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 동안 눈이 굉장히 많이 내렸다. 지붕이 짓눌리지 않도록 간간히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던 레이무는, 눈이 그친 김에 오늘은 신사 경내를 깔끔하게 치웠다.
그리고 이걸 치우는 일에 마루가 일손을 보탰다. 마루가 자기도 거들겠다면서 호기롭게 눈삽을 들었을 때 레이무는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은 내릴 때는 가루지만 쌓이고 얼면 단단하고 무거운 얼음덩어리가 된다. 며칠 밤낮 동안 펑펑 내렸던 탓에 그 양은 보는 것만으로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레이무는 중간에 지치면 들어가서 쉬라고 말해뒀지만, 마루는 레이무와 함께 청소를 끝마쳤다. 툇마루에 앉은 채로 레이무는 깔끔해진 신사의 모습에 만족하면서 차를 홀짝였다. 따뜻해서 기분 좋은지 다른 찻잔을 꼬옥 안고 있던 신묘마루가 말했다.
"마루 지금 뭐하고 있어?"
"나한테도 안 말해주더라. 비밀이라면서."
청소 후에도 마루는 체력이 남아도는지 거침없이 눈삽을 휘둘렀다. 옆으로 치워뒀던 눈을 쌓고, 힘껏 두드려서 다지고. 쉴새 없이 눈을 팡팡 두드리는 소리가 퍼졌다.
흐리고 칙칙한 하늘과는 비교되게, 열심히 눈을 쌓아올리고 있는 마루의 모습은 활력이 넘쳤다.
...
레이무의 차는 바닥나고, 마루의 몫이었던 차가 거의 다 식어갈 때쯤 레이무는 지난 며칠 간의 식단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마루는 분명 레이무와 한솥밥을 먹었을 텐데, 이것들 중에 자양강장이나 체력 증강에 엄청나게 좋은 뭔가가 있었던가? 하나 확실한 건, 마루 같은 어린애가 저런 체력을 내려면 적어도 상당한 영물을 달여먹여야 할 것이다.
마루는 자신의 체격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눈삽을 꾸준히 움직였고, 덕분에 구조물은 거의 완성에 가까워져 있었다. 눈삽이 눈더미 위에 꼿꼿하게 박혔다. 마루는 작품을 슥 한번 돌아보고는 툇마루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발걸음에서는 확실히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마루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다. 마루는 찻잔을 집어들더니 망설임 없이 한번에 쭉 들이켜버리고는 강렬한 쓴맛에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찌그러진 얼굴임에도 행복감이 눈에 띄었다. 저런 표정을 보고 있자니 레이무는 상투적이지만 이런 질문을 안할 수가 없었다.
"저거 뭘 만든 거야?"
"비~밀이에요."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쭉 지켜봤는데 비밀이니 뭐니 할 것도 없었지만, 마루는 마냥 좋다는 듯 히죽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거의 시원할 정도로 식었고, 꽤나 쓰디쓴 차 한 잔으로 기운을 얻은 마루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풀었다.
마루가 만든 건 눈으로 만든 집이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흔히 생각하는 집처럼 꼿꼿한 평면과 각의 미는 없었고 그냥 둥그스름하면서도 우둘투둘했다. 임시로 만든 굴 같은 걸 집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루가 이걸 만든 이유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눈이 잔뜩 있어서 한번 만들고 싶어서였다.
마루는 손으로 눈을 한 웅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약해보인다 싶은 곳에 붙이고 메꾸면서 나름대로의 보강을 했다. 점점 완성되어가는 집을 보던 레이무와 신묘마루는 재밌게도 완벽하게 똑같은 생각을 했다. 땅에 세로로 박아넣은, 길쭉하고 울퉁불퉁한 하얀 감자. 비웃는다거나 놀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건 정말이지 감자와 똑같이 생겼다. 겉에 조금씩 묻어 있는 흙도 그렇고, 보강을 하려고 눈을 붙여댔더니 더 울퉁불퉁한 감자처럼 변해갔다.
작업 기간은 1시간 내외, 감독 및 노동 인원은 1명. 꽤나 지쳤는지 마루는 주저앉은 채로 소리 없이 양팔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 걸로 기공식을 시작한 다음, 쪼르르 눈집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걸로 기공식을 마쳤다.
"레이무는 어렸을 때 저런 아지트 만들어본 적 있어?"
