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치욕 꼭 배상받겠다
13세 때 만주 일 병영 끌려가
위안소 생활 3개월만에 탈출
한일 정부 '과거망각'에 분통
국내 거주 첫 고발 김학순 할머니
"정신대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종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해방 46년만에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일제 강점 하에서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라는 치욕을 겪었던 증인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을 고발하겠다고 나선 김학순 할머니(67·서울 종로구 충신동)가 자신의 한 맺힌 삶을 공개했다.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요즘 서울 가리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걸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김할머니는 14일 오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찾아 기자회견을 갖고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김할머니가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만 16세 되던 1940년 봄.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혼해 13세 때 평양 어느 집 양녀로 들어간 김할머니는 평양 기생 권번을 마치던 해 그 집 또다른 양녀(당시 17세)와 함께 양아버지에 의해 중일전쟁이 한창 치열한 중국 중부지방으로 끌려갔다. 양녀들을 이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 했던 양아버지는 일본군에 총칼에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이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고, 김할머니 등은 부대 한 위안소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3백여 명의 수규모 부대 안 가건물에5개의 헝겊 칸막이를 설치해 만든 위안소에는 김할머니 등 2명 말고도 이미 3명의 한국 여자가 와 있었는데 그들 중 연장자인 '시즈에'(당시 21세)라는 여자가 이들을 감시하며 남자들을 안내했다.
김할머니는 3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일본군 휴가 때마다 하루 4~5명씩을 상대해 오던 중 그곳에 들른 한국 상인(당시 31세)을 따라 탈출에 성공, 3개월만에 도망쳐 나왔다.
김할머니는 그 후 그 상인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부부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듬해 귀국했으나 6·25전후 두 자녀와 남폄을 모두 잃었다. 그동안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오다가 현재 4백만 원 짜리 전세 단칸방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살고 있는 김할머니는 "정신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을 상대로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우리 정부가 하루 빨리 정신대 문제를 밝혀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영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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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이런 곳에서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생뚱맞겠지만, 제가 옛날신문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03은 천벌 받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