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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이 개전 초기에 나름 잘했다는 증거
랍니다...
이게 애초에 말이 안되는게 원균은 생각보다 널널하게 시간이 있었음 이유야 별개 없는데 일본군이 서진 자체를 안했으니까
그래서 원균이 거짓 장계를 쓰는데 그게
상이 이르기를,
“아군(我軍) 중에 계속 오는 자가 있었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천안(天安)에 이르니 병사 신익(申翌)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방어사 이옥(李沃)과 이세호(李世灝) 등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신이 익(翌) 등에게 ‘성상께서 이미 거둥하셨는데 어찌하여 경성으로 가지 않는가?’ 하였더니 이옥(李沃)의 말이 ‘그 말이 옳다. 군사를 인솔하고 전진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은 또 길에서 심대(沈岱)를 만나서 역시 같은 말을 하였더니 심대 역시 밤을 무릅쓰고 달려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10일 기사 중에서
이거 ㅋㅋ
이런 장계를 낼수밖에 없는이유? 경상좌수영 이야 일본군 드랍지 였기 때문에 면피가 되지만 원균은 최소 전선 70척 병력 1만의 초대형 수영의 지휘관 인데 대부분의 관할영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안했다 라는 이야기는 나는 싸우기 싫다 라는것 밖에 않되니까
실제로 원균이 병력동원 했다는 증거는 많이 나옴
1592년 6월 28일자 김성일의 장계에서 진해, 고성, 남해는 경상우수영 수군 관할로 원균과 함께 결진했었으며, 거제는 현령이 육전에 참가하러 성을 떠나 있고, 곤양은 수령이 육지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지만 상당수 병력이 수군에 있었음이 이순신의 기록들에서 여러 차례 확인된다.
6월28일자 김성일의 장계 내용을 보더라도 원균은 관할지에서 분명히 병력을 모은게 맞음 물론 급한데 원균 저 식충이 새끼가 거짓 장계나 올리고 전투거부 하는 와중에 배도 모조리 자침시켰으니 이 병력들이 육군으로 돌려진 건 맞는데 애초에 수군 함선이 있었으면 부산포로 들어가서 일본군 증원 차단하고 부산 함락은 못시켜도 보급선 모조리 아작내서 임진왜란 자체를 조기 종결 시킬 여지는 분명 있었음
열불 터지는 나무위키 내용
원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 70여척을 전부 자침시켰다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전근대 조선수군과 현대 한국해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다. 현대 해군이야 모항에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승조원들이 언제든지 출동지시에 응할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키워진 전근대 조선수군은 소규모로 쪼개어 관할 진포에 흩어져 있었다.
경상우수영이 수영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곤 하나 그만큼 관할 구역도 넓어 임진왜란 직전에 8관 16포였다. 70여척의 전선들은 8관 16포에 흩어져 있었지 경상우수영에 모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배를 움직일 인원들도 항시 배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수군은 상하번으로 나뉘어 근무했고 전시에는 지방관들에게 통보해 병력을 소집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고니시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관할에 상륙했지만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우수영 관할로 상륙해 밀고 들어왔고 전쟁 이틀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경상도 전역이 전쟁공황과 행정마비 사태가 몰아닥쳤다.
경상우수영의 3분의 1 규모로 경상-전라 4개 수영중에 가장 규모가 작았고 전화를 입지 않았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병력과 전선을 모두 소집하는데 보름이 걸렸다. 전라좌수영의 2배, 경상우수영의 3분의 2 정도 규모인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은 해당 기간안에 병력과 전선을 모으는데 실패해서 이순신의 1차 출동에 함께하지 못했다.
전화도,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없던 시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예비군 소집문자 보내면 택시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전라좌수영이 소집에 보름이 걸렸고, 전라우수영이 그보다 오래 걸렸다면, 제일 큰 경상우수영은 당연히 20일 이상 소모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다는 가정하에.