"아지트?"
"집과는 별개로, 좁고 어둡더라도 자신만의 비밀기지 같은 거 멋있잖아?"
"만들어봤던 기억은 없는데. 말 나온 김에 네 꺼 하나 만들어줄까? 반짇고리나 곤충채집통만 있어도 멋진 아지트 하나 만들 수 있겠네."
"채집통은 싫어!"
채집된 곤충 취급당하는 게 레이무의 상상 이상으로 기분 나쁜 것이었는지 신묘마루는 꽤나 역정을 냈다. 저 조그만한 목청에서 싫다는 말이 꽤나 큰 소리로 꽥꽥 울려퍼졌다.
물론 몸의 크기에 비해 목소리가 크다는 거였지, 일상에서는 큰 소리 축에는 끼기 어려웠다. 이런 뻔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타이밍에 눈집이 무너져내리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장이 푹 꺼져서 추락하더니 벽이 힘없이 안쪽으로 허물어졌고,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아이고 세상에."
집이 순식간에 무덤이 되어버리자 레이무와 신묘마루는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놀란 가슴 쓸어내릴 틈도 없이, 무덤에서 사람의 상체가 불쑥 솟아오르자 두 사람은 또 놀랐다. 다행히도 마루는 매몰 과정에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문제일 것이다. 마루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허리 아래를 완전히 덮고 있는 눈더미를 내려봤다. 어떤 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 있었고, 또 어떤 건 아직 단단하게 뭉쳐진 덩어리도 있었다. 마루는 그 중 단단한 것들을 집어들고는 신경질적으로 치웠다.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서는 짜증과 피로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마루는 눈삽을 다시 뽑아들고 난장판이 된 주변을 다시 쓸어서 치웠다. 정리가 끝나고, 흥분도 진정되자 마루의 찌그러진 얼굴이 다시 펴졌다. 그러자 마루는 그대로 주저앉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기분이 꽤나 처참했다. 레이무가 온몸에 묻는 눈을 털어내주고 달랜 후에야 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실망과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공든 탑이 무너졌는데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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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어제 눈집이 무너졌던 이유를 하루종일 생각해봤다. 최소한 그 이유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오늘로 눈을 쌓아올렸지만, 어제만큼의 의욕은 없었다. 윗쪽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꺼진 게 원인이라면 아랫쪽은 튼튼하고 무겁게, 윗쪽은 적당히 가볍게 만들면 해결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손으로 눈을 쌓아올리는 모습에서는 실험적인 욕구가 느껴졌다.
조금 뒤, 신사 뒷편의 숲에 또다시 조그만한 집이 지어졌다. 어제의 것보다는 조금 작고 더 묵직해 보이는 게 거북의 등껍질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마루의 관심사는 외견보다는 내구성이었다. 일단 만들었으니까 들어가볼까 생각하던 참에 누군가 마루의 소매를 당겼다.
"네가 들어가보려고?"
마루의 작업이 거의 끝날 쯤에 나타났던 조그만한 요정이었다. 마루보다도 훨씬 작은 키의 요정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주변을 둘러 보자 다른 요정들도 슬쩍슬쩍 보였다. 눈치를 살피던 요정들 중 몇몇이 마루에게 쫄래쫄래 몰려왔고, 또 몇몇은 들어가보려고 눈집 앞을 서성였다. 저렇게 여럿이 들어가기엔 작을 텐데.
요정들은 전부 하나같이 몸집도 마루보다 조그만하고, 그만큼 힘도 약하고 겁도 많았다. 그리고 말을 할 줄 모르는 건지 안하는 건지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전에 만났던 강한 요정들이 말썽부렸던 걸 생각하면 이들은 굉장히 조용하고 얌전했다.
하지만 말썽이나 장난이 아닌 다른 게 마루를 압박했다. 어쩌다 보니 요정들의 초롱초롱한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된 마루는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곤란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요정들은 단 한 마디도 안하고 있었지만 저 올려다보는 눈길은 말보다 더 많은 걸 담고 있었다. 거절이 서툰 마루는 휴식을 미뤄야 했다.
"그래그래, 알았어. 만들어줄게."
