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소개하는 설은
일본 언어학계를 중심으로 나오는 상당히 골때릴 수 있는 주장인데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상당히 좋은 발상일 것 같아서 소개하는 설이야
완벽하게 옳은 주장도 아니고 민속학이나 역사학에서는 정설이 아니라고 보지만
어디까지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보는 게 좋음
백제사가 한일 공동의 고대사라는 건 꽤 더 메이저한 주장이고 근거도 많은데
그쪽은 뭐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백제사 인용 찾아보면 나오는 거기도 하고.
고대 신라와 왜는 서로 관계가 깊었다고 보는 가설임.
라기보다 대놓고 쓰여있는데 일본 학계 거두들이 의식적으로
"이 텍스트는 누군가 잘못 쓴 거다" 해서 00년대 와서야 좀 제대로 연구되는 분야임.
1. 석탈해는 왜인(야마토인)이다?
석탈해 관련 가야/신라 기록을 모으면 이렇게 돼.
여기서 주목해야할 건 "다파나국"의 왕자라는 점이야.
현대 한국인은 이 내용을 보면
왜국 동북쪽 1000리를 보고
캄차카 반도를 이야기하는건가? 생각하게 될 거야.
근데 당시 왜국이라고 생각한 곳은 일본 열도 전체가 아니야.
애초에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게
왜=일본 전체
신라 고려 백제는 교과서에서 보여주는 4세기 정도의 강역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분인데
왜는 6세기까지만 해도 일본 관서 일부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삼국은 4세기에 와야 우리가 아는 정도의 거대국가가 됨.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왜의 위치는 여러 제설이 갈리지만
지금도 야마토 신앙의 주축인 이즈모거나
후쿠오카라는 설이 있어.
전자는 일본 내 기록들이 뒷받침하고
후자는 물질적 유물이 뒷받침하지.
동이전 왜조의 설명을 기반으로 하면
대마국(쓰시마)의 건너편에 있는 후쿠오카/이즈모 양쪽 모두 대응되는 걸 알 수 있어.
거리적으로는 후쿠오카가 가깝지만
해류 때문에 쓰시마에서 배를 띄우면 이즈모 앞바다에 닿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정설이 갈리니까 넘기면
이 후쿠오카, 이즈모 동쪽에 꽤 오래전부터 고고학적 자료가 존재하고
다파나국의 설명에 부합하는 유적이 있어.
후쿠오카로부터 해안가를 거쳐 500km 떨어진 효고시 안의 분지 지대
단바 시야.
다파나국과 발음적으로 유사성이 있는 경우지.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호공의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 혁거세조
혁거세왕 38년 2월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왕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이 기사를 보면 호공은 왜인 출신이란 걸 알 수 있어.
그리고 아래 기사에서 호공이 하는 말로 보아, 신라로 간 호공은 자신을 "왜인"이 아니라 신라인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즉 다파나국 = 단바 가설을 채용하면
석탈해는 일본쪽에서 넘어온 집단으로,
가야를 들렀다가 문전박대당하고
신라에 들러 호공의 직위를 찬탈하고 왕위에까지 올랐다
는 결론이 돼
그런데 왜 가야-신라 순으로 움직였을까?
반도 일본어 가설은 알렉산더 보빈이 여러 번 주장했다 철회한 가설인데
(신라어가 고대 일본어라는 가설, 백제어가 고대 일본어라는 가설 등 여러 번 제시함.)
해당 주장이 어디까지 옳은지를 빼고
이 "왜인 집단"이라는 게 삼국시대 중기 이후의 왜, 일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특정한 민족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고, 이 왜인 집단이 가야에도 있었다는 전제로 보면
석탈해의 이동루트가 이해하기 쉬워짐
삼국시대 초기의 언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말이 통하고
백제와 왜는 말이 통하나
고구려와 왜는 백제 사절이 필요하고
신라와 백제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등 일관성이 없긴 하거든.
