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5일
여자가 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일주일 전 나는 기분 나쁜 상태가 지속되는 게 생리 때문인 걸 알고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완벽히 틀렸다. 설마 일주일동안 계속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거 완전 무섭지 않아? 일주일동안 가랑이 사이에서 피가 질질 흘리는 걸 느껴야 됐다고. 생리대가 축축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어째서 여자들에게 배려가 필요한지 알게 된 거 같기도 한데, 내가 겪는 건 역시 싫다. 만약 여자에서 남자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평생 이걸 겪어야 된다니 어떻게든 돌아가고 싶어졌다. 일단 생리도 끝나고, 지금 기분은 상쾌하다. 잘 됐구나 잘 됐어.
의문이 있다. 이런 오컬트적 현상에 대한 해결책이 있을까? 물론 내가 이렇게 된 이상 세상에 어떤 이상한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쩌면 나처럼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상경험자’가 수십, 수백 명이 될지도 모른다. 내 가설일 뿐이니 맹신하면 함정에 빠지는 거겠지만 일단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있다.
그런데 보름 쯤 되니 이제 슬슬 여자로서 적응해가는 것 같다. 생리야 어차피 원래 여자인 사람도 불편해 하는 거고, 후크도 잘 채웠고 부분 부분 적응 못 한 곳이 처음엔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고 말이야. 화장실도 여자 쪽으로 가고, 다리도 벌리지 않는다. 남자 모집할 때 무의식적으로 손들지도 않아! 역시 어느 주인공처럼 혜택이 있는 건가? 페널티도 있다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불쾌감의 원인이 생리란 걸 알고 나선 일어나지도 않고 있다. 뭔가 뭐든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안-녕!”
모여 있던 세 명이 내 인사를 듣고 굳어버렸다. 왜 저러는 걸까. 그리고 뒤돌아 수근대기 시작했는데 진짜 왜 저러는 거지?
“저 안에 있는 녀석은 지수가 맞는 건가?”
“능소능대하잖아. 쟤 왜 저래? 기분 나빠. 언제부터 저렇게 활기찼지?”
“그 전보단 낫지 않냐? 우중충한 것보다 낫잖아. 솔직히 ‘그날’일 때보단 훨씬 좋은데.”
“다 들려 이 자식들아!”
내가 말하자 그 세 명은 일제히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진짜 잘맞네 이 녀석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자리에 앉았다. 세 명 모두 내 옆인 유진이 자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다음 주말에 어디 놀러갈까 했다. 이제 곧 시험 준비 해야 되는데 좀 놀아야지.”
“내가 아는 너희 둘은 벼락치기형이었는데.”
“왜 영태는 안 넣냐?”
“양심이 있으면 영태랑 너희를 같은 부류로 하면 안 되지. 봐, 나는 너희 둘이라고만 했는데 알아서 영태 뺐잖아.”
유진이와 한태가 격렬히 반발했다. 왠지 한태는 더욱 반발하는 게 큰 것 같지만 넘어가자. 나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다. 왜냐하면 여자가 된 이후 애들과 어디 놀러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놀았을까?’
아무리 학교에서 평소대로라고 해도 여자인 이상 밖에서 노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여자여도 pc방에 같이 갈 순 있지만 대개 그런 건 극소수겠지.
“어디 갈 건데?”
“그걸 지금 고민 중이다. pc방은 가면 간편하고 좋은데 네가 안 되고, 농구를 하려 해도 네가 트라우마를 우리에게 남겨줘서 불가능하군.”
“저기, 내가 뭔 짓을 했었지?”
“기억 안 나? 굽있는 신발 신고와서 1분만에 부러트리고 발목을 삐었다.”
그건 나도 기억난다. 아니, 원래의 내 기억은 슬리퍼 신고 하다가 미끄러져서 발목을 삔 거지만.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체불명의 기억수정 엄청나잖아. 이런 세세한 것도 위화감 없이......아무리 생각해도 농구하는데 힐은 이상하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단도직입. 우리 모두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은 어디 있을까. 생각 중이야.”
내 입장이 매우 더러워졌는데?! 잘 놀 수 있는데 나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뭔가 짐덩어리가 된 기분이어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다르 게 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러나 결론이 나지 않는 듯 끙끙대기 시작했을 무렵 가장 나중에 참가했음에도 가장 먼저 지쳐버린 내가 두손을 들어버렸다.