결국 마루는 건축가를 맡게 되었다. 가장 먼저 인원을 확인해 보았는데, 머릿수가 총 여덟이었다. 어느 정도 크기를 몇 채나 만들어야 할까. 장갑을 꼈는데도 눈을 하도 만져서 꽤나 시리는 손을 문지르던 마루는 가서 눈삽이라도 갖고 와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가벼운 요정들이 눈 위를 걸어다니는 푹신한 소리와는 다르게 눈이 푹 눌려서 뽀드득하는 소리가 더 컸다.
"어머어머, 무슨 요정들이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레티는 신기한 걸 봤다는 듯이 마루와 요정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티는 이 중에서 마루를 알아봤다. 예전에 만났을 때는 꽁꽁 얼어 있었는데 생기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누구...세요?"
"얘,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또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마루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휘이잉 하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던 하늘에서는 눈까지 솔솔 내리기 시작했다.
마루와 요정들은 방금 전보다 더 강한 추위를 느꼈다.
...
아직도 레티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우선, 잠깐 눈보라가 불었는데 순식간에 나무의 높이에 닿는 눈더미가 생겨난 걸 본 마루는 일단 레티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티에 대한 경계심은 단순히 낯선 사람 정도의 경계심이었다. 자신에게 해코지할 낌새도 전혀 없었고, 레티의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정말 해치려고 했으면 방금 전 눈보라에 마루는 얼음장이 됐겠지.
레티가 일으킨 눈보라는 그러는 대신에 여러 채의 눈집을 만들어냈다. 새하얀 장난감에 신난 요정들은 집단 흥분에 휩싸여 꺄르륵대면서 놀고 있었다. 어떤 요정들은 아예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레티는 마냥 즐겁다는 듯이 이들을 구경했다. 아무튼 레티 덕분에 요정들의 관심 공세에서 벗어난 마루는 적당한 바위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레티가 다가오더니 마루의 옆에 앉았다.
"이제 좀 제대로 인사해볼까? 레티라고 해."
"저는 마루인데요. 저희 언제 만난 적 있었어요?"
"음, 언제 한번 지나가다가 널 본 적 있었거든. 넌 아마 모를 거야."
레티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떼버리자 마루는 별 의심없이 넘어갔다. 그날 자기가 얼어죽기 직전까지 갔던 게 레티 때문이란 걸 알면 기절초풍하겠지.
마루의 직감대로 레티는 그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 변덕으로 살려준 애가 어떤 애인가 궁금해서 한번 다가간 것이었다.
한 요정이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마루에게 쫄래쫄래 뛰어왔다. 슬쩍 보고는 왜 저러는지 알아챈 마루는 양손을 비볐고, 마찰에 맞춰 불씨가 꽃가루처럼 터져나오고 이는 불꽃이 되었다. 따뜻한 불이 붙은 손이 요정의 꽁꽁 언 손을 감싸주었다. 벌겋게 변한 손이 분홍빛으로 돌아오자 요정의 얼굴도 편안하게 펴졌다.
이왕하는 김에 볼까지 따뜻하게 비빈 요정은 다시 동족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친구들이 참 많네. 그것도 요정 친구들이."
"이 주변에서 놀다 보면 요정들이 많이 오는 거 같아요."
"이 주변에서 논다면 넌 마을에서 사는 애가 아니구나? 마을 밖에서 사는 애는 또 처음 보네."
"사정이 조금 있어서...저기 하쿠레이 신사에서 신세지고 있어요."
"어쩌다가?"
"...그나마 이름 말고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집도 가족도 아무것도 못 찾아서 일단은..."
마루는 조금 망설였을 뿐 딱히 거부감 없이 말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자신의 기억상실 같이 씁쓸한 얘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많은 편이 아닐 텐데, 마루는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평생 덮어둘 수 있는 걱정거리도 아니고, 이렇게 누군가한테 털어놓았더니 조금은 편해졌다. 하지만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티는 위로를 담아 마루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울함에 잠겨 있던 마루는 현실로 다시 튀어나와야 했다. 레티와 얘기하느라 요정들한테는 제대로 신경쓰진 못했는데, 지붕에 올라타서 방방 뛰기라도 했는지 눈집들이 단체로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어제의 경험이 떠올랐는지 마루는 서둘러 눈 속에서 요정들을 꺼내올렸다. 레티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요정들에게 묻은 눈을 털어주면서 말했다.
"곤란한 친구들이네. 네가 울상으로 있는 걸 가만 놔두기 싫었나 보다."
