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은 링크 참조.
(베트남 하노이의 문묘. 조선에도 있던 그 공자를 모신 사당 맞다. 베트남도 유교를 받아들이고 동아시아 문화권처럼 과거제를 시행했다)
이제 근왕운동 얘기를 해보자. 베트남은 동남아 국가이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중화 유교문화권에 속해, 전근대 국가 치고는 상당히 교육수준이 높았고(이건 조선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랑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그많큼 많이 쳐맞고 착취도 심했던 터라 독립운동이 상당히 일찍부터 시작된다.
이전 글에 썼듯 이미 프랑스 침공 시기부터 베트남 여기저기에서 토호나 관료, 민중에 의한 봉기들이 일어났으나, 이런 봉기들은 특정 지역에서만 산발적으로 일어난 게릴라식 투쟁이었고, 통일되거나 조직된 운동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두 제국주의 열강을 모에화한 그림: 프랑스(마리안느)와 브리타니아)
그런데 1885년 청나라가 베트남에서 물러가고 그 대신 프랑스가 베트남의 큰형님 행세를 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 수백년 간 중국은 지가 베트남의 주군이라고 잰체하긴 했지만, 딱히 자주권에 큰 간섭은 하지 않았고 비교적 이런 저런 요구도 적었던 반면, 프랑스는 아예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눌러앉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착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왕운동을 주도했던 대신들 중 하나인 똔텃투옛. 후술하겠지만, 사실 이 양반 좋은 사람 아니다)
이에 베트남 군주권이 훼손받는다고 느낀 황제(중국 말고 베트남 황제. 베트남은 외왕내제했다)는 근왕령을 내렸다. 1885년부터 1889년간, 전근대 독립운동으로서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근왕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근왕운동의 목표는 전국 각지의 충신과 민중들을 결집하여 프랑스를 축출하고 어린 황제 함응이를 옹립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강압적인 간섭을 피해 어린 황제와 조정관료들은 베트남의 산간지방으로 대피해 몸을 숨겼고, 거기서 전국의 민중과 관료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근왕령을 반포한다.
프랑스는 이에 대응, 함응이 황제의 형을 대립 황제로 내세우고, 함응이와 근왕운동에 동조하는 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한다.
(함응이 황제, 프랑스 식민지에서.)
결국 함응이는 베트남 전역을 전전하며 저항을 계속하다가, 베트남 소수민족의 밀고로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된다. 그것으로 베트남의 근왕운동은 허망하게 끝이 났다(*여담이지만 이 황제는 나중에 거기서 알제리계 프랑스인인 마르셀과 결혼하고, 1943년 73세의 나이로 죽어 프랑스 땅에 묻혔다. 망국의 군주치고는 그럭저럭 잘 살았던....건가?)
근왕운동은 망해가는 국가, 망해가는 전근대 왕조가 일으킨 최후의 불씨였고, 전근대적 가치에 기반을 둔 운동치고는 대규모 저항운동이었지만(다시 말하지만 응우옌 왕조에서 일어난 운동 중 최대규모였다), 조낸 허무하게 실패했다. 왜 이렇게 허무하게 망했는가? 결정적인 몇 가지 삽질을 들어보자면
"형님! 우리가 외세에 맞서 일어났으니 도우러 와줄거죠?"
"미1친놈아 지금 내코가 석자야"
- 노답인 당시 관료들의 국제정세 이해: 당시 근왕운동의 브레인(brain)이라 할 수 있는 조정대신들은 과거의 큰형님인 청나라가 도우러 와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 떄 이미 청나라는 청불전쟁으로 베트남에 대한 개입 명분도 잃고, 아니 사실은 자기 자신이 안팎으로 얻어터져서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실, 청불전쟁의 배경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서 청나라가 도우러 오고, 또 기적이 일어나서 청나라가 이겼다 해도 그게 베트남에게 좋았을지는 의문이다. 이전 글에도 썼듯이, 사실은 청나라도 베트남을 속국화해서 열강으로 발돋움하려는 "또 다른 깡패"에 불과했기 때문.
(응우옌조의 군인들)
- 노답인 현장 저항군의 무기, 전술, 군수, 조직력: 베트남인들은 수십년 후 미국과 싸울 때도 보여주었듯이 게릴라전에는 이미 수백년 동안 짬밥먹은 도가 텄지만, 아예 상대방을 흠씬 두들겨패서 몰아내야 하는 전면전에서는 딱히 뾰족한 수단을 갖고 있질 않았다. 전국의 저항군을 하나로 규합할 수단도, 보급능력도, 제대로 된 근대식 무기도, 조직력도 없었다.
- 노답인 전대 황제들과 대신들: 함응이 직전 황제인 뜨득 황제가 워낙 삽질을 해놓은 바람에 농민들이 조정을 전처럼 신뢰하질 않았다.