여기서 일부 정보만 뺴서 보자.
석탈해는 왜와 언어가 통하는 다파나국에서 왔고,
왜와 언어가 통했으리라고 추측되는 가야 지역과 접촉했으나 왕권 혹은 직위를 얻지 못하고 충돌 후 쫓겨나
언어가 통하는 호공과 접촉을 했고
신라 왕실에서의 호공의 자리를 뺴앗아,
유리 이사금 때 왜와 우호를 맺고
이 우호와 권력을 바탕으로 신라 왕의 자리에 올라
이후 백제/마한/가야와 전쟁을 벌였음.
이 마한과의 전쟁은 말그대로 마한 전체와 전쟁을 벌였다기보다는
마한 소속의 어떤 나라랑 전쟁을 벌인 걸 확대해석했다고 보는 게 좋음
낙랑군 관련해서도 삼국사기/유사 초기엔 이런 기록들이 잦거든.
이 자료를 모아서 보면
석탈해는 일본 열도 쪽에서 넘어온 사람이고
자기 나라에서 권력을 뺏겨 반도까지 망명해와 거기서 성공한 사람이 됨.
2. 일본 신화 짚어보기
이제 반대로 일본 설화를 짚어볼 거야.
먼저 스사노오를 볼까
가장 일본 측에 가까운 자료를 보자.
스사노오는 타카마가하라에서 이자나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바다를 다스리라는 명을 거부했다가 추방되어 신라 의 소시모리로 쫓겨남.
신라요?
이거 일본 왕실이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신화에서
자신들의 삼신 중 하나이자, 왕권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야마타노오로치 설화의 시작인 스사노오를
"신라"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음.
이 비밀을 풀 만한 다른 신화를 건드려 보자.
阿加流比売神(아카루히메노카미)
신라의 아그누마의 늪에서 여자가 햇빛을 무지개처럼 받으니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거 주몽 탄생 설화랑 시작부터 동일한 게 보이지?
아카루히메란 이름도 재밌는데
이걸 일본어적으로 밝은 아가씨 혹은 공주로 해석한다면
똑같이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어원(밝은해, 붉은해)와도 일치하는 걸 확인할 수 있어.
이제 일본 신화의 중심인 니니기의 천손강림을 보자.
구지후루타케에 내려와
한국을 향하고 아침해도 석양도 잘 비치는 좋은 나라다.
구지후루타케?
하늘에서 신이 내려온다?
문종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주지사(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하였다.
얼마 뒤에 그 알을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 후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었다.
여섯 알은 모두 여섯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절하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였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
구지라는 땅에 내려옴
이거 완전히 가야 수로왕 신화와 일치하지?
그래. 일본 각지에 남은, 일본서기에 수록된 신화 상당수는 고대 한반도에 있던 신화의 조립의 결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일본의 주요 신화(기기신화)의 경우
적어도 야마토 신화, 이즈모 신화를 비롯한 여러 개의 신화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인위신화라는 설이 있는데
그 중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즈모 신화에서 신라가 몇번이고 언급되는 점
스사노오의 신화해석의 문제 : 한반도와의 연계를 중심으로, 박규태, 한양대학교
그리고 기기신화의 3신기가 제례/전쟁/산업에 연관되어있다는 점 등으로
인공신화 혹은 그에 준하는 신화인 게 정설이야.
극단적인 일본/한국 학자들은 아예 일본 신화의 네노쿠니를 한반도로 비정할 정도고
한반도에서 넘어온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던 조상남신이 "스사노오"의 형태로 야마토인에게 받아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일본=왜가 한 나라였다는 생각을 버리고 보면
이 신화의 이상함을 이해하기 쉬워.