“난 빠질래.”
“뭐? 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네가 귀찮은 게 아니다?”
“나도 알아. 노는 거에서 빠지는 게 아니라. 정하는 자리에서 빠진다고. 맘대로 정해줘. 나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나는 그 날에 아는 기쁨으로 남겨둘래.”
다시 세 사람이 돌아섰다.
“이상현상. 점집이라도 찾아갈까? 쟤가 진짜 지수인지 아닌지 물어볼 수 있게.”
“그럼 쟤를 데려가면 안 되잖나. 기각.”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 틈이 보이지 않겠냐?”
“다 들린다고.”
나는 순차적으로 세 사람의 머리에 수도를 날렸다. 딩동댕 소리가 나면 좋았을 텐데 역시 사람 머리론 불가능한 법이다. 머리를 부여잡는 세 사람을 뒷자리인 영태 자리로 쫓아내고 나는 교과서를 꺼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유진이가 지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잘 정했어?”
“다사다망했지만 뭔가 모르게 급박해져서 빨리 정해버렸어.”
“내 덕이네.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니중탁족이야. 시끄러. 전혀 네 덕 아니야.”
“그래서 어디로 정했어?”
“아, 그건 말이야.”
유진이가 대답하기 직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맨 앞자리인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빨리 자리 바꾸기날 안 오려나. 역시 앞자리는 불편하다. 뭐어 수업 끝나고 들으면 되니까 상관 없겠지.
라고 생각한 게 잘못됐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다시 물어보려고 했으나 끝나자마자 영태와 한태가 앞으로와 유진이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뭐야 이 상황!
“왜 그래! 궁금하단 말이야!”
“그 날의 기쁨으로 하겠다고 말한 건 너잖냐. 그러니까 그 때까진 비밀이야.”
“치사해!”
결국 그 날 하루종일 애들한테 어디로 갈지 알아보려 애썼지만 허탕만 쳤다. 대체 어딜 가서 날 놀라게 해주려고 저러는 거야? 오늘 집에 가선 일기장에 꼭 불평을 써주마. 그렇게 다짐했다.
일기에 무얼 쓸지 예상도 못하면서.
2019년 4월 17일
이상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상처가 생겼다. 어째서? 교복에 감춰지는 부위라서 티는 안 난다. 친구들에겐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다행이지만 다행이 아니다. 어째서 자고 일어나면 상처가 생기는 거지?
꽤 심해서 등은 너덜너덜 했다. 등에 손을 댔는데 피가 묻어나온다면 어떤 기분이냐하면, 그냥 끔찍하다. 그런 감상밖에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내 어휘력으론 표현할 수 없다.
끔찍하다.
이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머니가 침대를 보고 깜짝 놀라 나한테 물어봤지만 나는 실수로 코피를 흘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설마 자고 일어나니 등에서 피가 철철 났다는 건 생각도 못 할 것이다.
2019년 4월 18일
오늘은 상처는 없었다. 다만 방앞에 토사물이 흩뿌려 있었다. 하루하루 날 말라죽이네. 토사물은 누군가의 실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직 새벽이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토사물을 치웠다. 다행이야. 나와 집안의 이상현상은 나밖에 모르는 것 같으니.
2019년 4월 19일
다시 이상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한 지 겨우 사흘째. 내 정신력은 이렇게 약했던 건가. 나는 평소 베개를 껴안고 자곤 하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갈갈이 찢겨 있었다. 마치 맹수가 물어뜯어 놓은 것 같다. 나는 그걸 숨겼다. 어떤 부모라도 아들, 아니 지금은 아니었지 딸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단 걸 알면 걱정할 것이다. 걱정이라는 민폐를 굳이 끼치고 싶진 않다. 이미 학교 애들한테도 많이 끼쳤는데 가족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
필사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해야 돼.
수면을 제대로 취할 수 없었다. 자도 잔 거 같지 않아. 피곤하다.
