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얼굴 모양 토기가 발견되어 최근 화제를 모았던
경상북도 경산시 소월리 유적.
하지만 저 토기보다 더 중요한 건
5~6세기 신라인들이 기록을 남긴
목간이 함께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풀발기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함.
저 당시의 기록 자체가 남은 게 별로 없다보니
돌이나 나무에 뭐라도 적혀 있으면
역사학이든 언어학이든 간에
연구거리가 되기 때문.
그리고 오늘,
발굴팀이 언론에 공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위 사진 속 목간은 길이 약 74cm로
약간 휘어진 나무를 6면으로 다듬어
글자를 빽빽하게 적었으며
1차 판독 결과 확인된 글자는 약 94자이고
그 내용은 6세기 신라의 토지 관련 문서로 추정된다고 밝힘.
목간에 적힌 내용의 대강을 요약하면,
작은 마을 단위인 '곡(谷)'에서
제방(堤)을 쌓아 만들어진 저수지를 통해
이익을 본 마을 주민들이
토지 단위인 '결(結)'과 '부(負)'에 따라
세금으로 나누어 부담했다는 것임.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논을 뜻하는 단어 '답(畓)'이 여기에서도 등장함.
답(畓)이라는 글자는 561년(진흥왕 22) 세워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처음 등장하며,
백제에서는 수전(水田)이라고 한 반면
신라에서는 이를 줄여서 답(畓)이라고 표기했는데
이 때문에 이 목간이 6세기 중후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두 번째는 토지 단위인 '결(結)'과 '부(負)'로,
신라의 토지 제도인 결부제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는 613년(진평왕 3) '밭 100결'이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663년(문무왕 3) '500결'이 나오며
2차 사료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와 달리
일본 정창원에 있는 1차 사료인 신라 민정문서에는
'102결 2부 4속, 4결, 94결 2부 4속, 19결 70부'가 나오는데,
민정문서의 작성 연대에 대해
695년(효소왕 4)설과 755년(경덕왕 14)설로 나뉘고
그 중에서 695년설이 유력한 상황에서
민정문서와 마찬가지인 1차 사료로써
6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간에도 결과 부가 나왔다는 것은
695년보다 최소한 100년 이상은 이른 시기에
신라의 중앙정부가 지방의 행정을 장악하고
결부제로 표현되는 수취 체계를 정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함.
*사학과, 공시생 힘내라.
기사 링크는 아래.
사학과보단 대학원생이 더어... 지금 중원 고구려비도 난리이던데
특히 조선 이전 건 진짜 귀함.
으아 아니야!!!
내가 쓴 거 아니야
한국은 기록이 있으면 무조건 환영해야함 워락 기록이 부족해서
새로운 학설이 튀어나와서 한창 학계에서 논의중인건 시험문제로 안내는 불문율이 있음 클레임 걸면 머리아프거든
畓이라는 글자가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로 알고있음.
[삭제된 댓글의 댓글입니다.]
웃긴사람아님
으아 아니야!!!
담보할 때의 그 한자인가?
논 답이라는 글자인데. 담보는 擔保
아닌 척 하지만 한자 잘 아는 공원
한알못 ㅜㅜㅜ
한자자격증은 1급 밖에 안됨.....
그걸 밖에라고 표현하니 급 놀리고 싶어지는 공원, 한문 잘 아는 공원, 공부 잘하는 공원
으아 아니야!!!
사학과보단 대학원생이 더어... 지금 중원 고구려비도 난리이던데
하긴 졸업 논문 때려쳐야하니.
반대아님? 졸업논물 그냥 찾은거만 써도 되니 개꿀 그러는거 아님?
삭제된 댓글입니다.
웃긴사람아님
내가 쓴 거 아니야
쩝.....목독은 저거 하나만 나온건가?
그러니까 논농사는 이미 삼국시대에서부터 보급됐었다는건가
ㅇㅇ 보급은 됐지.
한국은 기록이 있으면 무조건 환영해야함 워락 기록이 부족해서
특히 조선 이전 건 진짜 귀함.
삭제된 댓글입니다.
라마슈파라
ㄴㄴ 이슈되는 건 금방 출제됨.
라마슈파라
ㅇㅇ 공시, 공인시험, 수능은 교과서에 반영된것 기준이라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은이상 반영안될듯. 그리고 출제자들도 이의제기오는거 짜증나서 안낼거 같은데.
짱구 신
새로운 학설이 튀어나와서 한창 학계에서 논의중인건 시험문제로 안내는 불문율이 있음 클레임 걸면 머리아프거든
민정문서같은 호구조사기록이구나
검푸른사전
몰라, 저게 순 한문이라는 보장이 없거든 향찰로 썼으면 대박
SOC사업과 세금분할 이라니 이건 사학뿐만의 일이 아니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