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음력 8월, 사르후 전역에서 후금이 명-조선-예허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지 약 5개월이 지난 시점.
그 때 후금군은 자신들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거대 여진 세력인 예허를 멸망시키기 위해 출병했다.
당시 후금수도 자이퍈을 떠난 수만명의 후금군을 이끄는 것은 후금의 한 누르하치 본인이었다.
누르하치 뿐만이 아니라 후금 서열 2~5위(다이샨, 아민, 망굴타이, 홍타이지)가 모두 종군할 정도로, 후금의 예허 원정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음력 8월 22일, 누르하치는 우선 서예허에 대해서는 포위만 하게 하고 동예허부터 공격했다.
동예허 공성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후금군은 결국 대장군 피옹돈의 활약을 등에 업고 외성과 내성을 함락한 뒤 동예허 군주 긴타이시를 누각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긴타이시는 좁은 누각에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에게 쉽게 항복치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상황에서 협상을 하려 했다.
자신의 조카이자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를 불러 신변보호를 확답받으려 한 것이다.
당시 홍타이지는 서예허 포위에 투입되어 있었는데, 이에 따라 동예허로 지원을 와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대단한 난항을 겪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내려와서 한에게 자비를 청하십시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협상여지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반면
긴타이시는 "확실한 신변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내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이 과정에서 긴타이시가 내려보낸 긴타이시 휘하 대신, 아르타시를 누르하치에게 데려가기도 하고
또 포로로 잡힌 긴타이시의 아들이자 홍타이지 본인의 사촌형 덜거르를 시켜 긴타이시를 설득하기도 했으나 긴타이시는 역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설득 과정에서 홍타이지는 본인 혼자서 10차례, 덜거르와 함께 다섯 차례, 총 합하여 열 다섯 차례나 협상을 시도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결국 긴타이시는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자 '최후까지 항복하지 않은 남자' 로 기록되기 위해 누각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1살을 시도했다.
그러다 화상을 입은 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겨우 항복했는데, 당시 긴타이시는 이미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고 살아난다해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기에 결국 처형되었다.
....불지른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