일본 지명에서 신라/고려/한 관련 지명이 확인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에 대한 픽업 이미지
(영상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EwLrtntJfCc)
(이 유튜버의 주장은 재밌지만 정설도 주류가설도 아니니 걸러서 들으세요)
신화가 정립되던 1-3세기는 일본은 명백하게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고 보면 됨.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언제부터 신라와 왜가 분리되었는가?를 동의하는 부분은
3세기 중반의 신라의 귀족 장군 석우로가
왜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모욕했다가 왜에게 살해당한 때부터.
첨해왕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피난해 있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삼국사기>
신라 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뼈를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죽은 왕의 처는 신라인과 공모하여 일본 대사에게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속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자 곧바로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대사의 시신을 왕의 시신 밑에 묻고 "존비(尊卑)의 순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군대를 보내자 신라인들이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여 일본군은 철수했다.
<일본서기>
양쪽 표현이 다르지만 우류조부리지간은 우류(우로) 조부리지간(서불한)으로 해석되고
일본서기 및 남아있는 백제본기 인용서 등에서는 왕족도 왕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음.
(8세기 일본의 자국 찬양 윤색의 결과로 보이기도 함)
특히
4세기 말 신라와 왜의 완전한 외교적 결렬이 이루어지면서
왜가 신라를 침공하고 약탈한 신라-왜 전쟁부터는
신라와 왜의 관게는 공식적으로 끊어진 것으로 보고 있어.
3세기-4세기를 지나면 신라,고구려는 자신들의 민족성을 어느 정도 정의한 중앙집중형 국가로 변하게 되는데
백제/가야는 이 시점까지도 단일 국가의 정체성보다는 연합국의 형태를 강하게 띄는지라
백제-왜 관계는 백제 멸망까지도 강한 동맹국이거나
아니면 백제 자체가 일본의 소국들 +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들의 연합체제인 채로 쭉 이어져온 거라는 주장도 있지.
일본이 완전히 백제 아래에서 벗어나는 건 백제 멸망 후 10년이 지난 670년,
자신들을 "일본"이라고 정하고 각국에 사절을 보낼 떄야.
일본서기도 이 시점에 만들어졌고
이즈모풍토기 등에서 확인되듯이 기기신화도 이 시절에 각지의 신화를 짜집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양국 국민감정에 핵폭탄을 터뜨릴 가설이로구만 ㅋㅋㅋ
우리가 아는 제대로 된 국가가 되기 전의 고대사 이야기니까ㅋㅋㅋ 근데 대놓고 교과서에 왜인/신라에서 왔다가 적혀있는데 고개 돌리는 게 기묘하긴 함
나도 뭐 관련업계 전공자 이런건 전혀아니지만 이거 관련해서 흥미로워서 자주 찾아보긴 하는데(알렉산더 보빈이라던지 일본창세신화 한반도라던지) 확실히 물증이 그냥 어렴풋도 아니고 명백한데도 양국은 흐린눈하고 타국은 관심없어서 그냥저냥 묻히는게 뭔가 많이 기묘함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학술단위에서 대중대상으로 정보 가공하려면 뭔가 키워드가 필요한데 가능한게 전부 핵폭탄이라 그런듯ㅋㅋㅋ
일본왕실 : 우리 신화는 신라에서 왔고 우리 혈통엔 백제 출신이 있다고요 일본 신토 대표 신사 신주 : 이거맞다 참고로 우리는 아직도 고대 신라어로 쓰인 경 읊고 있다 일본 언어학자 : 이거 아이누어랑 하야토어랑 도래어 분리하고 남은 야마토어는 우리 어차피 못알아들어요 일본 문학자 : 와카집에 이두/향결로 읽어야만 해석되는 구문이 있는데? 일본 우익 : 아 몰라 우리 조상이 무조건 최고라능
우리나라도 뭐.... 기껏해야 예맥이나 여진정도 빼면 수천년간 이어진 한민족의 혈통 순수성 엄청 자부심 가지는데 알고보니 야마토또한 반도의 일원이었고 우리가 쫓아낸거라는 그 뭔가 제노사이드비슷한거를 병적으로 경계하는거같음ㅋㅋ
석탈해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함. 왜국에서 동북쪽 1000리에 있는 용성국 또는 다파나국이라고 하는데 왜국의 위치 자체도 설이 갈리고 애초에 가야나 신라로 갔다고 해서 무조건 그 당시에 말이 통했다고 전제를 깔기도 애매하고, 말이 통했다고 왜에서 왔다고 하기는 확실하지 않은 점이 있음. 뭣보다 일제시대 석탈해가 일본 쪽에서 왔답시고 내선일체설의 근거로 쓰인 적도 있어서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 내 생각엔 좀 확대해석한 측면이 없지않아 있는 거 같아
근데 어느 쪽으로 봐도 석탈해는 여러 문헌에서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 온 게 거의 확실하고 저 단바 가설보다 동북쪽이면 석탈해는 아이누어군에 속하거나 고대 시베리아어군에 속해야 함 근데 석탈해와 그 일족의 명명규칙은 야마토어에 가까움.
