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투항하여 조선군으로 편입되고 이후 조선군민으로 편입된 항왜의 숫자는 1만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 항왜들은 조선의 정책에 따라 조선의 여인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대부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등으로 천애 고아가 된 조선인 소녀들이나 여인들이 그들의 짝이 되었다.
김충선등의 직급 높은 항왜들은 반가의 여인들과 결혼하기도 했다.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여식과 결혼하여 5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항왜들 중 일부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기껏 조선에 와서 얻은 처자식이, 자신이 등돌린 나라의 옛 동지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특히 정유재란의 여파로 이렇게 아내와 자식을 잃은 항왜들이 숫자가 많았다.
이름 있는 항왜, 여여문도 이 중 하나였는데 처자식을 일본군에 의해 잃은 그는 복수귀가 되어 최전선에서 척후임무를 수행하다가
그의 공적을 탐한 명군 장수 파새에 의해 아군살해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