(선대 황제인 뜨득(이전 글에 언급한 그 사덕제))
이 뜨득 황제 시기 조정 대신들은 파벌싸움으로 자기들의 기득권이나 이익을 우선시하고 국정은 뒷전이었던 데다가, 황제 본인은 후계자를 마구 갈아치웠다("넉달 동안 왕이 세 번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왕족들이 서로 모함하고 암살(!)도 서슴지 않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뜨득이 후계자로 삼은 왕(즉 황태자)이 다른 왕족의 외설적이고 문란한 행위를 문제삼았다가 독살당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 뜨득 황제가 그나마 남은 마지막 후계자에게 "아 슈발 너 존나 문제 있는 새낀데 따로 시킬 놈 없으니 황제 시키는 거다"고 못박고 만천하에 떠들고 다니니, 후임 황제의 권위가 설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떻게 된 거냐면....뜨득 황제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3명의 조카와 다른 황족의 동생을 양자로 들였다. 이 때 정권을 쥔 대신들(예를 들면 위의 저 똣텃투옛)은 이 중 한 명을 즉위시켰지만, 불과 3일 만에 폐위하고 뜨득 황제의 동생을 대신 옹립했다. 근데 이 신임 황제가 권력을 쥔 대신들을 견제하려 시도하니깐(다만 이 황제도 대신들 견제하려고 프랑스에 접근한 한계는 있었다) 대신들은 그 황제를 죽이고 위의 남은 황태자 중 한 명을 또 새 황제로 옹립했다. 근데 이 새 황제도 대신들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견제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이 황제도 죽여버린다(...).
- 노답인 함흥이: 전대 황제들이 이렇게 픽픽 죽어나가고 왕실의 권위는 안드로메다로 가니, 근왕운동 초기에 어린 황제는 대체 근왕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왜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지 본인 스스로가 이해하질 못했다.사실 갓 황위에 오른 어린 황제 입장에서 자신이 황좌에 앉자마자 대뜸 신하들이 가마에 태우고 도망가니 이 양반이 뭘 알았겠는가.
(함응이)
실제로 당시 기록에 황제가 "야 근데 우리가 왜 도망가는 거냐?" 하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전국에 반포한 근왕령도 황제 본인이 쓴 것이 아니었고,정작 황제 본인은 자기 명의로 된 근왕령이 반포된 다음에야 그 초안을 읽어볼 수 있었다(!)
- 노답인 대신들: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는, 항복한 대신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다. 그러자 일부 대신들은 자기들이 앞장서서 황제를 끌고 나온 주제에 근왕운동에서 이탈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한 대신은 황제랑 같이 피난가다가 "아 폐하 저 잠깐 고향 다녀옴" 하고 튀어서 투항하고, 또다른 대신은 "폐에에에하 제가 몸소 나서서 충량한 구원병을 모아오겠나이다!" 하고 토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신들이 그렇게 해도 어린데다가 피난중인 황제는 그들에게 그 어떤 통제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응우옌조의 고위 대신들)
아까 위에 사진을 올린 톤텃투옛이 그 한 예다. 근왕운동을 주도했기에 뭔가 남다른 뜻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사람, 아까 위에 언급한 "노답인 대신들"의 하나였다. 그렇다. 조선의 세도가나 권신처럼 이 사람도 당시 응우옌 왕조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권신이었다. 사실 조선보다 한술 더 떴는데, 뜨득 황제가 죽을 당시 이 양반이 베트남의 군권(군대 통수권 말이다)을 전부 다 갖고 있었다! 이 양반은 당시 베트남의 3명의 섭정 중 한 명이었고, 신임 황제들이 그 지나친 권력을 견제하려고 했던 바로 그 대신이었다. 함응이 전임 황제들을 죽인 데에도 이 양반이 연루되어 있단 얘기다.
(응우옌조의 옥새들)
- 노답인 조정체제: 응우옌 왕조의 왕권이 이 모양 이 꼴인 데에는 복잡하고 중구난방인데다 대신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응우옌조의 황위 계승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복잡한 거 각설하고 말하면, 응우옌조는 시스템적으로 조정 대신들의 세력이 컸고, 국정운영에 있어 대신들의 능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컸다. 대신들이 유능하고 충성스러우면 좋은 체제이나, 반대로 이는 왕과 왕실이 상대적으로 무력한 태도를 갖는 이유가 되었다. 국난에 맞서서 왕이 솔선수범하는 게 아니라 대신들의 등 뒤로 숨는 것이다.
따라서 대신들의 입지가 강했고, 물론 책임있는 관료들도 많았지만....본질적으로 근왕운동의 구심점이어야 할 왕과 왕실의 무기력, 무능, 무의욕 삼박자는 운동의 추진력을 떨어뜨렸다.
더구나 위의 뜨득황제 시절 최고대신들은 막대한 전횡과 권력을 휘둘렀고, 명목상으로는 황제폐하 만세를 말했지만 사실은 더 이상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던 상태였다.
