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요?
현재로서 그저 상상의 영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금동서를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상상을 했고, 여러 작품을 통해 그 상상을 표현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조수형'은 서예지 박사의 연구소에서 조수로 일하다 사고로 사망,
서예지 박사의 손으로 안드로이드에 생전의 정신을 이식해서 안드로이드로 살아가게
됩니다.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는 수형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 캐시 데이터 정리'를 통해
불안이나 고민, 공포 등의 감정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척이나 편리해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쓸데없는 고민
같은 것을 일순간에 지워버리면 충동구매 같은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감정이 지워지는 것을 보면, 시간을 들여 자신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을 강제로 지워
버리는 것은 과연 어떨까요?
이성적으로는 고민이나 불안은 쓸데없으니 지워버리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것'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 자신이지요. 결국 감정을 지우는
것은 나 자신을 지우는 것이라는 무서움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종반부에 안드로이드의 몸에 기록된 우선순위에 따라 인간의 감정을 무시하는
모습. 다른 소설이었다면 '인간성이 기계성을 거부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그런거 없습니다. 그래서 왠지 모를 무서움이 느껴집니다.
정신적으로 어딘가 망가진건 주인공인 수형 뿐만이 아닙니다. 후반에 그 주인공이 그
소동을 일으켰는데도 불구하고 '오빠 너무좋아'하고 좋아 죽는 여동생 수진의 모습이란...
그리고 드러나지 않지만 수형을 안드로이드로 만든 서예지 박사 또한 정신적으로 어딘가
망가지지 않았나 합니다. 후반의 단편이나, 안드로이드가 된 수형이 '그 소동'을 일으킨걸
보면 박사의 분노가 안드로이드에도 그대로 담겨있겠지요.
이 소설은 곳곳에서 고전 SF소설에 대한 패러디가 보입니다. 덕분에 처음 볼 때는 패러디를
보느라 왠지 모를 공포심이 느껴지지 않았지요.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의 어딘가 망가진 이야기. 꿈꾸는 전기양과 잠들지 않는 밤의 공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