 컸다고. 고려조엔 몽골의 지방으로써 몽골제국이 이룩한 대 경제권 내의 일부로 굴러갔음. 근데 몽골 망하면서 그게 안 됨.
아니 그래서 첫 댓글에 몽골 경제 망한 사이드 이펙트가 컸다고 말했는데 뭘 말하고 싶은거냐 대체??
애초에 네 댓글 자체가 모순이라고. 1. 고려 조에 화폐로 경제가 망했다는 판단이 섰으면 화폐 경제를 시도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2. 근데 태종-세종은 화폐 경제를 시도했다. 3. 네가 적은 [조선 입장에서 그꼴 다 봤는데 화폐 도입한다고 쉽사리 손댈리가]는 이 시점에서부터 모순이다. 왜냐면 3대라고는 해도 사실상 2대인 태종 때에 이미 손을 댔거든. 그리고 고려 조에 화폐가 망한 건 화폐 경제나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스템을 깨는 무리한 신초 발행이 원인이었다. 대충 조선 말 당백전하고 똑같은 문제였고 구조도 같았다. 정리하자면 조선에서 화폐 경제가 후반기에 들어서야 성공한 건 조선이라는 국가의 시장 사이즈가 ㅈ만해서였을 뿐이라는 거.
1. 통치자 입장에서 화폐가 이득이란건 익히 고려때 경험을 했으니 시도를 한거고, 그걸 백성 선에서 신뢰를 못얻어서 망했다고. 이건 실록에 당시 당사자들 시선에서도 기록된 사실이라고. 2. 태종/세종의 화폐도입은 태종같은 경우엔 국가의 이권확보였고, 세종의 경우엔 유가적 왕도정치의 수단으로써의 목적도 있었음. 이건 뇌피셜이 아니라 한국경제학회에서 나온 '세종의 화폐개혁 실패원인' 이란 글에서 나옴. 3. 조선 '통치자'는 화폐도입을 했지만, 그 돈을 쓰는 조선 '사람'들이 쉽게 손을 안댔다고. 당장 돈이 종이쪼가리 되는 경험 했는데 왕조 바뀐지 뭐 얼마나 됐다고 그거 믿고 쉽게 쓰겠냐고.
그리고 앞서 말한 '세종의 화폐개혁 실패원인'에선 크게 두가지를 핵심 원인으로 집는데, 정작 화폐를 발행하는 관에서 세금을 실물화폐로 쳐받아서 가뜩이나 조진 신뢰를 더 밑바닥으로 쳐박았고 두번쨰로는 이미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깊게 신뢰가 생긴 미포를 병행해서 썼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1. 그러니까 그건 화폐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태종 정권의 문제였고 고려 말에 일어난 화폐 경제 마비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고려 말에 화폐가 망한 경험 때문에 백성이 신뢰하지 않은 게 아니라, 초기엔 저화를 가져다 주면 쌀이나 오승포로 바꿔주던 놈들이 목표로 삼았던 미곡 확보에 성공하니까 저화를 쌀이나 면포로 안 바꿔준 게 원인이었다. 2. 화폐와 유가적 왕도정치는 별 상관이 없음. 신세돈 그 양반이 경제학 교수인 건 맞는데 유학의 전문가도 아닐 뿐더러, 전공한 경제 종목도 전근대가 아니라 근현대가 세부 전공일 걸? 아무튼 유교의 왕도정치와 화폐는 별 상관이 없어.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에서는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는 것을 경제적 목표로 삼는 건데 화폐는 생업을 보장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조선은 초기부터 중농주의를 표방해 온 집단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 물론 초기 훈구파(이때까지는 훈구파라고 불리지도 않았지만) 세력이 사림 핵꼰대들과 달리 상업에도 나름 관용적이긴 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지주 세력이기 때문에 상업이 크는 걸 좋게 여기지 않았어. 3. 애초에 고려는 원나라 신초의 피해가 적었던 지역임. 애초에 이 원나라 신초는 원나라에서도 거의 강제적으로 밀어붙인 지역에서나 피해를 본 거라서 변두리 경제권인 고려에는 제대로 통용도 안 됐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인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거래를 할 때 신초를 안 받았거든. 따라서 돈이 종이쪼가리 되는 경험은 사실상 태종 때에 처음 했다고 봐야 돼.
애초에 토크토아가 신초를 발행해서 원나라 저화를 개쌉쓰레기로 만든 건 고려 공민왕 초기~중기 시절임. 그리고 태종이 저화를 만들어서 유통하려고 했던 건 이 때부터 대충 50~60년이 지난 후의 일이야. 고려 때 저화가 종이 되는 경험을 한 놈들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물론 그 사람 자식들도 다 죽었을 때임.
몽골 인플레 여파로 작살난 화폐 개혁한답시고 공양왕 때 저화 도입했다 조진 건 왜 카운트 안함?? 1391년 공양왕 3년에 도입됐고, 이건 사실상 이성계를 위시한 신진사대부 애들이 주도했다가 조진건데 뭔 경험이 없어. 이후 태종이 화폐 또다시 들고온 게 딱 10년 후인데.
그건 발행 시도만 했고 민간에 대규모 유통은 안 됨.
기껏해야 권문세족들 삥뜯는 수단으로나 쓰였지.
우웩
그냥 평범하게 은이라고 물물교환 했음 된거아님....?
쌀을 쌀로 물물교환 하는 것도 웃긴 거고, 명나라 병사들이 베와 무명을 가져왔을리가. 은자로 쌀을 사먹으려고 쌀도 안 가지고 왔는데.
루리웹-4304559398
물물교환은 상대방 한테 유용성이 있어야하는데 쌀파는 농민이 은이 뭐가 필요하겠슴.. 그나마 삼베나 무명이 조선사회에서 등가교환상품으로서 역할했었던거고..
루리웹-4304559398
평시라면 또 모르겠지만 심지어 전시잖아. 조선인들 입장에서도 더더욱 식량이 필요한 상황이니 당장 식량으로 교환이 용이하지 않은 은을 안받는거.
상인놈들은 기를쓰고 바꿨을것 같은데 전쟁통에 어디 시골짝이 마을만 다녀야 되서 별수없는건가;;
루리웹-4304559398
조선사회에서 은으로 할수 있는게 없었음. 그나마 평시야 관에서 시전이라도 열어서 어떻게든 사용하겠지만 전쟁중엔 그게 안되니까.
전시상황에 상인이라도 별 수가 있나. 가진 거 정부나 왜적들에게 안 뺏기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을 텐데.
결국은 조선 조정이 명나라 군사들한테 밥 챙겨준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멈춤....
두부엔딩
조선도 당연히 은 귀한줄 알았음... 구리로 만든 동전은 안 썼지만, 은은 기본적으로 통용했음. 고려 때도 은병을 만들어 비자금 비축하고 했는데... 전쟁 전에 은들고 왔으면 그게 귀한 걸 아니까 은 받고 쌀 줬지. 조선 백성이 아프리카 원주민인 줄 아나... 은자를 안 받은 것은 은 귀한 줄 몰라서가 아니라, 전쟁 땜시 은보다 쌀이 귀했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 6.25때 국토가 개박살 났는데, 미군이 달라 들고 밥 달라하면 누가 해줌. 달라가 뭔지 몰라서 안 해준게 아니라, 그거보다 쌀 한 되가 더 귀하니까 안 해준 거지.
중국은 명나라때부터 가상화폐찍은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