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트레센에 입사한 날도 가을, 쓸데없이 하늘 높고 맑은 날이었지. 내 선배 중 한분이 이런 말을 해주시더라고.
"담당과 관계에서 중요한게 뭔지 아냐? 거리감이야. 거리감 조절에 실패한 놈들 말로는 어떤 식으로든 끔찍할 수도 있지..."
몸서리치며 이런 조언을 해주던 선배는 어떻게 됐냐고? 몇년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나네. 그래, 또 빌어먹게 하늘이 맑고 높은 날이었지. 슈퍼카, 괴물이라 불리던 유행에 한 20년은 뒤쳐진듯한 담당이 자신의 스포츠카에 태우더라고. 기절시킨채로 말야. 그리고 결혼 은퇴하셨지.
그 이후, 틈틈히 여러 무술을 익히고 운동도 했거든. 최대한 저항이라도 해야되지 않겠어? 어떻게 된 트레이너인데. 그리고, 지금 나는 내 담당과 대치 중이다. 이놈의 끝내주게 빌어쳐먹을 가을...
잔업까지 하고 퇴근하는데 저기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더라고. 외박계까지 써서. 그리고 가을을 다른 말로 뭐라 하는지 아냐고 하더군. 천고마비라 하니 틀렸데. 전신마비의 계절이라면서 날 기절시켜 끌고 가려하는데...하, 빌어먹을. 가을이 참 끝내주게 싫은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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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남자의 담당은 대치중이었다. 남자의 담당은 승부복을 입고 평소처럼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잡기 쉽고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먹이를 탐욕스럽게 보는 사냥꾼의 눈이었다.
"후후. 트레이너씨. 갑니다?"
그리고 이내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 2세, 불퇴전의 우마무스메로 불리는 그녀, 그라스 원더답게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렇게 교란 시키다가 일격에 기절시킬 요량인듯 했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남자는 중얼거리며 눈을 감기 시작했다. 저 움직임에 시력에만 의존하면 100% 끌려간다. 시력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거리감과 위치를 파악해야한다.
"어머? 포기하신건가요?"
남자는 담당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체 청각과 촉각 등, 눈을 감은채 다른 감각에 집중하였다.
'이제 앞으로 열걸음...분명 곧 튀어올거다. 뒤에서 오는가, 앞에서 돌진할거냐, 아니면 좌우에서 덮칠거냐.'
"이제 끝낼 시간 이랍니다?"
그라스가 도약한다! 트레이너의 7시 방향에서! 그 손날은 무자비하게 트레이너의 정수리를 노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 무자비한 당수에 트레이너가 맞고 기절한채 끌려가는 것만 남은 상황이었다.
"으응?"
그라스는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트레이너는 눈을 감은채 포기한 것 처럼 보였는데, 눈앞에 기절한 트레이너가 있어야 하는데, 그녀의 손날이 허공을 가른 것이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트레이너는 너무나도 쉽게 피한 것이었다! 보통의 히토미미라면 이미 맞고 기절했어야 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라스, 거 장난이 좀 지나친거 아니니?"
눈앞의 상황을 순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그라스 원더가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트레이너를 보았다. 차분하고 침착한 트레이너의 표정과 대비되게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경악이 담겨있었다.
"...트레이너씨, 사람 맞으신가요...?"
"아, 그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지. 그리고 장난 그렇게 심하게 치면 큰일날 수 있다고?"
"하...하하...아하하하하!"
그라스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눈앞의 예비신랑이자 사냥감으로만 보였던 히토미미가 괴물 2세, 불퇴전의 무사로 불리는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여유까지 부리다니!
허나, 그 광소에 담긴 것은 분노나 황당함이 아니었다. 눈앞에 자신의 호적수가 될만한 존재를 만난 만족감! 자신의 낭군이 될 자(?)가 저렇게 강하기까지 한 자인 것에 대한 기쁨! 그라스는 그러한 감정, 그리고 자신의 실력과 힘을 제한없이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해방감을 담아 웃고있었다!
얼마나 웃었을까. 그라스 원더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나기나타가 나와 그라스의 손에 잡혔다. 그러한 그라스의 표정은 아까 처럼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나, 그 눈은 더이상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의 눈이 아니었다. 그 눈은 평생의 호적수를 만나 전의와 흥분으로 빛나는 무인의 눈이었다!
"트레이너씨...보통은 트레이너씨 같은 존재를 평범한 인간이라 하지 않아요. 괴물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죠."
트레이너는 당근됐다는 표정을 지은채 자신의 담당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 상태의 그라스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부딫혀올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 트레이너씨. 갑니다!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거에요!"
이내, 그라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와 위력은 아까와는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하, 제기랄.'
트레이너는 지금 당장의 물리적인 거리감 파악에는 성공했다. 허나, 그녀와의 심리적 거리감 조절에는 보기좋게 실패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허나, 너무 늦게 깨닫는걸 이제와서 후회하면 뭐하리. 지금 당장 나기나타에 쳐맞게 생겼는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끌어올리고 집중한다.
'끝내주는 가을이구먼...그리고 난 이제부터 싫어하리. 이 망할 놈의 가을을 말이야.'
그거 잘 보고 피하면 쉬움(못피함)
??? : 누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만만하게 굴더니 그대로 축 늘어진채 끌려가더라. 포켓 T에게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