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 음력 5월 4일, 함경도 북병사 김종득이 이끄는 3천여명의 조선군과 그에 호응한 3백여명의 친조선 여진 번호 연합군은 1603년부터 1605년까지 번호들을 공격, 흡수해온 동시에 조선군을 상대로 무력도발, 더 나아가 실질적인 공격을 가하여 동관을 함락한 '울라'에 대해 반격을 가하기 위해 출정했다. 공격 대상은 울라군의 전진기지인 건퇴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정토 시도는 참혹한 실패로 끝맺어졌다. 휴식 없는 강행군과 그로 인한 병사들의 피로, 식수 보충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무리한 활동으로 인한 병사들의 체력 고갈, 작전 계획의 붕괴, 정토 정보의 외부 노출등 최악의 악재들이 겹친 상황에서, 조선군은 건퇴에 대한 무리한 약탈과 분탕을 시도했다가 도리어 매복하고 있던 울라군 수백여기에게 급습당했다. 조선군은 급습의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방어전도 펼치지 못하고 퇴각, 그 과정에서 수백명의 전사자와 그보다 많은 부상자를 내며 완전한 참패를 당하였다.
이 때 전사한 군병의 수효는 전투가 끝난 뒤 확실히 파악된 숫자만 정군(正軍) 213명이었다. 그러나 추산되지 않은 종군병력을 추산하면 이보다도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1 동시에 위에 언급했듯 부상병의 숫자도 상당했고, 또 울라군에 포로로 잡힌 군병까지 존재했기에 전체 종군병력의 약 3할 가량이 손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손실이 이 정도에 그친 것도 우후 성우길과 회령 판관 이상룡이 최선을 다하여 후방에서 아군을 엄호한 덕이었으며, 그들의 분발이 없었다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건퇴 공략이 참혹한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건퇴 전투의 판단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웠다. 그것은 함경 감사 서성이 북병사 김종득의 보고를 기반으로 한 장계에서 건퇴 공격을 승리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서성의 보고의 내용은 건퇴 정토는 비록 건퇴 요새 자체에 대한 공략은 진행하지 못했으나 아군을 급습한 울라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적의 정예 절반 이상을 살상했으며, 아군의 전력을 보전하였으므로 승리에 가깝다는 논지였다. 다만 적에게 아군의 약점을 보인 것이 안타까우며, 진군로를 바꾼 탓에 건퇴에 대한 공략 자체는 시도하지 못해 향후가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2
서성의 보고는 전체적으로 '큰 득을 보진 못했고 아쉬운 점도 많으나 적은 격퇴하였으며 아군의 전력 역시 온전한 전투'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런 탓에 비변사에서도 해당 전투의 문제점과 향후 사세를 지적할 뿐 확실하게 승리 혹은 패배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3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함경도 안문 언사 이정험이 제대로 된 상황을 전달하기 시작하자 평가가 달라졌다. 이정험의 최초 보고는 서성의 보고가 조정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1605년 음력 5월 22일에 조정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이번의 건퇴 공략 시도가 울라군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참혹한 패전으로 끝났으며 그 이후 아군이 지리멸렬 퇴각했고, 가까스로 성우길의 분전 덕에 전멸 당하진 않았다는 보고였다. 사상자 역시 상당하다는 내용 역시 보고에 끼어 있었다.4
이정험의 보고가 도착한 뒤 조정을 구성하는 대신이며 관원 다수는 건퇴 전투에 대해 확실한 패배라는 인식을 가졌다.5 그나마 얼마간은 '서성과 이정험의 견해가 다르니 판단을 유보하고 상황을 자세히 살피자'는 의견도 나왔으나6이후 지속적인 후속 보고들이 도착함에 따라 패배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한 것이 파악되었다. 음력 7월 무렵 선조는 건퇴 전투에 대한 패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7패전 책임자였던 서성과 김종득은 각각 파직과 나국의 처벌을 받았다.
건퇴 공략의 패전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울라에 대한 선제타격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두만강 지역에 대한 군사적 우위 역시 상실했다. 조선은 건퇴에 대한 정토를 다시는 시행하지 못했고, 군사적으로 수비 전략을 강화함으로서 전략노선을 전환했다.
한편 건퇴 전투 직후 무렵, 부잔타이는 조선을 압박하여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달성코자 했다. 그가 원하는 바란 바로 조선과 강화협약을 맺고 직첩을 얻어내어 조선으로부터 녹봉을 받는 동시에 교역을 진행하여 물자를 충당하는 계획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설명했다시피 부잔타이는 1603년 음력 8월~12월의 전투 이후부터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얻고자 했다. 당장 건퇴 전투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던 1605년 음력 3월의 동관 전투 역시도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직첩을 얻고자 한 심산이 강하게 반영된 행동이었다.
부잔타이의 요구는 음력 5월 건퇴 전투 직후부터 조선에 다시 전해지기 시작했다.8 그러나 이 시기의 부잔타이의 직첩 요구가 건퇴전투의 승전 결과를 반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시기상으로 볼때 부잔타이의 직첩요구는 최소 음력 5월 15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건퇴 전투는 음력 5월 7일에 발생하였으므로 부잔타이가 건퇴 전투의 결과를 자신의 '음력 5월 직첩 요구'에 반영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이 때의 직첩요구는 당해 음력 3월 벌어진 동관 전투의 결과만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 부잔타이는 자신이 붙잡은 포로들을 매개로 직첩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협상 시도는 이미 1604년에도 한 차례 시도했던 전적이 있었으며, 또 1606년에 직첩을 받으면서 실제로 포로들을 송환하였으므로 그 가능성이 타당하다. 또한 조선이 요동에 보낸 자문에도 부잔타이가 포로 송환을 매개로 직첩을 요구한 정황이 보이기에 합당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9
부잔타이의 첫 번째 서신이 조정에 전달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퇴 전투의 결과가 조정에 도착했다. 조선 조정측에서는 부잔타이의 요구가 마뜩치 않았으나 건퇴 전투의 결과 탓에 부잔타이에게 직첩을 수여함으로서 울라와의 강화를 진척시켜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로서 부잔타이에게 첨지중추부사(정 3품)의 직에 상응하는 직첩을 내리고자 했다.10
부잔타이에 대한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은 음력 7월중에 북병사 김종득에 의해 부잔타이에게 전해졌다.11그러나 부잔타이는 자신 몫의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에 만족치 않고 추가적인 직첩을 100장 요구했다. 그것은 자신의 휘하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명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애초에 부잔타이가 직첩을 요구하는 주요 목적중 하나는 직첩에 수반하는 녹봉이었다. 그런데 부잔타이가 고작해야 강화의 증표 역할을 하는 직첩 하나로 만족할 리가 만무했다. 부잔타이는 조선에 보다 확실한 대가를 원하고 있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7월 5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9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0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6일, 28일
6.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5월 28일, 29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7월 6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29일에 부잔타이가 보내온 서신과 그가 요구한 직첩에 관한 의논이 나온다.
9.장정수, 선조대 대여진(對女眞)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조선시대사학회, 2013, p.194.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11월 17일. 실제 수여는 음력 7월중에 있었으나 음력 11월 17일 기사에 기록된 이유는 당시 북병사 이시언이 포로 쇄환과 직첩의 추가 지급에 관한 건을 보고하면서 당시의 개유절목을 함께 올린 것이다.
으앜
요약 점.....ㄷㄷㄷ
1. 조선군의 울라요새 '건퇴'에 대한 공격 실패, 패전 2. 울라는 이 무렵 지난 3월의 동관 전투 승전을 기반으로 조선에게 직첩 요구 3.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울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기조로 가닥을 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