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만주실록』
울라의 마지막 군주 부잔타이는 사료상의 언급을 보건대 그 군주로서의 재위 기간중 버일러, 또는 한으로서 칭해졌다. 이 중에서 한은 임금을 뜻하며, 버일러는 임금보다 한 단계 낮은 급수의 군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부잔타이가 언제 '버일러'라는 지위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한'을 자청했는지, 혹은 아예 즉위 초부터 한을 자처했으며 그의 재위기에 그가 버일러라고 기술된 것은 그저 후금/청의 사관에 의한 의도적인 평가절하인 것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이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들 중 일부는 이전에도 몇 차례 다루었으니만큼 여기서는 해당 견해들을 거론치 않고 다만 아래 쪽에 링크를 제시한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8275994
대신 여기서는 부잔타이가 한으로서 칭해진 시기에 대해 이전까지 다루지 않았던 견해인 1608년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1608년 음력 9월 이후부터 한을 칭했을 가능성에 대해 거론해 보고자 한다.
후금/청의 실록상에서는 부잔타이가 울라 멸망 직전까지 줄곧 버일러라고 기술된다. 이는 부잔타이에 대한 의도적인 평가절하의 뜻이 담겨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문노당과 구만주당을 살펴보자면 부잔타이에게 한의 호칭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세력과 대등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인물로 서술된다.다만 부잔타이가 누르하치를 아버지 한(ama han)이라고 부르는 것을 서술함으로서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와 동급의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나 누르하치의 조카사위이자 사위의 위치로 혈계와 위계상으로 누르하치보다 아래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부잔타이가 한으로 불리는 서술은 임자년 음력 9월 , 누르하치의 1차 울라 침공서부터 등장한다. 이 이전까지는 만문노당상에서 부잔타이가 한으로 기술되지 않으며 대부분 '부잔타이'라는 이름으로만 서술되었다. 그러나 버일러라는 호칭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록을 보자면 부잔타이에게 버일러가 쓰인 만문노당 상의 무신년 음력 9월 상에 존재한다.
그 해 음력 3월 부잔타이는 아르가투 투먼 추영과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이 이끄는 건주군의 공격에 울라 영토내에 위치한 이한 산성을 빼앗겼었다. 건주의 울라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인해 실제적인 영토 피해를 입게 된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에게 여허에 소속되어 있었던 포로를 넘기는 한 편 본인이 허투 알라를 방문하여 누르하치를 알현함으로서 어떻게든 재정비의 시간을 벌려 했다.
누르하치 역시도 당시 외교적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던 데다가 울라의 체급도 체급이었기에 울라를 한 번에 병합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잔타이와 제휴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친딸 무쿠시를 부잔타이에게 시집보냈다. 이 때 만문노당상에서는 부잔타이가 '버일러'라고 호칭되었다.
그러다가 상술했듯이 임자년 음력 9월, 누르하치가 망굴타이와 홍타이지와 더불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울라를 침공하는 시기에 대한 기사서부터 부잔타이는 '한'으로 서술되기 시작한다.
1608년 음력 9월 이후에 부잔타이가 한을 자처했을 것이라는 견해는 만문노당상의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1608년 음력 9월에 부잔타이가 '버일러'로 서술되었고, 그 이후 1612년 음력 9월에 부잔타이가 '한'으로 서술되었으므로 1608년 음력 9월과 1612년 음력 9월 사이의 시기에 부잔타이가 한으로서의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는 추론이다.
이 사이의 시기는 울라의 전성기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울라는 1607년 음력 3월 오갈암 전투와 그로부터 1년뒤 벌어진 이한산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흥성했던 세력이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부잔타이가 여러 노력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전의 영광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부잔타이가 한으로서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울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시기에 한을 자처했을 수도 있다. 쇠퇴기에 접어든 세력을 결집시키고 무너져가는 영향력을 다시 끌어모으기 위해 '한'이라는, 버일러보다 상위의 군주호칭의 위광에 기대려 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을 사실로 판단한다면 부잔타이는 이러한 '한으로서의 즉위와 호칭 사용'을 기반으로 한 본인의 권위증진을 통하여 울라를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을 수 있다.
이전에 서술하였던, 본래 울라의 군주가 내부적으로는 '한'을 자처하고 외부적으로는 버일러를 표방하다가 일정 시기를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한'을 자처했다는 가설에서도 이러한 부잔타이의 '1608년 음력 9월 이후 칭한 견해'는 유효하다. 해당 가설과 본글의 '1608년 음력 9월 이후 칭한 견해'를 결부시켜 판단하자면 부잔타이는 외부적으로는 버일러, 내부적으로는 버일러와 한을 혼용하다가 1608년 음력 9월 이후 어느 시점에 한칭을 공식화하고 스스로 한을 자처했다는 이야기가 도출된다.
이렇게 처음에는 버일러였던 부잔타이가 나중에 한을 자처했던, 아니면 내외부에서 다른 호칭을 쓰거나 혼용하다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한'의 칭호를 공식화 하였던간에 1608년 음력 9월 이후~1612년 음력 9월 사이에 칭한을 했다는 견해는 유효성을 띈다. 이는 1605년 건퇴 전투 이후 부잔타이가 칭한을 했다는 견해와 대치된다. 더불어 부잔타이가 울라의 군주로 즉위할때서부터 한호를 썼다는 가설에서는 견해로서의 효력을 잃는다. 이 경우 무신년 음력 9월의 기사에서 부잔타이가 버일러로 서술된 것은 그저 후금/청측의 의도적인 평가절하라고 할 수 있다.
부잔타이가 실제로 언제부터 한으로서의 왕호를 썼는지는 맨 처음 언급했듯이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당장 즉위 당시에는 버일러였으나 후에 한을 자처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한이었는지조차도 그 견해가 갈린다. 그러한 여러 주장 중에서 1608년 음력 9월~1612년 음력 9월 사이에 부잔타이가 한을 자처했을 수 있다는 견해는 하나의 견해일 뿐이지만, 그래도 사료를 통한 기반근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염두에 둘 만한 견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