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어디선가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분화구처럼 깊게 파인 산 정상 위, 그곳엔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작고도 여린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르실, 나보다 어리고 약한 꼬마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기가 잘못 들은 양 귀를 매만지며 아르실에게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땅꼬마 숙녀?”
자기가 물어놓고도 기가 찼다.
감히 이 몸에게 그만하라는 무례한 소리를 한 게 같은 이방인도 아닌 저런 꼬마라고?
남자의 물음에 아르실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곤 목청껏 자신있게 외쳤다.
“큼큼! 이 아르실님께서 너에게 명령한다! 당장 이 의미 없는 싸움을 그만두고 가온을 두고 가!”
차가웠던 첫 말과 달리 아르실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톤에 별안간 주위는 싸늘해졌다.
남자는 골 때리는 상황에 자기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넌 또 뭐냐, 겁 대가리라도 상실 한 거냐?”
“우리 가온 괴롭히지 말고, 어서 놔주라고!”
“하! 요즘 어린 것들은 하나 같이 겁이 없군, 예절 교육을 길바닥에서 배웠나?”
남자의 명백한 비아냥거림에 아르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르실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미르 언니처럼 밝게는 못 하겠네……그쪽이야 말로 더러운 입부터 닥치시지.”
남자의 위협에도 아르실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도발을 했다.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멍청아……도망쳐, 빨리.”
내 목소리에 아르실은 곧장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싱긋.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싱그럽고도 화사한 미소였다.
아르실은 내게 따뜻한 눈길을 주며 말했다.
“좀만 기다려, 금방 구해 줄 테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빨리 도망쳐.”
“바보야, 이대로 도망갈 거면 처음부터 오지도 않았어, 그보다 미르 언니는?”
“…….”
난 천천히 손을 들어 쓰러진 미르를 가리켰다.
쓰러진 미르를 보던 아르실의 입가에 작게나마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미소가 아닌 쓰러져서 다행이라는 미소.
잘못 보았나, 난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실은 미소를 천천히 거두곤 말했다.
“좋아, 내 생각대로 잘 되고 있네.”
“뭐?”
“헤헷, 우리 가온은 거기서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 적어도 너만이라도 여기서 구해줄테니.”
아르실은 당당하게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아르실에게 손을 뻗었다.
불꽃이라도 쏠 생각인가.
난 서둘러 외쳤다.
“피해!”
내 외침에도 아르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에게 걸어갔다.
남자는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아르실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건방진 꼬맹이는 내 불에 탈 자격조차 없다, 환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주지.”
“환상? 이방인은 마법을 못 배우지 않나?”
“별걸 다 알고 있군, 하지만 난 천재 중에 천재, 난 가능하다.”
“헤, 해보던가.”
능글거리는 아르실의 모습에 남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건방진 것,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무시하는 놈들 천지다.
감히, 감히 이방인 중 최강인 나 루 아케르를 이토록 천대하다니.
이 제국의 황제조차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늘.
단번에 끝내주마.
루 아케르는 망설이지 않고 환상 마법을 시전했다.
손에 마법진이 맴돌며 마법은 건방진 계집에게 적중했다.
웅!
건방진 꼬마 계집의 눈이 풀렸다.
마법은 제대로 먹혔다.
어떻게 고통을 줄까.
단번에 죽이는 걸론 성이 안 찬다.
스스로 손가락 마디를 하 하나를 꺾는 것부터 시작해주마.
“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라.”
“…….”
“꺾어라 어서.”
명령에도 계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지, 아까의 꼬마도 그렇고 환상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가 않는다.
다른 녀석들한테는 잘도 먹혔던 마법이 어째서.
“와, 이게 환상이라고? 진짜 마법은 허접이네 너.”
“뭐, 뭐야?”
환상 마법에 걸렸을 줄 알았던 계집은 멀쩡했다.
좋을대로 지껄이는 계집, 환상 마법이 안 먹히면 그대로 구워버리면 그만이다.
손에 힘을 모으고 불을 쏘려는 찰나, 계집의 눈빛이 변했다.
이질적인 기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계집은 차갑고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마법은 쓸 줄 모르지만, 적어도 진짜 환상이 뭔지는 알려줄 수 있지, 어디 한번 버텨봐, 내 환상을.”
후웅!
계집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차단되고 청각조차 차단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뭐, 뭐야.”
당황한 나머지 성급히 불을 일으키려 해보지만, 손에선 불길은커녕 연기조차 나지 않았다.
공허한 공간 속에선 능력조차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건 환상일 뿐이다.
