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559263
1618년 말엽은 누르하치의 후금 세력과 그에 대치되는 중원 제국 명나라, 그리고 그들의 연합 세력인 예허, 조선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요동 경략으로 재부임한 노장 양호는 명나라 각지에서 소집한 총병(대규모 야전 군단의 지휘관급 지위)들과 그 휘하 군대를 요동에 배치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 역시 조선이 편성한 1만 3천의 직접 전투 병력(후발대로 5천여 보급 병력 존재)을 이끌고 국경 인근에서 대기했다.
예허의 긴타이시와 부양구, 예허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전 울아 한(임금) 부잔타이 역시 명령만 내려오면 즉시 출격할 준비를 가졌다.
후금은 이런 삼각 포위망을 상대로 여러 방책을 써봤으나, 음력 11월까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움직일 수록 포위망만 좁혀들어오는 형국이었다.
1618년 음력 11월 말에는 드디어 후금이 공격을 받았다. 예허군의 긴타이시와 부잔타이가 후금의 간을 보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예허군은 후금의 영토로 편입된 지 오래인 호이파 지역을 공격하여 그 곳의 후금군 50명을 살해, 70여명의 군민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부잔타이는 이후 얼마 못가 죽는다.)
전투의 규모와 피해는 무척이나 작았으나, 누르하치는 예허가 삼각 동맹을 믿고 깝죽대는 꼴을 보지 못했다.
그는 명군이 대군을 준비중이고 조선 역시 공격을 준비중인 와중에, 삼각 동맹의 일획인 예허를 무너뜨려 자신을 옥죄는 포위망을 붕괴시키기 위해 군대를 준비했다.
한편 이무렵, 명의 요동 경략이자 후금정벌군의 최고 사령관인 양호는 누르하치에게 마지막으로 평화 교섭을 시도해보려 했다.
그는 사신 이계학(이경새 라고도 함.)을 허투 알아로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게 하는 동시에, 누르하치에게 강화를 제의했다. 물론 그 강화란, 누르하치의 무조건적인 복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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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반을 위한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