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규평(김재규)
이병헌이 묘사한 김재규는 평소에는 냉철한 듯 싶다가도 분노하게 되면
앞뒤 안 가리는 인물임. 시그니쳐 자세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는 건데 주로 화나거나 화를 가다듬을 때
나옴. (인터뷰에 의하면 김재규가 10.26 이후 구속된 상태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에서 착안했다고 함.
물론 그 때는 머리가 길다보니 머리를 쓸어넘기는 거지만)
그 머리를 가다듬는 모습 말고도 분노를 대사, 표정, 몸의 움직임이나 자세로도 표현함.
영화가 진행되면서 김재규의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평소 보여주는 냉철함 중간에
잘 녹여냈음. 마침내 그 분노가 서서히 밖으로 터져나오고 마지막 순간 폭발하는 모습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영화 조커의 그 구조와도 비슷함.
2. 박통(박정희)
이성민이 묘사한 박정희는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보여줌
이성민도 시그니쳐 자세가 있는데 앉아서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부하들을 노려보는 장면임. 눈이 삼백안인 상태로 사람을 노려보는데
이게 영화 공작에서 나왔던 그 이성민의 분위기와는 또 다름.
박정희와 안 닮은 거 아니냐,(물론 이창환 배우가 박정희와 가장 닮은 건 사실)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병헌, 이희진도 김재규나 차지철과 안 닮은 건 마찬가지고.
목소리와 그 분위기는 진짜 박정희라면 이랬겠구나 하는 느낌이 옴.
하지만 박정희가 늘 그렇게 살기만 보여주는 건 아니고,
한편으로는 나약하고 외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때도 있음.
그 모습을 보여줄 때 이성민이 연기한 박정희는 사람의 얼굴이 달라짐.
이게 같은 인간의 표정인가 할 정도로.
문제는 그 "나약함", "외로움"을 보여주는 것도
부하들을 이용하기 위한 책략의 일부분이란 거고.
(물론 그런 가식 없이 진짜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보여주기도 함)
3. 김재규의 동기
영화가 김재규를 자유 민주주의의 투사로만 그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님.
물론 계엄령을 막고,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려고 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그게 10.26을 일으킨 동기만은 아니라는 것임.
영화 초중반까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음.
그 감정이 존경 이상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실제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를
바로 옆에서 도운 공신으로 나옴.
영화 중반까지도 김재규는 어떻게든
박정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려 노력함.
차지철을 제끼고 박정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문제는 자신이 믿고, 충성을 바친 주군이
2인자는 칼같이 잘라내는 인물이란 것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주군에게 어떻게든
자신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을 어필해야
하는데 그 어필이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무로 다가온다는 것임.
그 어필이 바로 자신이 2인자라는 증명이니까.
이 사이클의 악순환이 김재규를
출구가 없는 지옥으로 내몰았고
김재규는 살기 위해선 자기가 박정희를
죽여야 하는 지점으로까지 내몰림.
거기에 자신이 존경했던 박정희가
자신을 배신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이 생각했던 혁명의 대의를
(김재규는 군사쿠데타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혁명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옴)
배반하고 국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선포하려 하자
영화 내내 쌓아온 분노가 마지막 최후 5분에서 폭발해버림.
(진짜 이 폭발 장면은 대단했음.)
결론은 김재규의 동기는 하나로만 설명하기
힘들고 굉장히 복합적이라는 것임.
4. 영화적 상상력
다큐멘터리를 보는 거 같다 하는 평들이 많은데
동의할 수 없음. 일단 김형욱이 최후를 맞기 전까지의
과정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고, 영화 중후반부 김재규의 행보는
진짜 영화적 상상력 그 자체임. 과연 김재규가 저 정도로까지
행동했을까 할 정도로. 좀 깬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영화적 상상력 충분히 들어간 영화임.
5. 고증
고증에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라서 딱히 할 말은 없긴 한데
궁정동 안가의 모습은 역대 영상물들 중에서 가장 고증이 잘 된 거 같음.
1층의 수조나 요리실의 가구 같은 것들은 실제와 똑같았음.
6. 볼 만한가
충분히 볼 만함. 정치적 성향을 빼더라도
느와르물 영화로도 볼 만하다고 생각함.
문제는 영화 속 미국 대사의 대사를 빌리자면
"니들이 정말 깡패냐" 라는 말처럼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느와르물이었다는 게 유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