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체첸전 당시 러시아군은 체첸군을 도적떼 정도로 얕잡아 보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됨
그렇지만 러시아군이 아무리 개판이 되었다 하더라도 러시아군은 러시아군
결국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함락시키고 체첸군을 몰아내게 됨
그로즈니가 함락되고 주요 거점들이 하나둘씩 러시아군의 손에 들어가자
체첸군은 자기들이 주둔한 마을 주민들에게도 당장 꺼지라며 외면을 받는 최악의 상황에 처함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카프카스 산악지대로 도망가는 것 뿐인데
아직 주민과 체첸군과의 지원체계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건 사실상 카프카스 산적떼가 되어 결국 몽땅 토벌되버리는 걸 기다릴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옐친은 캐나다의 G7 정상회담에 가고 체르노미딘 총리는 영국 국빈을 맞을 준비나 하는 등
이미 러시아 수뇌부는 전쟁은 다 끝났다고 판단했음
심지어 러시아 언론들조차 더 이상 체첸 사태에 대해 보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
이렇게 체첸군에게 멸망의 위기가 닥친 그때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 30세의 청년 지휘관이 나섬
샤밀 바사예프는 원래 모스크바 대학 법대를 지망했으나 떨어지고
이후 모스크바 대학 농대를 다니다가 낙제해서 정학을 당하고
그 후 모스크바의 사원 몇명뿐인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던 평범한 체첸인 청년이었음
그러나 소련 말기 민족주의와 이슬람교에 눈뜬 그는
소련 보수파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의 전차와 맞서기 위해 수류탄을 들고 시위대 선두에서 행진하던 과격주의자가 됨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초대 체첸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가 독립을 선언하자 옐친이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이에 맞서 바사예프는 러시아-터키행 비행기를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기도 함
1994년 1차 체첸전 발발 전까지 바사예프는 구소련 내에 여러 분쟁에 참전함
그는 군 경험은 소련군 소방병으로 복무했을 뿐이었지만
자신과 같은 체첸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조지아-압하지아 분쟁에 참전함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인 부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과 엄청난 전투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으로
조지아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체첸인 부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조지아군이 도망치는 지경에까지 이름
바사예프는 이 전쟁들을 거치며 압하지아 병단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사병을 가지는 군벌이 됨
이렇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뛰어난 군인이 된 이유는
GRU(러시아군 정보총국)가 바사예프 등을 훈련시켜
구 소련 국가들의 분쟁에서 친러시아측으로 싸우게 하며(바사예프는 조지아-압하지아 분쟁에서 압하지아 편으로 참전)
반러국가 조지아 등에 혼란을 조성하고
동시에 바사예프같은 체첸 과격파가 전장에서 소모되길 바래서라는 말이 있음
이 설이 진실이라면 GRU는 제 손으로 자기를 무는 호랑이새끼를 키운 셈이 됨
1995년 6월 14일 바사예프는 자기 부하 142명을 이끌고 러시아의 부됴놉스키라는 인구 6만의 소도시로 향함
대부분이 면도를 하고 러시아군으로 위장
전사한 러시아군의 시신을 옮긴다고 둘러대며
적절히 뇌물을 찔러넣어 주는 식으로 쉽게 부데놉스키에 도착
부됴놉스키 경찰들은 바사예프 부대를 수상히 여기고 경찰서로 가도록 했으나
체첸군은 도착하자마자 경찰들을 모두 죽이고 부됴놉스키 시청 등 관공서를 점령
이후 러시아군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주변의 주민들을 있는대로 끌고 부됴놉스키 병원으로 향함
주민들과 환자 의료진 등 1500여명을 인질로 잡고 진입 가능한 모든 통로를 지뢰와 폭발물로 막아버려
러시아군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도록 만들어버림
6월 15일 바사예프는 언론의 취재를 요구했으나
러시아 정부가 머뭇거리자
즉시 헬기 조종사 3명을 포함해 6명의 인질을 살해
결국 러시아측이 취재진의 진입을 허가
바사예프가 요구한 것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다 이겨가는 싸움을 죽 쒀서 개 주게 생긴 러시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요구였고
6월 17일 진압 작전을 시도
그러나 너무 인질들이 많아 첫 공격에서만 30여명이 죽었으며
두번째 공격까지 합쳐 100여명이 사망
또 체첸군은 인질들이 흰 천을 들고 창문으로 가게 함
당연히 인질들은 천을 휘두르며 쏘지 말라고 외쳤고
러시아군은 더 이상 진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됨
러시아 정부는 관련 체첸군에게 일절 책임을 묻지 않고 안전한 도피와 막대한 자금 지원까지 약속했으나
바사예프는 무시
수소문해서 체첸군 총참모장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명령장을 가진 형 쉬바니를 데려오기까지 했으나 역시 안통함
심지어 이슬람 신학자들까지 데려왔음에도 전혀 협상이 진전되지 않음
결국 6월 18일 러시아 정부는 바사예프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체첸 내의 군사작전은 잠시 중단되었으며
샤밀 바사예프의 부하들은 체첸으로 안전하게 돌아감
한 러시아의 주간지는 이 사건에 대해 모스크바가 샤밀 바사예프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평함
승기를 탄 러시아의 공세는 잠시 멈췄고
체첸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 반격의 기회를 가지게 됨
이후 체첸군은 1996년 8월 6일부터 시작된 지하드 작전으로
850명의 병력으로 그로즈니 시내의 2만명 이상의 러시아군&친러 체첸군을 포위 공격
주민들의 대규모 호응과 친러 체첸군의 전향으로
역으로 러시아군을 포위하는 모습을 이끌어내며
결국 1차 체첸전에서 승리하게 됨
하지만 2차 체첸전때는 러시아군은 더 잘 재정비되고 준비를 철저히 했으며
반대로 체첸군은 심각하게 분열되고 약화된 상태에서 싸우게 됨
무엇보다 2차 체첸전을 이끌게 된 사람은 새로 임명된 총리 푸틴이라는 사람이었음
검푸른사전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뒷세대인 우리가 보기엔 체첸이 타타르스탄 이상의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는 자치공화국으로 살면 평화롭지 않았을까 싶지만 러시아가 그런 자치권을 과연 언제까지나 보장해줄까가 의문이고 또 두다예프는 꽉 막힌 사람이라 그런 협상을 성사시킬 리도 없으니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 저승사자가 들어온 격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