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의 부산 여행은 매우 갑작스럽게, 또 매우 충동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토요일 부산에 가신다길래, 거기까지 가서 그냥 오기 아깝겠다 일요일에 놀고 올래
말했던게 화근(?)이었죠. 서로 피곤에 절어있는걸 알면서도 놀아보자 심리가 발동, 덕분에 어떤
주6일 노동자는 토요일 퇴근하자마자 부산행 KTX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빠른 KTX라도 아직 워프나 타임머신 기능은 없다보니 도착한건 이미 밤 9시를 넘겨
저녁도 못먹었겠다 숙소 근처의 '호맥'이라는 맥주집에 갔습니다. 호떡 파는 맥주집이라서
이런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음 이건 호떡이라기보단 설탕꿀 넣은 바삭한 파이에 가깝네요.
먹으며 이야기하기엔 너무 시끄러워 다시 갈것 같진 않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서도 왕년 LA에서 올림픽하던 시절(아.. 연식이 탄로나겠어)에
잠시 부산에서 살았더랬습니다. 부산 남항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남포동, 송도, 영도 일부가
제 나와바리(?)였더랬죠.
뭔가 잔뜩 볼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알람이 울려대도 도통 일어나질 못하겠더라구요.
시작부터 한참 늦은, 모처럼의 이번 부산 구경도 이 동네의 상징 영도다리에서 시작합니다.
아직 일요일 아침이건만 자갈치 시장 한켠에는 벌써부터 흥정하는 사람들이 보이구요.
그 시절 동네 놀이터(...)였던 광복로. 길이 좌우로 갈라지는 중간 건물 2층에 '사해방'이라고
단골 중국집이 있었죠. 그때는 그저 어른들 따라서 갔을 뿐이라 이름난 곳이라는건 한참 후에
알게 되었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없네요. 십 년 전까진 있었는데, 그때 먹어뒀어야 했는데. ㅠㅠ
광복동에 왔으니 용두산에 올라가봐야죠?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는 어르신께서 요샌 참 편하게 잘 돼있다고 감탄하시네요.
어릴때는 정말 높다고 생각했구만 이제는 그냥 아기자기해 보입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올라가볼 수는 없었지만 십 년 전에 올라가봤으니 상대적으로 덜 억울합니다.
그 시절에 저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국.. 아니 초등학교를 다녔더랬는데요.
그때 기억이라면 여중인지 여고인지 붙어있어 용돈 모아 매점의 햄버거를 먹을수 있었다는 거,
용돈이라니까 그때 기를 쓰고 돈을 모아 샀던 초창기 태엽식 조이드 몇 개가 보물이었다는 거,
비슷하게 보물 취급인 아카데미 독수리 사령선을 사촌이 실수로 밟아버려 난리가 났었다는 거,
학교에서 표준어 쓴다고 놀림(이라기보다 신기함이었나)받아 기를쓰고 사투리를 배웠다는 거,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비디오'를 처음 보면서(무려 콤바트라 V) 컬쳐 쇼크를 겪었다는 거 정도?
이제 버스를 타고 송도로 들어갑니다. 남포동 광복동은 이따금 들렀어도 송도까지 들어가는건
그 시절 이후 처음이지 싶은데요. 거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구만 버스를 타고 길에 들어가보니
이 구불길의 분위기가 머릿속에 되살아납니다.
송도 해변까지 가기 전 부산관광고등학교에서 내립니다. 학교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져있네요.
훗날 "울지마 톤즈"로 알려진 이태석 신부님이 이 동네에 살면서 바로 옆의 송도 성당에 다녔고
지금은 생가 부근이 기념관으로 만들어져 있거든요.
성당 여행 #135 부산 송도성당 (이태석 신부 기념관)
기념관 옥상에 올라오니 송도 일대, 부산 남항, 저 멀리 용두산 타워까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동네마다 온통 산기슭에 거미줄같은 골목에 다닥다닥 들어찬 집들에... 어릴 때는 부산의 이런
특색을 잘 알아채지 못했더랬는데요. 하긴 재개발되기 전 그때는 서울도 별 차이 없었더랬나?
송도 해수욕장에 내려왔습니다. 분명 그때는 여름방학이면 도시락 싸들고 와서 하루종일 노는게
일과였건만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아침을 부실하게 때웠더니 배가 고파져 '송도제일밀면'이라는 곳을 찾아 일단 들어갔습니다.
상가 안에 있는데도 사람이 많은걸 보니 맛집인가봐요. 만두와 함께 한 그릇 순식간에 뚝딱~
소화도 시킬 겸 송도 해변을 한 바퀴 걷습니다. 나중에 크면서 영도야 섬이니 당연하다치고
분명히 육지와 연결된 송도에 왜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했더니만 이제 거북섬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바위섬에 옛날에 소나무가 몇 그루 있었고 그래서 송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나 뭐라나.
왕년엔 현지인이었을지 몰라도 오늘은 철저히 관광객이므로 케이블카도 타줍니다.