이게 아이누어와 고대 시베리아어,그리고 고대 드라바다어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니까 허황후 전설은 어느정도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석탈해가 인도 출신이라는 1950년대 주장은 완전히 언어적 근거가 없는데?가 너무 컸다고 생각함. 그럼 어디서 왔는데? 왜 굳이 왜인이라는 호공의 지위를 뺴았는데, 이 과정에서 호공이 어떻게 쫓겨났는지에 대한 기술이 사기/유사 혹은 유사 기록무에 하나도 없음. 어느 시점에 사라지거든. 고대언어학의 발전이 역사학에서 낸 무리수를 위한 받침대를 하나씩 뺴고 나니까 "그냥 원문이 옳은 거 아닌가"가 되는 거지
일단 학계에서는 한반도 내에서 발생한 집단의 우두머리일 가능성도 높게 치고 있음. 영남 동해안이나 한반도 중북부 쪽도 넣고 있는 모양임. 애초에 고대 일본어 자체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으니 명명규칙이 같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아니거니와.
"그 당시에 말이 통했다는 전제를 하는게 애매하다. 문자로써 한자가 공용어였다"는 게 80년대까지 주로 반박되던 내용이었는데 최근의 고대 언어학에서 이 시기에 한문은 "문자"가 아니라 "중국어와 그 문자 체계"로써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 그러니까 한문으로 적는다는 우리 문장을 "한문의 형식을 빌려 적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한문으로 적는 거임. 번역해서. 그리고 일본에서 한자의 흔적이 발견되는 건 빨라도 2세기임. 그것도 언어와 기록 형태가 아니라 문양 혹은 장식품으로 취급된 것으로 추정됨. 그 이전에 온 호공과 석탈해가 한문을 통해 소통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해. 그럼 "언어가 통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움. 애초에 이 시기에 문자를 썼다면 일개 호족이 타국 왕을 호통친다고 왕 면전까지 가는 4세기까지의 묘사가 부자연스러움. 심지어 내가 본문에서 인용한 3세기 중반의 석우로와 갈나고의 대화부터가, 둘이 한자를 썼다면 "이름을 양쪽이 완전 다른 형식으로 적는 일"은 잃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봄. 신라어식 표현의 한문이 확인되는 거도 4세기 이후부터고, 일본에서 일본식 한자표현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자료도 5세기 이전을 가질 않으니.... 한반도 중북부에서 석탈해가 왔다는 건 그냥 지형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애초에 한반도 안에서 석탈해/호공 같은 집단이 자동발현했을 가능성을 치면, 어디가 "근거지였냐"가 되지. 신라는 진한을 왜인이라 부른 기록이 없고, 다른 쪽도 마찬가지니,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변한/마한인데, 그럼 가야가 신라보다 더 먼저 왕국으로써 형태를 취했다는 전제를 넣지 않으면 왜 얘네가 가야를 통해 신라까지 왔냐?를 설명하지 못함. 가야에 정착을 실패해서 온 거가 명확한데.(수로왕과 석탈해의 변신술 대결 관련 유사 기록) 중북부를 타겟으로 하면 더 이상성이 명확한데, 오대산에서 소백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이 산맥은 조령을 넘어서 오간 기록이 2세기 와서야 열린단 말이야.. 그리고 왜-신라 간의 연관은 내가 석탈해, 스사노오, 아카류히메만 들었지만 유명한 연오랑 세오녀나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오오쿠니누시와 토끼 같은 데서도 꽤 있지. 특히 일본 쪽의 역사초기기록에 많다 못해 넘쳐흘를 정도임.
