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귀찮게 굴면 파직
왕의 곁에는 당연히 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가 있는데 이 내시가 왕의 건강이 걱정되어 잔소리를 좀 심하게 했는데 이 성격 더러운 왕이 분노하여 내시는 파직당하였다.
2.왕을 쳐다보면 파직
사관은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조회 등의 공식석상에서 왕의 발언에 당연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사관이 왕에게 너무 집중해 버린 일이 있었고 이에 분노한 성격 더러운 왕은 사관을 파직하였다.
3.이 새끼들 건방져
한번은 성격 더러운 임금님이 조회에 나가서 말많은 대간의 간언을 참고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대간이 말이 많았는지 왕이 관직을 갈아버렸고 옆에 있던 승지가 놀라서 명을 거두어주십사 청하자 왕명에 태클을 걸었다며 승지를 파직했고 그 옆에 있던 부제학이 놀라서 명을 거두어달라 청하자 임금님께선 임금은 불만이 있어도 입처닫고 지내야 하냐며 부제학도 파직하였다.
4. 걸음걸이가 느리면 파직
사관은 국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사관이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굼뜬 일이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임금님은 사관을 파직하였다.
이 성격 더러운 임금님이 누군고 하니
조선 20대 국왕 경종
경종실록 3권, 경종 1년 3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1721년
임금이 특명(特命)하기를, "내관(內官) 송상욱(宋尙郁)이 나의 몸을 조절(操切)107) 하니, 버릇이 가증스럽다. 심상(尋常)하게 처치할 수 없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라."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의논하여 아뢰니, 임금이 명하여 파직하여 방송(放送)하게 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송상욱을 또한 명하여 나문하였으나 끝에 가서는 무사하였고, 이제 또 벌(罰)이 파직에 그쳤다. 임금이 응중(凝重)108) ·간묵(簡默)109) 하고 근시(近侍)를 대우함이 매우 엄격하니, 궁위(宮闈)가 숙연(肅然)하였으나, 위노(威怒)가 간혹 중도(中道)을 잃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경종실록 9권, 경종 2년 8월 13일 병인 1번째기사 1722년
사관(史官) 송인명(宋寅明)은 어전(御前)의 지근(至近)한 자리에서 자주 앙시(仰視)하여 지극히 무엄(無嚴)하니, 먼저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창황(蒼黃)하게 총총걸음으로 나갔으나, 임금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으므로, 최석항(崔錫恒)이 잠시 물러가 기다렸다가, 낮수라[晝水剌]를 올린 뒤에 다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여러 신하들을 지휘하여 물러갔는데, 날이 이미 미시(未時)가 되었다.
경종실록 9권, 경종 2년 9월 14일 1번째기사 1722년
임금이 곧 잠자코 있는데, 승지(承旨)가 발락(發落)을 청문(請聞)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는 너무 지리(支離)하다.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를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이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承旨) 이명언을 먼저 파직(罷職)하라."
하자, 이명언이 총총 걸음으로 물러 나갔다. 박필몽(朴弼夢)이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전에 없던 지나친 거동을 하십니까?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직분입니다. 어찌 지리(支離)하다 하여 견책하여 파직할 수 있겠습니까? 승선(承宣)의 신하가 군부(君父)의 과거(過擧)를 직접 보고서 감히 작환(繳還)하는 의리를 본받았는데, 더구나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환수(還收)하소서."
하자,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군부(君父)는 미안(未安)한 마음이 있더라도 함묵(含嘿)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가? (샹략)
임금이 이르기를,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을 우선 파직(罷職)하라." 하니, 박필몽이 총총 걸음으로 물러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事體)가 무엄(無嚴)하다."하였다.
경종실록 11권, 경종 3년 1월 3일 계미 1번째기사 1723년
임금이 또 사관(史官) 신치운(申致雲)의 걸음걸이가 느려서 자못 거만스런 모습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파직(罷職)을 명하였다가 다시 잡아다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진유가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가 공사를 품달하여 재가한 뒤 옥당관(玉堂官) 이세덕(李世德)이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이세덕이 검박함을 숭상하고 용도를 절약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행하는 도리를 갖추어 아뢰고, 이진유도 계속 진달한 바가 있었다.
임금이 지난날 빈청(賓廳)을 인견(引見)했을 때 옥당에서 입시하지 않았다며 엄교(嚴敎)를 내려 이세덕을 잡아다 추문(推問)하라고 하니, 이진유가 말하기를, "지난날 빈청을 인견하신 것은 곧 청대(請對)005) 였고, 일차(日次)006) 가 아니었습니다. 청대는 삼사(三司)가 입시하는 규정이 없는데, 이 때문에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실로 과중(過重)합니다. 청컨대 그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임금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또 걸음걸이가 느리다며 옥당관 이현장(李顯章)을 추고(推考)하라고 하교하였다.
여담으로 내시인 송상욱을 제외하고 사소한 일로 파직 된 윤성시 이명언 박필몽 신치운 송인명등은 노론이 아니라 전부 소론계 인물임
박필몽은 나중에 이인좌의 난에 동참하고 신치운은 그 유명한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다고 말한 그 인물 임
즉 경종이 노론계 인물들을 숙청하려고 사소한 일 가지고 꼬투리 잡은 게 아니라 경종 본인의 성격이 까탈 스러웠던 게 맞음
숙종 성격 생각하면 아들 둘의 성격이 유전 잘됐네
유게가 유향소가 됐어
짧고 굵게 갔구만 히스테리 같은건가
숙종 성격 생각하면 아들 둘의 성격이 유전 잘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