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전 초기에 함선 불태우고 4척의 배에 운용가능한 병력만 태우고 내 뺀 거에 대해서
충무공께서 까질 않으셨음.
다른 걸로는 다 까도
개전 초기 원균이 한 행동은 까질 않으셨음
즉 무리하게 싸워서 적의 사기만 높여주고
아군의 피해만 크게 하느니
차라리 운영가능한 병력으로 청야전술을 펼친 셈이라
이걸로는 사실 까기 애매함.
물론
부임한 직후에 빡세게 병사들 훈련시키고
병장기를 마련했다면 4척이 아니라 더 많은 배를 확보했겠지만.
뭐 그거까지 바라는건 솔직히 원균 상대로는 욕심이지.
뭐 솔직히 합류할 당시만 보면 뭐 그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정상정도는 해주겠지 식으로 드라이하게 봤다는 느낌이 있는데 가면갈수록 이 씹새가 하는짓이? 식으로 바뀌지 ㅋㅋㅋ
안깐게아니라 어쩔수없지 씁.. 에 가까움
근데 일본움직임이 심상치않으니 파격승진으로 앉은자리인데 순찰도 안하고 살고있던건 좀 그렇지않나
사실 그것도 부임한지 3개월만이라.
부임한지 3개월이 면피가 되냐? 아니 설령 된다해도 시발 배는 가져와야지 ㅋㅋ 박홍이랑 다르게 염병 시간이 1달 넘게 있었는데 그게 면피가 됨? ㅋ
안깐게아니라 어쩔수없지 씁.. 에 가까움
아니 딱히 거기에 대해서는 그런 반응도 아님. 나중에 보면 원균이니까 어쩔 수 없지 씁..하는 건 나옴.
뭐 솔직히 합류할 당시만 보면 뭐 그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정상정도는 해주겠지 식으로 드라이하게 봤다는 느낌이 있는데 가면갈수록 이 씹새가 하는짓이? 식으로 바뀌지 ㅋㅋㅋ
아님 초장부터 개ㅂㅅ 이었음 원균이 장계를 써서 보내는데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천안(天安)에 이르니 병사 신익(申翌)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방어사 이옥(李沃)과 이세호(李世灝) 등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원균이 왜선 30척을 격파했다고 거짓 장계를 써 보냄, 애초에 원균은 최소한 5월 정도 쯤에 여유가 있는 견내량 서쪽 지역 함선 정도 수습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지도 알고있음 게다가 김성일 장계 내용을 보자면 6월에도 배만 없다 뿐이지 병력은 있었어 이게 뭔소리냐 하면 걍 왜군 대병력이 드랍 하니까 싸우자니 뒈질거 같고 장장 한달반 동안 도망만 치다가 휘하 재장들이 육군에 착출되어 싸울 정도가 되니 지도 육군에 끌려갈까봐 좌수영으로 튀어서 기생하려고 했다 결론밖에 안남
↗무 위키에 누가 개소리를 장황하게 써놔서 착각하는 사람들 많은데 개전 초기 원균 관할지는 공격 받지도 않았고 김성일의 장계 내용상 원균은 개전 이후 1달 이상 동안 여유 시간이 있었음 그리고 이억기가 20일이 걸리니 이순신이 병력 소집에 보름이 걸렸니 개소리를 하는데 이순신은 정확하게 4일 만에 병력 소집을 끝냈고 이억기 가 1차 출정에 기일을 못 맞춘 건 맞지만 애초에 이억기의 담당 구역인 전라우수영은 제주도 부터 군산도 까지 커버 하는 넓은 범위고 거느린 군포가 많아도 전러 좌수영과 비슷한 담당 구역을 가진 경상 우수영 이 꼴랑 4척? ㅋㅋㅋㅋ 어디 개소리를 왜군이 서진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음 그래서 원균이 왜선 30척을 격침시켰느니 어쩌니 거짓 장계 까지 쓰는거지 6월까지도 경상우수영 관할지는 대부분 온존했고 병력도 모였음 배를 모조리 태워 먹어서 오히려 육군으로 징발 당하지, 혼란 상황이라 그렇다 어쩐다 하는데 최소한 여유가 없어서 자침 했다는 변명 하려면 경상좌수영 까지가 커트라인 이다 , 아니 아무리 관대하게 보려고 해도 11관 22포를 가진 경상우수영 전력을 생각해 보면 전라 좌수영 전력 만큼은 가져왔어야지 이순신 장군 최초 승전지가 6월16일 거제도 옥포만 일본군 본진 된 부산포 앞바다임 5월 그냥 쳐 날려 먹고 좋다 견내량 기준 동쪽은 포기했다 쳐도 3분의2가 넘는 관포가 남아있는데 이걸 날려먹었다 근데 이게 청야전술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