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그놈의 영지주의..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귀에 딱지가 다 앉을 지경이지?
근데 '왜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잘 이뤄지지 않길래
이번에는 그 얘길 해볼까 함.
결론부터 말하면, 티바트의 서사는
영지주의를 온전히 채택한 게 아니라,
뒤집어 꼬아서 '비틀고' 있음.
사실 영지주의라는 떡밥을
이미 알면서도 눈치 빠른 사람은
못 느낄 수가 없는 거지만,
난 좀 본격적으로 털고 싶었음.
근데 이 얘길 하자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먼저 알아야만 됨.
이걸 모르면 붕어 없는 붕어빵임.
(..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번에는 게임이랑 영
관계없는 내용물이 많음.
저 게시글을 본 사람들은
원신 서사의 핵심이 곧
'나눌 수 없는 둘'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했을 것임.
현대철학(구조주의)에서
이항대립이라 부르는 개념으로
이걸 설명하면, 아래와 같음.
'일명 '좋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동시에 '나쁜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이 공존해야
어느 쪽이든 존재할 수 있다.'
-라는 개념 정도임.
예시를 들어볼까?
몬드 서사의 핵심은 [자유]지만,
이걸 알자면 선험적으로,
즉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구속]의 개념을 알아야 함.
[구속]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자유]를 이해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 반대도 과연 가능할까?
이항대립은 그렇지 않다고 함.
하지만 이보다 이전에
'둘의 구조'를 담은 철학,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한쪽만 편식하려고 했음.
근데 편식을 하면 어떻게 돼?
속에 얹히잖아? 체한다고.
그래서 여행자가 티바트의
각 국가를 갈 때마다
'좋은 쪽'만 먹으려다가
체해서 배탈이 난 바보들의
영양 불균형을 해결해준 거지.
여기서 얘기를 더 확장하기 위해
이제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함께 알아봅시다.
출발은 고대 그리스의..
..전부터 내가 쓰던 글
꾸준히 보던 유게이는
당연히 플라톤인 줄 알겠지?
거 안 됐구만, 이번에는
파르메니데스부터 갈 거다.
이 양반이 훨씬 원론적인
'둘'의 존재론을 다뤘거든.
이 아저씨는 아래 같은 말을 했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단순히 같은 관념을
동의어로 반복한
한 쌍의 문장 같지만,
저 이후로 나오는 사유는
파급력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
있는 것은 '있기만' 할 수 있고,
없는 것은 '없기만' 할 수 있다는
발칙하면서도 당연한 생각으로 옮은 뒤,
그 반대의 성립은 불가능하다고 여김.
있는 것은 없게 될 수 있나?
아니..
그럼 없는 것이 있게 될 수 있나?
이것도 아니지..
서로 교차가 안 된다고.
무에서 유로 가고(생성),
유에서 무로 가는 것(소멸)은
현대인들 상식에서도
크게 어려운 개념은 아니지?
하지만 정말 그렇던가?
분야가 영 어울리지 않지만..
가령 질량 보존의 법칙,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잖아?
질량이나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해?
아냐, 그냥 형태를 달리할 뿐이라고.
그래서 '있는 것'을 곧
'온전한 존재'로 격상시킨 게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임.
저걸 명제 하나로 사유한 거라고.
(그래서 진정한 철학의 아버지로 불림.)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이
훗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됨.
이 가설이 맞다면 플라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있는 것만 계속 있으니
있다는 개념이야말로 진리이고,
없는 것은 계속 없으니
없다는 개념은 거짓이고 허상이구나!'
그래서 이 고약한 노친네가
이데아론을 만들어서
자꾸 우리가 사는 세상더러
'가짜 세상'이라고 까내린 거지.
아니, 더 나가서 눈 앞에
펼쳐지는 것들도 부정했지.
가령 예술행위는 이데아로부터
거짓된 모방을 한 행위니까
근절돼야 한다고도 했음.
허나 이데아론의 설명이 명쾌해서
이후 시대로 넘어가면서도
저런 사고 방식은 계속 살아남음.
그런 흐름을 '플라톤주의',
서구권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라 부름.
근대 철학한테 줘팸당할 때까지
정말 오래도 장수하셨지.
(사실 지금도 죽었다고 하기엔 좀 그래.)
[있음, 진짜, 진리, 선, 빛,
신, 천사, 영혼, 구원..]
이런 거 보면 어때?
누가 봐도 따르고 싶지 않을까?
과학의 실증주의가 없던 시절에
이런 믿음의 견인력은 그 위력이
이루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음.
진짜 나열한 꼴만 본 건데도
내 안의 크리스천이 깨어나지 않음?
반대로..
[없음, 가짜, 거짓, 악, 어둠,
마, 악마, 육신, 타락..]
이야, 보기만 해도
배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뿜어져 나오지 않음?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철학적 뿌리가 파르메니데스라면,
신화나 전설의 뿌리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임.