자들에게 파고들 틈을 준다. 경상우수영 전력은 원균이 70척을 불태운게 아니라 애초에 모일 틈도 없어서 각 진포에 흩어진채 와해되었다고 보는게 맞으며 원균이 군영을 불태운건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대응이다.원균옹호론. 단순히 경상우수영이 와해되었다고 원균을 비판하거나, 그 자리에 이순신이 있었으면 달랐을거란 주장은 전근대 시대상과 소규모 국경방어 병력이 시간을 끄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내려보내는 조선의 방어전략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비판이 원균은 경상우수영 전력을 동원할 시간 자체가 없었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무리였다즉,
??????????????????????????????
구로다 나가마사 3군이 경상우수영 관할지에 상륙하긴 했음 단
김해만 털고 바로 북진 했지 때문에 관할지를 다 털었다? 아니요 애초에 장계 내용에서 조차 원균이 병력을 모집한거 자체는 여러 차례 검증되고 전쟁 초반 일본군은 한양 점령 후 계속 북진한 목표에 눈이 벌개져 있었지 때문에 한산도 대첩이후 견내량을 경계로 통제영이 설치되고 전라 좌수영 수군 병력이 1만이 넘고 판옥선이 배로 불어나는게 다른게 아니라 경상우수영 관할지 상당 부분이 이순신이 관리하게 되었기 때문
병력 소집 문제도 웃긴게 이순신이 보름(15일)이 걸렸다고 구라를 치고 있지만 그냥 이억기와의 약조 기일이 5월1일 이라 대충 떄려 맞춘거고 이순신이 병력 소집을 끝낸 시점은 개전 후 4~5일 정도로 보는게 일반적
그럼 이억기는 왜 5월1일 약조 시간을 못 지키고 6월3일 에야 합류했는가? 이건 의문이 많은데 애초에 1차 출정 은 이억기 관할 구역 상 못 맞출 시간이 맞음 그럼 원균도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억기 관할 관포가 적지만 엄청 넓은 구역에 흩어져 있음을 간과한 것
제주도부터 충청도 시작 점 까지가 관할지 그리고 전력 상 3수영 연합 함대 가 패배하면 충청도는 물론 한양까지 프리패스라 (충청 수영은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함 충청 수영 전선 9척 경기 수영 전선 4척) 함대를 재배치 하고 만약을 대비할 준비를 하는게 상식적 이었고 때문에 이억기는 항상 병력의 절반 가량을 자신의 관할 지역에 배치하고 출정
경상 우수영이 더 많은 진포 담당 구역을 가졌다고? 실제로는 좁은 지역에 병력을 몰아 준게 맞음 왜냐고? 왜구에 상시 털리던 곳 이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모자랐다가 절대 면피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딴게 아니라 애초에 원균은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지 모든 정황을 보더라도 왜군이 견내량을 통과한 적이 없으니까 일본 3군의 영내 끄트머리 박살낸거 감안해서 관대하게 봐줘도 우수영 3분의2 전력은 온존 할 수 있는 상황이고 여러 정황상 병력 소집도 된 게 분명한데(아니라면 육군에 끌려갈 이유도 없음) 이게 변명이되나?
경상 우수영 3분의 2 전력이면 이순신은 부산포 털어볼 만한 전력이고 명장이 아니라 그냥 고만 고만한 장수여도 거제도 서쪽에 있는 병력 끌어 모아다 견내량 틀어막는 시늉은 했겠다. 근데 가져온 전선이 4척 ㅋㅋ 원균 이 식충이 새끼 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음
이순신이 아니라 경상 우수영에 이억기만 박아놨어도 거제도는 지키는게 펙트 (절대 이억기 장군이 고만 고만한 장군이라는건 아니고 용장이고 맹장이라고 생각함 칠천량에서 이억기 장군이 보여준 용기를 보면 원균 옹호론자가 주장하는 맹장?! 원균이 이억기 장군 반에 반절 만한 용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버러지 같이 지는 일 없었음)
경상 우수영에 누가 있어도 무리였다고? 이순신이 명량 승전 이후 함대 복구하며 신들리게 싸우는걸 봐라 노량 해전까지 복구한 전선 다 합해 해봐야 60척(나대용이 정유재란 직후 보고한 전선수)으로 일본군을 그렇게 농락했는데 뭐라고요?
원균 옹호하는 썩을놈들 꼬라지가 유머
관상 이즈 사이언스..
한산에서 배우분 비주얼이 딱 맞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