한반도 중북부가 아니라 북동부 쪽이라는 걸 잘못 말했네... 어쨌든 만약 무조건 말이 통했다고 가정하기도 애매한 게 위에서 본 인도에서 왔다는 허황옥도 요새는 정설로 여겨지는데 그럼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했을 때 말이 통했으니 당시에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말이 통했다고 전제를 자연스레 깔 수 있나? 를 생각하면 아니라고 보거든
아 신라와 왜 간에 연관이 없다고 보는 건 아님 위에서 석탈해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상당부분 신빙성이 있다고는 보는데 석탈해가 워낙 설이 분분하기도 하니.
그 한반도 북동부 가설이 이전에 반박된 석탈해 스키타이 설의 부활이라고 생각함 난 일단 호공과 탈해이사금의 과거에 관해서 삼국사기에 적힌 기록은 신뢰해야 한다고 난 생각하고 있거든. 왜냐면, 석씨는 관력싸움에서 진 게 아니라 김씨에 자연적으로 흡수되며 사라진 호족이란 말임. 오히려 불교적 윤색이 이뤄진 삼국유사 쪽이 어색하고. 특히 애초에 알지를 발탁하고 계림으로 국명을 바꾼 것도 탈해이사금이니까. 이 전제 하에서, 석탈해와 호공의 "왜에서 왔다"를 곧이곧대로 믿어도 발생하는 모순은 없다고 봐. 오히려, 성씨가 "금"인 김알지와 그 일족을 북쪽에서 내려온 일족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생각해. 그냥 저 "왜에서 왔다"를 부정하기 위해서 너무 과하게 뭔가를 하고 있단 말이지....
사실 이쪽에서 진짜 가관 오브 가관인 게 일본쪽인데, 그쪽은 좀만 더 찾아봐도 아주 자기모순에 비틀려서 이상한 소리 하고 있긴 함 일본서기 저자가 신라인이라 그렇게 되었다! 같은 소리까지 "학계 원로의 정설"소리를 듣는 곳이니까 (이주갑인상 등의 이슈로 일본서기는 자국 푸쉬가 백제서기 인용 안 하면 좀 이게 뭐지 싶을 정도인데 저 소시모리 하나 치우곘다고....)
근데 호공은 왜인이라고 확실히 쓰여있으니 알겠는데 석탈해가 왜인이라고 쓰여있는 건 아니지 않나? 용성국 혹은 다파나국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그게 열도 내에 있는 한 국가였다는 설이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석탈해가 호공과 같은 집단이라고 전제를 까는 거임? 아니면 석탈해가 "현재 일본열도에 있었던 한 국가 출신이다"를 왜에서 왔다고 뭉뚱그려서 호공과 같이 말한 것임?
현재 일본의 뿌리가 야마토다 보니 그런가...
석탈해와 호공의 집단이 하나로 빠르게 뭉치는 게 특이할정도니까 그렇지. 출신이 어딘지도 모른다고 사서에 적은 호공과, 그 호공의 집에 들어가고, 이후 이사금이 되고 호공을 기용한 석탈해를 보면 둘이 완전한 이민족 집단이라기는 이렇게까지 융합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함. 특히 언어가 다른 집단이라면, 기존 집단의 장이 타인에게 대체당할 때 숙청이 반드시 일어남. 중세 사회에 접어들기 전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 이쪽임. 보통 그 2세나 3세가 일부 권력을 얻지 호공이 이대로 다시 재상으로 등장하는 건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 그래. 저 시대를 고대 부족사회로 보느냐, 초기 국가사회로 보느냐의 차인데, 나는 전자라고 생각하거든.