"끙차, 대체 어떻게 놀았길래 이렇게 된 거야? 다들 다치진 않아서 다행이네."
요정들은 다치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눈가루를 뿌려대면서 꺄르륵거렸다. 이렇다 보니 놀라서 구해주는 쪽은 심각해질 수가 없었다.
구조 작업은 금방 끝이 났고, 무너진 눈더미만 남았다. 그런데 요정들은 아직 흥분이 덜 식은 것 같다.
눈을 뒤집어 쓰고 온몸이 허얘진 요정 하나는 뭔가 떠올랐는지 레티의 옷자락을 붙잡아 흔들었다. 요정들은 말은 없었지만 레티는 꽤나 눈치가 있었다.
"뭘 만들어주라고? 어떤 게 좋아? 눈사람?"
눈사람이라는 단어 하나에 요정들을 기름 부은 불길마냥 방방 뛰어댔다. 어쩌면 그 요정이 처음 생각한 건 눈사람이 아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일까.
요정들은 신이 나서는 마루와 레티의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겼다. 총 열 명이나 되는 인간, 설녀, 요정들이 만든 눈사람이라.
...
아까와는 달리 레티는 딱히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뽀드득뽀드득 뭉치기 좋은 함박눈 더미만 새로 만들어 줄 뿐, 구경만 하겠다면서 빠졌다. 이걸 뭉치고 굴리는 건 요정과 마루의 몫이었다.
요정들답게 눈덩이를 굴리는 것조차도 꽤 요란했다. 요정들은 반드시 단체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듯, 굳이 여럿이 함께 굴리려고 하다 보니 합이 맞지를 않아 누군가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왁자지껄 넘어지고, 다시 털고 일어나고. 단순히 눈을 굴리기만 하는데도 꽤 재미가 붙은 것까지 좋았다.
"잠깐, 몸통은 그렇다 쳐도 머리를 이렇게 크게 만들면 어떻게 올려 놓으려고?"
"이게 이렇게 컸던가? 왜 갑자기 커진 거 같은 기분이..."
분명 눈덩이는 적당한 크기로 만들었는데, 분명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굴리던 도중이었던가, 아니면 다 굴리고 난 후였던가. 두 눈덩이는 기억했던 크기보다 훨씬 컸다. 머리의 역할을 할 눈덩이가 마루의 키와 맞먹을 정도로.
요정들은 그러든가 말든가 눈덩이의 거대함에 신나 있었다. 방방 뛰면서 눈덩이를 에워싸고 있는게, 어린 아이들이 우상 숭배를 한다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요정들이 요정만의 방식으로 눈덩이에 무슨 짓을 한 건가?
"얘들아, 저것들 원래 이렇게 컸었어? 아까보다 커진 거 같지 않아?"
마루의 질문에 요정들 하나같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시치미 떼는 걸까.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아무튼 이렇게나 거대하면 눈사람으로 만들기가 곤란하다. 이렇게 큰 걸 들어올려서, 부서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른 눈덩이 위에 올려놓는 데 어느 정도의 힘과 정확성이 필요할까.
잠시 뒤 마루는 결심한 듯 손을 털더니 이 거대한 머리를 감싸안아서 붙잡았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듯 깊게 심호흡을 하던 중 다른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뭔가가 나타났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산들바람을 탄 듯이 날아온 안개 몇 줄기가 마루 주위로 모여들었다. 안개는 눈덩이와 부딪쳐 흩어지나 싶더니 그대로 솜덩이 같은 구름들로 변해 눈덩이를 감싸고 받쳤다.
그러고는 마루는 머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과 함께 눈덩이를 들어올렸다. 구름들은 하나하나 마루의 생각에 맞춰 균형과 힘을 보탰다. 단단히 붙잡은 악력과 불균형한 압력 때문에 눈덩이가 부서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솜털 같이 부드러운 구름이 제격이었다. 몸통 앞에 다다르자 마루는 허공에 발을 올렸다. 이번에도 구름들이 계단 같은 발받침을 이루면서 마루를 위로 올려보냈다.
마무리는 다른 이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요정들은 날면서, 레티는 서서 머리가 정확한 위치에 오도록 유도해주었다.
2미터를 넘는 아주 거대한 눈사람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마루야.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는데."
"후우, 뭔데요?"