전부 거짓, 버텨내면 이겨내면 풀릴 허상에 불과했다.
루 아케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자, 어차피 이건 환상이다, 어떤 것도 내게 해를 가하지 못해.’
“미, 미안해! 다음엔 꼭 가져올 테니 제발!”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공허한 공간 속 언제 생성됐는지 모를 한 교실이 있었다.
시야와 청각이 차단된 공간 속,
교실 안에는 한 패거리의 남학생들에게 얻어맞는 빈약한 체구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맞는 와중에도 애타게 빌었다.
“끄으으윽, 제, 제발 한 번만 봐줘!”
“웃기고 있네, 또 담임에게 꼰 지를 거지?”
“내가 말했을 텐데, 내일까지 오 만원 가져오라고.”
“달라는 돈은 안 주고 일러바치는 너 같은 새끼는 한번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려.”
남학생들은 인정사정없이 소년을 밟고 때렸다.
교실에는 이들 말고도 다른 학생들도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체 했다.
무관심과 가차 없는 폭력 속에서 소년은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악!”
비굴하고도 처절한 목소리, 루 아케르는 애써 외면했다.
외면하려해도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툭.
누군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다른 학생들에게 흠씬 맞고 엉망이 된 소년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도와줘……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젠장, 난 이를 악물었다.
저 더러운 손을 떨쳐내야 하건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빈약한 체구의 소년은 루 아케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돕지를 않는 거야, 너도 나잖아, 여기서 잘 나간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저 말에 대답하면 안 된다.
환상에 집착하면 더더욱 환상에 말려든다.
‘이, 이건 환상이다, 전부 거짓이라고, 난 저런 거 몰라, 난 저랬던 적 없었다고.’
“정말로?”
루 아케르의 귓가로 달콤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는 목소리에 사고가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정말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넌 저 장면을 알고 있어.”
“아, 아니, 난 모른다!”
“아니지, 아니야, 넌 알고 있어.”
감미로운 목소리는 계속 루 아케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
하지만 루 아케르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목소리는 그런 루 아케르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넌 알고 있지, 왜냐하면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네가 매일 겪던 일상이었잖아, 안 그래 찌질이 학생?”
“끄아아아아악!”
머릿속이 터질 듯 아팠다.
이건 전부 환상이다!
환상에 넘어가면 안 된다.
“시끄러! 난 저 새끼들의 빵셔틀이 아니라고! 난 저기 누워서 맞고 있는 멸치 새끼는 몰라!”
“어머, 난 빵셔틀 같은 단어는 언급도 안 했는데?”
“닥쳐!”
말을 하면 할수록 속삭임은 더욱 강렬해진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환상에서 벗어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고통, 그래 강렬한 고통이라면!
해결법을 안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일단 이 빌어먹을 목소리부터 못 듣게 해야 한다.
루 아케르는 자신의 귀를 손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투투둑.
“크아아아아악!”
아르실은 스스로 귀를 잡아 뜯어버리는 루 아케르를 보며 적지 않게 놀랐다.
“흐흥? 풀려날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미친 방법으로 풀 줄 이야.”
“끄으으으윽!”
스스로 귀를 뜯어버린 루 아케르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뜯겨나간 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회복되었다.
동시에 루 아케르는 정신을 차렸다.
환상 속에선 몇 분을 소비했지만, 현실에선 고작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흐른 시간의 감각을 느낀 루 아케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실을 노려보았다.
“크흐흐흐, 건방진 계집, 네년도 나와 같은 이방인이었나?”
수천이 넘는 이방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방인끼리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우연히 다른 한 명의 이방인을 만나는 것도 아닌 한 곳에 무려 세 명의 이방인이 있다니.
게다가 눈앞에 저 건방진 계집년의 능력은 흔하지 않은 능력이었다.
“네년의 근원의 감정은 보통 미친 게 아닌가 보군, 감정으로 얻은 능력이 그거라니.”
감정을 매개로 발동이 가능한 이방인들의 능력.
이방인들의 능력의 근원은 그에 걸 맞는 감정이 존재한다.
미르는 냉혹함이 근원인 얼음, 자신은 분노의 감정이 근원인 불꽃이다.
근데 저 계집의 능력은 환상,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농밀한 환상이다.
저런 능력의 근원이 되는 감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보통 내기는 아닌 건 확실했다.
하지만 역시 상대가 좋지 못했다.
루 아케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법 강한 능력이야, 내 급이 안 되는 애송이들이라면 먹혔겠지만, 이 몸에겐 안 통하지.”