본디 '낙타 부리는 사람'을
뜻하는 조로아스터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로,
최고신 아후라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를 창시한 사람임.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는
선함과 좋음을 대변하는 아메샤 스펜타,
그리고 악함과 나쁨을 상징하는
앙그라 마이뉴가 등장함.
여기서 아메샤 스펜타는
다시 일곱 종류로 나뉘는데,
이 교리가 아마도 훗날
영지주의를 비롯해 인근 국가의
다른 교리에 흡수된 걸로 추정됨.
이것만은 원신 티바트의
집정관 구조와도 흡사하지?
사실, 저걸 직접 인용한 게
바로 수메르 아카데미아의
6대 학부이기도 함.
엥, 6개뿐인데 무슨 소리냐고?
아냐, 한 명 빼먹었잖아,
가장 중요한 '풀의 신'을..
그래서 실은 '6+1'의 교리인 셈.
설산을 다 털어먹은 유저들은
아마 이미 접했을 거임.
어느 암호문을 해석했더니
일곱 집정관들 사이에
천리의 주관자가 끼었거나,
혹은 그 첩자가 숨었다는 떡밥을..
즉, 티바트는 '일곱' 집정관이 아니라
위처럼 '6+1'의 구조인 셈이지.
(*댓글 제보로는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고 함.)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등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이어져
무려 2천년 넘도록 서구권을 지배했음.
근데 이딴 지겨운 소리를
왜 하고 앉아 있느냐..?
저걸 고대로 빨아먹은 관념이
로마의 기독교로 이어졌고,
기독교에 이단교리까지 끼얹어
파생한 게 바로 영지주의거든.
가령,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목표가 '천국'에 당도하는 거지?
그러려고 맨날 기도하고,
십일조도 내고, 봉사도 하잖아.
그 반대가 '지옥' 당첨이고.
근데 서기 2세기 경에
로마 주교(교황) 선출에서
발렌티누스라는 아죠씨가
그만 낙마하고는 삐져서 탈주함.
그 길로 촌구석에 박혀서
기독교 교리랑 플라톤의
대표저서 티마이오스의 용어들을
적당히 섞어 만든 사이비 종교가
나스티시즘, 즉 영지주의임.
얘는 기독교보다 한술 더 뜸.
기독교는 예수의 '사랑' 교리로
수많은 대중을 포용했으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차별과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저항해
압제의 구속을 벗으려던 종교임.
근데 영지주의 이눔 시끼는
구원의 대상을 한정해버렸음.
포용주의의 기독교를 씹은 거지.
포용의 종교에서 파생했으면서
'선택된 자' 개념을
악용하기 시작한 거라고.
이거 게임 안에서도 봤을 텐데,
뭔지 짐작이 감?
평범한 사람들, 즉 범인의 눈에
신의 눈 수여는 신의 축복이자,
보다 우월한 힘의 상징임.
영지주의는 신의 눈처럼
특별한 존재에게 수여되는
'신성한 영혼'을 가진 존재만
신성한 지식, 즉 영지를 깨우쳐
하늘(플레로마)의 부름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가짐.
도토레 이 광인이 시뇨라 장례식에서
괜히 이런 말을 떠든 게 아님.
"사람들은 신의 영지(Gnosis)를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지식으로 여기지."
여기서의 영지(나시스)는
보통 영적인 지식으로 읽히나,
실은 *영지주의에서의 영지임.
(*영어로는 나스티시즘.)
영지로써 내 신성함을 깨닫고
하늘에 승천할 자격을 받아
거지같은 대지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고향인 하늘로 가는 게
바로 영지주의의 핵심 교리임.
(게다가 스카라무슈는
얼마나 하늘에 닿게 됐는지
그 진척도를 가늠하기 위한
잣대에 불과했고.)
ㅇㅇ?
안 그런 사람들은 어쩌냐고?
어쩌긴 뭘 어째, 나가 ㄷ져야지.
엘리트주의를 생각하면
적절한 비교가 될 거임.
'선택된 소수'의 힘에 따라
사회를 견인한다는 믿음 말이지.
아니면 플라톤의 정치관인
민주주의에의 기피 발언이나,
철인 정치에의 숭상도
좋은 예시가 될 듯.
하지만 우리가 겪은
원신의 서사는 아무리 봐도
소수에 의한 통치나
지배구조 구축의 서사는
아닌 걸로 느껴지잖아?
그 이유가 바로 영지주의 교리를
비틀어서 채용했기 때문임.
그래서 포용과 감내가 티바트에서
각국 서사의 주된 결말이 된 것.
올드비 유저들은 느낀 적 있지?
호요버스가 이벤트에까지
[하늘]과 [땅]을 뒤집는 묘사를
꽤나 즐겨 쓰고 있다는 거?