"이렇게 엄청 무거운 거 들면 나중에 키 안 큰다?"
키가 안 큰다라. 마루는 숨을 고르는 와중에 후회감이 들었다.
나뭇가지로 팔과 얼굴을 꾸며주니 비로소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요정들은 팔을 쫙 벌려 눈사람을 안아보는 걸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러고는 요정들은 이 거대한 걸 만들고도 성이 안 찼는지 이것들 말고도 눈사람을 더 만들었다. 다행히 이번엔 마루가 힘쓸 필요가 없었다.
마루와 요정들은 자신보다 약간 작은 눈사람을 총 9개 만들었다. 인간과 요정은 오밀조밀하게 자신만의 눈사람을 꾸미고는 거대한 눈사람 옆에 세워놓았다.
크기나 생김새는 제각각이었고 얼굴은 삐뚤빼뚤하기도 했지만 다들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꾸며져 있었다. 이 화기애애한 무리에 대한 마루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눈사람 대가족."
...
과거의 선택은 다양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때 변덕 때문에 마루를 살려줬던 건 레티에게 있어 오늘 독특하고 재밌는 하루로 돌아왔다.
레티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난 이만 가볼게. 그 전에 마루한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조금 있는데."
"무슨 얘기인데요?"
"기억을 잃어서 생긴 빈자리는 친구들이 채워줄 거야. 저렇게 항상 웃는 네 친구들 생각해서라도, 잘 이겨내야 돼."
마루한테는 이 말이 크게 다가왔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고 익숙해지긴 했지만 기억 생각만 하면 자꾸 울적해졌다. 뭘 잃었는지도 모르는 상실감과 두려움에 울었던 예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부터 다른 이들이 이 공백을 채워주고 우울함을 달래줬다. 앞으로도 이런 은혜를 받겠지.
"네, 명심할게요."
"그래, 두 번째로. 밖에서는 친절해보이는 사람도 조심해야 돼. 요괴는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고, 무서우니까."
레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쳤다. 요정들과 마루는 벼락 치듯이 몰아친 돌풍에 모두 고꾸라졌고, 몇몇은 아예 날아가버렸다. 그 와중에 마루는 눈보라 너머로 사라져가는 레티의 그림자를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자 레티는 온데간데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눈밭에 엎어져 있었다. 마루는 그 돌풍 속에서 눈사람들은 하나같이 멀쩡히 있다는 게 신기했다.
긴가민가했지만 정말로 요괴였구나. 자기 같은 요괴를 조심하라는 충고을 듣다니. 마루는 오늘 참 독특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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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는 코타츠에 엎드린 채 쉬던 중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랐다. 눈집이 우르르 무너졌지만 마냥 웃기만 했던 요정들이 떠오르자 괜스레 웃겼다.
풋하고 웃음이 새어나오자 신묘마루가 물었다.
"마루는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
"히히, 글쎄요. 그냥요"
"어제는 엄청 속상해 하던데 오늘은 이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네. 응? 뭐라고?"
마루의 소곤거림을 들은 신묘마루는 제대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마루의 볼로 뛰어들었다. 대뜸 안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쑥스러워서 소근거린 것이었다.
월등한 크기 차이가 있긴 했지만, 신묘마루는 마루의 볼을 껴안고, 마루는 양손으로 그녀를 감싸는 걸로 포옹을 나눴다. 다시 소곤소곤 말이 오갔다.
"레이무한테도 안아달라고 할 거야? 쑥스러워서 말 못하겠어?"
"네? 어... 그러니까요..."
"맞네맞네. 그럼 내가 대신 말해줄게!"
신묘마루는 마루가 말릴 틈도 없이 쫄래쫄래 코타츠를 가로질러 달렸다. 따뜻함에 꾸벅거리던 레이무는 호다닥 달려온 신묘마루의 말을 듣고는 정신이 들었다.
얘기를 들은 레이무는 피식 웃더니 마루를 바라봤다. 애써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레이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예 마루 옆으로 다가갔다.
"나랑 포옹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
"그건 아니고요...그냥..."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쑥스러워서 목소리가 작은 거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실제로 마루는 조금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마루가 먼저 하지를 못하자 레이무가 먼저 팔을 벌렸다. 그래도 레이무는 마루의 낯가림이 그닥 섭섭하진 않았다.
"옳지옳지. 착하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굳 굳 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