음, 어릴때도 송도에서 케이블카를 타봤던거 같긴 한데... 뭔가 많이 달라졌네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암남공원에서 반대편 끝 두도전망대까지 가볼 생각이었는데,
해안의 절경을 구경하겠다고 중간의 넓고 편한 길 말고 굴곡이 심한 해안쪽 산책로를 고른게
이날의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다 동행분의 분노가 폭발!
당장 전망대를 포기하고 돌아왔음에도 한 번 솟구친 분노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으니;;
그냥 이 동섬이나 보고 산책이나 했어야 했는데;;;
폭발 뒤 싸늘해진 동행분은 따로 제갈 길 가시고, 저 혼자 원래 계획대로 영도로 건너왔습니다.
여기에 또 신선 성당이라고 아기자기하면서 사연있는 성당이 있거든요.
성당을 둘러본 뒤 길 쪽으로 나왔더니 바다쪽으로 흰여울 문화마을 안내소라는게 서있습니다.
이제 부산의 관광 명소가 된 감천문화마을처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옛 주택가가
몇몇 영화나 예능을 통해 소개된 이후 작은 공방이나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이렇게 되었다네요.
다리 건너 송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광경을 전에 본 적 없으니 처음 와본게 맞는 모양입니다.
해안 절벽을 따라 하얗게 칠해진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건 분명 재미있는 경험이겠지만
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 온통 가득한 커플들 속에서 시커먼 아저씨 혼자 사진찍고 있자니 어째;;
이 골목길이 유명해진 요인 중 하나가 이거였군요. 영화 "변호인" 촬영을 여기서 했다고.
대사를 단서삼아 기억을 되살려보니 김영애-임시완 모자가 살던 집이 여기였던 듯.
길의 끝에 이르자 전망대가 있고 절벽을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뭔가 예쁘게 나올것 같은 골목마다 계단마다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구요.
해변쪽으로 내려오니 태종대 쪽으로 연결되는 보행자 터널이 있지만 저는 오늘은 여기까지.
터널 끝에서 역광 사진을 찍기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이네요.
절벽 아래 길을 따라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금 걷는 길이긴 해도 일단 예쁘장하고
사이사이 쉴곳도 있고 먹을것도 있으니 동행인도 좋아하셨을텐데 어쩌자고 그런 선택을.. ㅠㅠ
계획대로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건만 별로 의욕도 없고 해서 영도대교까지 걸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도 영도다리를 걸어서 건넌 적은 없었던 갓 같군요. 오호라.
어차피 시간도 좀 남겠다 다리 올라가는걸 볼 수 있으려나 했더니 토요일 14시에만 한댑니다.
충격적인건 이 다리가 제가 어릴때 보았던 그 다리가 아니라는거! 해체하고 새로 놓았다고??
급히 잡은 여행이라 깜빡 충전기를 두고 오는 바람에 전화기의 배터리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
부산역에 충전 서비스(유료)가 있다길래 찾아갔건만 오전 10시~오후 4시 사이에만 된답니다.
아마 책임 소재때문에 담당 직원의 근무 시간에 맞춘 모양인데, 저에겐 그림의 떡이로군요.
다행히 전화기가 사망하기 전에 동행인과 다시 만났고, 음식으로 어찌어찌 화를 푸셨습니다.
부산역 건너편 차이나타운에서 만두로 유명한 '신발원'은 요즘 스타일로 분위기가 바뀌어버려
함께 쌍벽을 이룬다는 그 옆의 '마가 만두'로 왔죠. 여기도 이제 역사가 꽤 됐을 터라 여전히
마씨 성의 사장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딤섬이 아닌 우리나라식 중국집 만두 중에서는
과연 한 손에 꼽을 만한 맛이구만요.
이렇게 모든 여정과 사고들이 끝나고 서울행 KTX를 탄게 지난 일요일 저녁의 8시 40분.
현지에 체류한 시간이 정확히는 23시간 30분 동안이었지만 대충 24시간이라 쳐서,
24시간 동안의 참 정신없는 부산 여행이었습니다.
이번에 올라오는 강력한 태풍이 부산 근처를 통과하는 경로라던데 별 피해 없기를 기원합니다.
와 제법 경치와 볼게 많아 보입니다.
부산에 연고가 있지만 매번 가던 곳만 가다가 눈을 조금 돌리니 영 다르게 보입니다~
글을 읽으니 부산에 가고 싶어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릴 적엔 도시가 다 도시지 했구만 나이를 좀 먹으니 도시마다 개성이 강하다는걸 느끼고 있습니다. 부산은 그중에서도 아주 강렬하죠!
변호인 영화에 나오셨던 고 김영애님은 정말로 부산 영도 출신이셨더라구요. 어쩐지 대사가 진짜 찰지더라.
자연스럽게 글을 쓰셨지만 본인 화난다고 따로 제 갈길 가는 일행이라니.ㄷㄷㄷ맘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