그럼 석탈해는 다파나국에서 왔는데 사실 다파나국이 아니라 왜에서 왔다는 것임? 근데 이렇게 치면 다파나국과 왜인을 확실히 구분해둔 게 의미가 없는 것 아님? 즉 님은 석탈해는 사실 다파나국 혹은 용성국에서 온 게 아니라 호공과 같은 모집단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인? ㅇㅇ?
질문투라 좀 싹바가지 없어 보일 수 있는데 양해좀;
사실 이 둘은 진짜 이상한 점이 너무 많음 탈해의 성은 석씨(昔氏)로,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 다파나국을 굳이 왜를 통해 설명함. 타 지역은 왜가 아니라 어디 사람으로 지금의 ㅇㅇㅇ를 말한다로 적는 삼국사기에서 왜국 기준 상대좌표를 말함.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B.C. 19)의 일이었다. 이거도 이상한 부분임. 혁거세 재위 39년에 석탈해가 신라에 도달한 건 확실함. 위에서 나왔듯, 호공은 혁거세 재위 38년에 사신임. 호공은 그러면 bc 30년대 생 태생이겠지. 이 떄 태어났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기원후 10년부터 57년까지 대보를 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음. 29세부터 76세까지 재상을 하고 이후에 왕이 되었단 소린데, 그럼 이 탈해가 들인 호공이라는 대보는, 대보가 되었을 떄 90살이 가까워야 하는데 삼국사기는 이 호공과 이전의 호공을 동일인물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음.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전 호공이 탈해에게 자리를 뺴앗기고 그 아들이 했는데, 이걸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시되었다의 가능성도 있긴 한데... 난 이 집단교체를 같은 뿌리를 가진 집단의 재결합 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생각함. 그러니까 1. 다파나국-왜국은 같은 언어, 그리고 문화를 보유한 집단일 것이다(용성국은 완전히 불교식으로 용어를 갈아치운 이후라서 배제) 2. 호공은 왜인이고, 석탈해의 집단은 왜인과 거의 유사한 집단이라 두 집단이 결합함 3. 그 집합 결합의 결과가 호공 - 탈해 - 탈해(왕)+호공의 권력구조가 아닌가?라는 것 사실 석탈해가 모든 집단을 끌어당기는 진짜 궁극의 슈퍼 카리스마남이라 다 무시하고 다 내 아래에 집결! 했을 가능성도 있고 김알지 보면 이걸 무시 못 하는데 그러면 왜 가야에선 쫓겨냤냐 싶기도 함..... 일단 1의 추가증거로는, 이즈모부터 단바까지 이어지는 일본 열도의 북안은 문화가 같았음 여기서 산맥을 넘어 오사카 쪽, 그러니까 남안과 문화가 달랐고 이 둘이 전쟁을 일으킨 게 신화로 남은 게 천진신-국진신 대립이거든. 단바가 다파나국 현재 위치라는 건 아니지만 단바가 단바가 되게 만든 현지인 집단들이 원래 다파나국 사람들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주장임. 단바 시는 약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설명에 가까움(나는 좀 더 북쪽 해안가라고 생각함). 실제로 코마, 신라, 쿠다라라는 단어가 있는 지역은 전부 도래인 흔적이거든... 하야토란 지명도 하야토어족 사람들의 흔적이고.