“안 통하긴 개뿔, 덕분에 네 과거를 맛깔나게 볼 수 있었어, 여기선 최강의 이방인이라고 불려도 원래 살던 지구에선 찌질이었네?”
“닥쳐라!”
“게다가 이 능력을 저기 누워서 신음하는 바보 가온은 단번에 떨쳐냈다고, 노예인 가온보다 못하다니, 넌 진짜 형편없구나?”
“이 건방진 년이!”
분개하는 루 아케르는 손에 불꽃을 모았다.
계집이 쓰는 환상은 강하지만, 이미 자신은 한번 버텨냈다.
또 쓴다한들 이겨낼 수 있다.
다시 불을 쓸 수 있게 된 이상, 저 따위 계집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
어린 꼬마든 같은 세상에서 온 이방이이든 신경쓰지 않는다.
내 앞을 가로막거나 방해하는 모든 이들은 죽여야 마땅하다.
스윽.
루 아케르의 목에 거대한 도끼날이 갖다 대어졌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도끼날을 확인한 루 아케르의 입가가 굳어졌다.
건방진 계집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땐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이다.
자신이 환상에 걸린 그 몇 초 사이 다가왔다는 건가.
살며시 고개를 들자 그곳엔 루 아케르보다 체격이 큰 인자한 미소를 지은 노인, 핸슨이 있었다.
핸슨은 싱긋 웃으며 좋게 말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루 아케르 공, 여기서 멈추시는 게 어떠실지?”
“이 늙은이는 또 뭐……핸슨 경?”
“호오, 절 알고 계십니까, 고매한 이방인께서 제 이름을 알아주다니 영광입니다.”
“핸슨 경이 어째서 이런 촌구석에?”
루 아케르는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핸슨, 전 은빛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다.
황제의 직속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수많은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뛰어난 무력과 지휘로 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였다.
이방인인 자신도 익히 들은 그가 이런 곳에 있다니.
루 아케르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는 그만두고 황궁으로 돌아가시죠.”
“죄송하지만, 전 그 자리를 때려친 지 1년이나 되었습니다.”
“세간에 퍼진 소문으로는 황제께서 핸슨 경을 애타게 찾고 계신다고 합니다, 충의를 잊으신 건 아니죠?”
“하하, 충의라……애초에 황제는 그런 걸 신경 쓸 분이 아닙니다, 제가 돌아간다면 임무를 버리고 도망친 배신자로 절 죽이려고 하겠죠, 전 그런 생활은 질렸습니다.”
핸슨의 단호한 대답에 루 아케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소문과는 다르게 그냥 멍청한 늙은이군, 내가 좋게 대우해줄 때 물러났다면 목숨은 살려줬을 텐데.”
“허허, 곱디 고운 외모와는 다르게 말이 험악하십니다.”
“닥쳐, 늙은이, 마지막 경고다, 불 타 죽기 싫으면 당장 무기를 거둬, 저 건방진 계집을 태워버려야 하니.”
“그렇게 말하니 더더욱 안 되겠군요, 어디 좋을대로 해보시죠.”
화르르륵!
핸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 아케르에서 몸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은 물론 도끼의 날마저 녹일 강한 화력의 불꽃이다.
핸슨은 불길이 퍼지기 전에 빠르게 물러났다.
솟구치는 불길은 점점 더 커졌다.
집보다 아니 이 산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주위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르실은 엄청난 불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힘이 다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저만한 불을 쓸 수 있다고? 하여간 괴물 중에 괴물이야.”
“죄송합니다, 공주님, 방심했을 때 그대로 목을 쳤어야 했는데.”
“미안해 할 거 없어, 저건 어차피 죽여도 안 죽는 괴물이니깐.”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어떠실지.”
“아니, 난 가온을 구하러 왔어, 온 이상 끝은 봐야지.”
핸슨의 제안에 아르실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과 핸슨 둘이서 저 괴물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이야, 저 괴물 처음 봤을 때부터 상태가 이상했어.”
“네?”
“저것 봐.”
아르실이 가리킨 방향에는 거대한 불길 속에서 비틀거리는 루 아케르의 인영이 보였다.
아르실의 환상의 영향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었다.
“크으으윽.”
루 아케르는 목을 부여잡은 채 괴로워했다.
아르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쓰러진 가온에게로 달려갔다.
가온의 머리에 손을 대던 아르실의 입가엔 찢어질 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 가온이야, 항상 내 기대를 넘는 성과를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