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567356
1619년 음력 2월 24일, 후금 수도 허투 알아에서 군대를 준비시키고 있던 누르하치에게는 지난 12월에 왔던 명 사신 이계학에 이어서 또 다른 명나라 사신이 왔다.
이번의 명 사신은 누르하치에게 강화 협상등을 제의하지 않았다.
이번의 사신은 그야말로 누르하치에 대한 선전포고, 그리고 후금에 대한 정보 혼선을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 사신이었다.
그는 요동 경략 양호의 서신을 누르하치에게 전했는데, 그 내용은 3월 15일(음력) 명의 47만 대군이 후금을 정벌키 위해 친히 출병할 것이니 목을 씻어놓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47만 대군. 그것은 대단히 위협적인 숫자였다.
하지만 실제 명나라 군대는 동맹군인 조선과 예허의 군대까지 합하여도 그 숫자가 20만을 넘지 못했다.
이전 편에서 설명했듯 명나라는 8만~12만정도의 군대가 준비되었는데, 평균적으로 10만 정도로 파악된다.
조선은 강홍립 휘하 1만 8천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그들중 5천명은 후발 부대로서 보급 및 척후를 담당했다. (이들은 동로군 사령관 유정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예허의 긴타이시와 부양구의 1만 ~ 1만 5천 군대는 북로군 사령관 마림과 함께 했다. 그들을 모두 합쳐도 후금 정벌군은 12만~13만정도였다.
양호가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은 누르하치가 지레 겁을 먹길 바라고 또한 후금의 주전파와 화친파가 서로 싸우길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긴장할 지언정 여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고, 누르하치 휘하에는 오직 누르하치의 뜻에만 따르는 이들 밖에 없었기에 분열 역시 없었다.
(*비록 다이샨과 홍타이지, 망굴타이등이 서로에 대해 정치적 반대 의사를 보인다고는 하나, 명나라와 싸우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음력 3월 15일날 출병한다고 말한 것은 정보 혼선의 목적이었다. 양호는 아무리 늦어도 2월 말~3월 초에는 출병할 예정이었고(이 당시 출진이 한 차례 연기되긴 했으나 아주 조금이었다.)
그렇기에 3월 15일날 출병한다는 것은 후금의 대응이 그만큼 늦길 바란 것이었다.
어쨌든, 누르하치는 양호의 서신을 받고 전군에 비상 소집령을 걸었다. 사르후의 1만 5천 4백명의 군대는 적이 접근하면 즉시 기린 하다로 퇴각하게 작계가 짜였고
허투 알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6만여명의 후금 야전군 자쿤 -구사(Jakvn Gvsa, 팔기) 역시 출진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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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반을 위한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