ㄱㅊㄱㅊ 뭐 결국 4세기초의 330년 내물마립간 이전의 신라를 왕국으로 보는 게 역사학쪽이고 그냥 부족집단으로 보는 게 민속학(국제파) + 언어학이라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같기도 함. 부족집단 간의 일반적인 접촉과 충돌에서 보이는 현상으로 고대사는 설명 가능하다!는게 저 쪽 이론이기도 하고 삼국지로 보통 알려진 위촉오도 이 개념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 않냐?로 보기도 함(난 오나라 뺴면 좀 과장이라고 생각함) 근데 뭐 "일반적이지 않다"를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가 "둘이 비슷한 출신/문화를 공유하여 집단이 합쳐졌다"인 거고 난 정말 개인적으로는 석탈해 슈퍼인싸설(...)이 더 재밌다고 생각함. 이후 김알지 데려오고 국명도 바꾸는 거 보면 보통 인싸가 아님. 그리고, 난 이 삼국사기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보는 게, 일성 이사금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의 출신 및 집안 관련 기록은 (년도를 내다버리면) 거의 정확하다는 게 정설이기도 하잖음. 오히려 벌휴이사금부터 쭉 이어지는 석씨 왕조를 생각하면 석탈해의 탄생설화와 출신은 왜곡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흐음.... 이해는 가긴 했음 ㅇㅇ 근데 또 당시에 동쪽에서 그나마 알기쉬운 세력이 왜국이니까 왜국을 기점으로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뭣보다 자기는 왜국이 아니라 다파나국이라고 말하고 그 부분을 강조한 게 살짝 풀리지 않긴 하네. 호공이라는 인물도 기록 자체가 애매하니 어느 부분을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을 치워야하는지 까다롭고. 집단의 융화도 그렇고... 결론적으로 석탈해를 왜국의 집단과 같은 집단으로 보는 건 상상력을 좀 덧붙여야 하는 부분인 듯. 사실 설화라는 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애매한 부분이 워낙 많기도 하니 뭐... 아무튼 글 재밌게 잘 봤음.
뭐 나는 사학도 배신자지만(전과) 원래도 양반사가 메인이라 이쪽은 어디까지나 재미로 파는 정도임. 언어학도 좀 갉아먹긴 했고 왜 양반사가 메인이냐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동몽선습이랑 명심보감을 외고 들어갔거든요.....
특히 기록으로 애매한 게 뭐냐면 저 기록을 믿잖아? 삼국사기의? 그러면 애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흘러보냈는데 가야에서 그걸 거부하고 신라로 갔다는데 1. 가야에서 거부한 건 어떻게 알았대 2. 아니 애초에 다파나국 출신인건 어찌 알았대 3. 애가 어떻게 그러고 살아있냐 그래서 어느 정도는 거르긴 해야함.(저게 못 걸러지고 들어간 건 신성성이 있는 내용이라 그대로 들어간 거 같긴 함) 그래서 나는 왜인과 유사한 다파나국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왕자 집단이 금관가야- 신라 순으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태어난 혹은 그 전에 태어난 왕자가 석탈해라고 어느 정도 다운사이징하고 논리를 전개한거긴 해. 이 다운사이징 과정에서 다른 한국 내 지역이다 혹은 인도 출신이다 같은 걸 배제한 건 위에서 설명했으니 생략
나도 역사에 관심은 있는데 석탈해 관련해서는 신박한 썰을 들어서 재밌었네 기억에 남을듯 ㅋㅋ
사실 좀 더 극단적으로 보면 호공이 "다파나국의 왕자 집단"에서 보낸, 집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를 찾아파견된 인물이라는 가정도 가능해 보이거든. 맹상군과 풍환의 교토삼굴이 기원전 250년대 이야기란 말이지. 풍환이 진과 제에 찾아가 맹상군을 기용하라고 했던 일화와 비슷하게 보내진 게 호공이고, 호공이 사자로 간 지 1년 뒤에 딱 석탈해가 도착한 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면? 사실 이쯤 되면 거의 대하소설급 상상력이라서....
ㄱㅅㄱㅅ 좋은하루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