(응우옌조의 왕릉)
- 노답인 정책: 구(舊)조정의 정책들이 죄다 삽질에 삽질이라 농민들을 착취했고, 이는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프랑스의 수탈이 심화되어 가는 중,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지주계급을 위한 토지정책을 발표하여 많은 농민들을 가난뱅이 빈농으로 만든다.
그래서 재정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번엔 대지주들의 땅을 몰수하려 하니까 대지주들이 극심하게 반발했다. 당연히 계층갈등과 민심이반이 발생할 수밖에.
결국 근왕운동 시작할 때는 대규모로 Waaaagh! 하고 일어났던 저항군은, 저항군 리더였던 지방 관료와 토호들이 서로서로 배신을 때리거나, 쉽게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망해버린다. 저항군의 실패로 가장 많이 좃된 건 역시 민중들이었고.
(베트남 하노이, 성 요셉 성당. 근왕운동 시기인 1885년에 프랑스가 세웠다)
- 노답인 가톨릭과의 갈등: 근왕운동은 외래 종교, 특히 제국주의 원-쑤인 프랑스가 들여온 종교인 가톨릭과의 종교전쟁적 성격도 띄고 있었다. 근왕운동을 주도한 관료층은 유학을 신봉했고, 민중들은 대체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가톨릭이 제국주의의 첨병이자 나라를 망친다는 인식이 분명 있었다.
근왕운동기에 함흥이 황제는 가톨릭교를 금지하고 가톨릭교도들에게 개종을 요구했고, 그러자 가톨릭교도들은 이에 맞서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근왕운동을 밀고하거나, 불교 사원을 불태우고 볼교도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종교전쟁의 성격도 띄고 있던 셈인데, 이로 인해 근왕운동은 국민의 완전한 단결을 이루지 못했다(뭐 ‘국민’이란 것 자체가 사실 근대적 개념이지만...여담이지만 그래서 베트남 일각에서는 카톨릭을 매국노이자 제국주의 앞잡이라며 안 좋게 보기도 했다).
- 노답인 소수민족과의 갈등: 종교 갈등만 있었냐? 면 그렇지 않았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민’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근대 국가에서야 생긴 얘기고(애초에 ‘민족’의 정의부터가...), 전근대 국가이자, 복잡한 인류학적 지형도를 가진 동남아 국가였던 베트남은 아직 ‘베트남인’이라는 의식이 약한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근왕운동을 도왔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응우옌 왕조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고? 역대 베트남 왕조들이 얘네들 탄압을 했거든.
(베트남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야오족)
베트남인은 베트남의 주 민족이라 할 수 있는 평야지대의 비엣(viet)족과, 산간지대의 트엉, 타이, 만야오, 몽 등 여러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통적으로 이들 평야의 부유하고 강력한 비엣족과 산악 소수민족 간에 인종갈등이 있었고, 역대 베트남 왕조들은 이들 소수민족들을 “야만족”이라 규정하면서 차별대우했다.
(고잔지대 소수민족 중 하나인 몽족 여성들. 바로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하대 끝에 왕조를 배신하고 근왕운동을 끝장냈다)
그럼 응우옌 왕조는? 원래 베트남 남부가 본진이었던 응우옌조는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를 “악한 야만족들 소굴”이라 부르며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적인 동화정책(同化政策)을 펼친다.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세금을 물렸다. 북부의 경우는 조금 유화적이긴 했지만, 역시 동화정책과 중앙정부 권력의 친투를 꾀했다.
그 결과는 결국 처음에 근왕운동에 협조했던 몽족의 배신이었다. 근왕운동을 결정적으로 끝장낸 것은 바로 함응이를 잡아서 프랑스에 넘겨 준 소수민족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왕운동은, 조선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의병운동이 그러했듯이 허망하게 실패하고 만다. 전근대 국가의 흔한 외세 저항 운동 - 기존 지배세력과 지배체제를 중심으로 한 - 의 흔한 실패였다.
다만 응우옌 왕조는 이후 괴뢰 왕조로 1945년, 길게 보면 1955년까지 살아남았다. 당연히 중앙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베트남 중부지방에서 일단 명목적 자치권은 받았다. 그것이 근왕운동이 그나마 거둔 성과라면 성과랄까.
(1차대전기에 프랑스군 소속으로 참전한 베트남인들)
여담이지만 그로 인해 베트남인들은 1차 세계대전 때 자신들과는 상관도 없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전선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식민지인의 삶이라는 것이 이러하다.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맞는 조선. 내 기억이 맞다면 미국과의 조약이다)
19세기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특히나 격동의 시기였지만(그래서 비슷한 패턴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실 이와 비슷한 문제는 21세기의 우리도 늘 직면하고 있다. 토인비 옹이 "문명이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도 늘 어딘가로부터 온 난관에 부딪히고, 대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아시아 각국, 꼭 동아시아가 아니더라도 여러 다른 나라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체제모순에 맞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에도 의미를 갖는다.
참고자료:
김종욱, "19세기말 베트남 근왕운동의 실패에 대한 재고찰", 동남아연구 21권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