즉, 영지주의가 비틀린 채 채택된 건
이원론적인 사고를 버리고,
포용적인 이항대립으로 나아가
'둘의 공존'을 묘사할 서사적 배경을
티바트에 마련하기 위함이었음.
근데 '어떻게 비틀렸는지'를 알려면
그 경과를 함께 알아야겠지?
마치 지식을 쌓고 [지혜]로 가는 길은
그 시작점이 반드시 [무지]인 것처럼?
오늘은 왜 하필 영지주의가 채택됐고
어떻게 시작됐는지 안 걸로 만족하자고.
다음에 보다 본격적인 얘기로 돌아오겠음.
혹시 내가 써놓은
다른 글들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이용하면 됨.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3474
요건 각종 유래, 모티브 관련 글,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7930
요건 이번 게시글 같은
각종 서사해설 글 모은 거임.
그런 의미에서 국붕이의 '티바트의 하늘은 가짜'란 대사가 참 의미가 컸는데 미호요 이 등신들이 그걸 극초반 이벤트에만 넣어놓고 수메르 마지막에야 다시 상기시켜줌ㅋㅋㅋㅋㅋㅋ
성리학 마냥 현실과는 제법 동떨어진 소리 같지만 가상의 설정 만들 때는 역시 철학이 좋아.
글 잘 읽고 잇어요
아 대충이해했어!(이해못함)
수메르학파 우수졸업자
모르겟고 붕어빵 웰케 맛나보이냐..
거의 도라에몽 앞주머니 수준.
글 잘 읽고 잇어요
고마워!!!
모르겟고 붕어빵 웰케 맛나보이냐..
그런 의미에서 국붕이의 '티바트의 하늘은 가짜'란 대사가 참 의미가 컸는데 미호요 이 등신들이 그걸 극초반 이벤트에만 넣어놓고 수메르 마지막에야 다시 상기시켜줌ㅋㅋㅋㅋㅋㅋ
그 부분은 용량적인 면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걸로....
사실 원신할때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생각나는데
그 말 다른 유저한테도 들었어. 이영도 작가 분이 '관념의 물화'를 굉장히 즐겨 쓰신다던데.
그치. 가장 관념의 물화가 덜한 데뷔작 드래곤라자도.. 나는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드래곤라자"가 좀 극단적으로 보면 "소통"의 물화라고 할 수도 있다고 보거든.
개꿀잼
아 대충이해했어!(이해못함)
수메르학파 우수졸업자
성리학 마냥 현실과는 제법 동떨어진 소리 같지만 가상의 설정 만들 때는 역시 철학이 좋아.
거의 도라에몽 앞주머니 수준.
신의 눈도 없는데 사안쓰는 우인단을 쉬쉬케밥으로 만든 제트,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층암거연의 지도를 완성한 지경! 그들을 찬양하라!
재밌어
세피로트의 나무가 하늘에 뿌리를 두고, 땅으로 자라던가? 그것도 하늘과 땅을 뒤집는 거라 볼 수 있으려나?
세피로트에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게 번개의 길 신이 세상(인간)을 만드는 이치고, 반대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뱀의 길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 티바트에 이를 적용하면 신들이 인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하늘의 이치(천리)고, 우인단이 신의 힘을 노리는 걸 뱀의 길로 해석할 수도 있나? 혹은 세피로트의 나무의 대칭인 클리포트의 나무일지도?
원신에서 뱀은 일단 칠흑이나 심연의 상징으로 못박힌 것 같음. 카발라 나무는 원신 아니더라도 워낙 호요버스 겜에서 중요한 소재라, 뭐라고 단정을 못하겠고. 그걸 써먹었다면 티바트 하나보다는 훨씬 고차원에 써먹었을 것 같기도 함.
미안한데 뭣 좀 읽으려다 자꾸 크기 큰 짤이 나와서 설명 하나도 이해가 안 들어옵니다...
미아내.. 길쭉한 짤은 좀 잘라서 수정했음.
썸넬
붕어빵 맛있다는 말을 힘들게 한다
아니다, 붕어를 넣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붕어빵에 붕어 대신 팥소만 넣은 것은 야채만 빼고 먹는 편식쟁이들의 가련한 도피 행각과 다를 바 없다.
모루겠고 난 크림으로 넣어줘
흐어어 너무재밌서!!!
에바 빠돌이들 답다
앜ㅋㅋㅋ 에바도 기독교랑 영지주의 빼다 박았다지? 카발라 나무도 나오던데?
좋은 해석글 잘 읽었어! 근데 설산 벽화의 6신 + 1스파이는 재해석이 나온지 몇년 됐더라. 여섯과 하나가 아니라, 알고싶다면 (하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 천사들은 신자를 도울것이다. 정도로. 다들 인동나무때문에 천리한테 못 맞은게 아니냐고 추측중인 상황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