2019년 4월 20일
동생의 잔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밥을 먹고, 등교를 한다. 평범한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만 제외되어 있다. 왜일까. 여자로 변해버렸다는 점에서 확실히 나는 일탈의 최고봉을 달리고 있지만, 이런 기괴한 일의 희생양까지 되고 싶진 않다. 애초에 난 가벼운 비행조차도 꺼린다. 일탈을 절대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의심할 수 있는 대상은 다름아닌 한집에 같이 살고 있는 가족이니까.
동생이 잔소리로 날 깨운다.-내가 못 잔 다는 걸 알고 비웃으며 저러는 걸까- 어머니가 밥은 먹고 다니라 한다.-아침부터 토사물을 보면 그럴 수 없다.-아버지가 요즘 일찍 출근하신다.-혹시 나한테 흉약한 짓을 해서 나랑 얼굴을 안 보려는 거 아닐까.-
미쳐버릴 거 같다.
오늘은 미리 꺼내 놓은 치마가 찢어져 있었다. 다행히 여벌 교복은 있으니 다행이었지만......망할.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내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 뭐가 돼도 좋아. 생존할 때다. 모레가 행동의 때다.
“내일이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태가 외쳤다. 뭔데 저리 기세가 높은 거야. 그 생각은 나랑 같은지 내 옆에 있던 영태와 유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오늘 하루는 많이 남았잖아. 뭘 벌써 들떠 있는 거야?”
“하지만 이번 학기에서 놀 수 있는 마지막 주말이야. 게다가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놀고. 신날 수밖에 없잖냐.”
천진난만하다 해야 할지, 그냥 노는 걸 좋아한다고 해야 될지. 하지만 그렇게 들뜬 한태를 두 사람은 좋게 보고 있었다.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만. 글쎄. 역시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 걸. 기분 전환이 될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나한테 숨길 생각이야?”
“내일 놀러 갈 장소 말하는 건가? 당연하다. 비밀이라고 비.밀.”
“참나, 그렇게 기대하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곳으로 데려가는지 볼 거다?”
“마부작침했다. 지금까지완 달라. 여성스러움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장소로 데려가주마!”
유진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그걸 꺼내면 이 자리가 부숴진다는 걸 난 알고 있다. 신나 있던 녀석들이 단번에 침울해지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
나는 싱긋 웃었다.
“기대할게. 너희들이야 믿음직스러우니까.”
한태가 흠칫 놀랐다. 왜 그럴까. 자신이 티나게 놀랐다는 걸 알아챘는지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영태와 유진이가 묘한 눈으로 한태를 쳐다봤다.
“뭘 봐.”
“아니, 설마 해서.”
“한태 너.....”
“그럴 리가 있냐!”
갑자기 자기들끼리 알아 듣지 못할 말을 한다. 뭐야 애들. “무슨 소리야?” “네가 알면 한태를 싫어하게 될 사실이다.” “아니라니까!” 한태가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부정했다. 대체 그 순간 남자들끼리 뭐가 통한 걸까. 원래 남자인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째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째서 얘네들이 무슨 생각인지, 그리고 왜 나는 같은 감상을 하지 못한 거지? 아니. 그야 우리는 베프이긴 하지만 일심동체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세 명끼리만 통하고 나만 안 통했다? 나는 장담한다. 내 모든 걸 걸고 그런 일은 남자였을 때는 전혀 없었다.
난 무심코 내 가슴에 오른손을 댔다. 여전히 적당히 부풀어 올라 있었다. 당연하다. 난 지금 여자니까. 원래 남자였지만 지금은 여자다. 몸은 여자인 것이다. 몸은. 그러니까 몸은 말이다. 응. 몸. 몸이야. 몸. 몸이라고. 몸만이야. 몸인데? 몸이잖아. 몸인걸? 몸이 틀림없다. 몸...
“지수야?”
“어?”
한태가 날 조심스럽게 불렀다. 유진이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날 보고 있었고 영태는 굳어진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정확하겐 떼어냈달까. 오른손이었다. 왜지? 영태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하는 것인가 지금.”
“너네가 쑥떡거리는 거 듣고 있었는데.”
“아니, 네 가슴께를 볼지 않겠나?”
“이제와서 나한테 성적 욕망이 생겼단 건 아니지?”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자리를 진정시켜 보려 한다. 영태가 말하고나서야 눈치챈 거지만 나는 가슴을 꽤 심하게 움켜쥔 모양이다. 약간 아프다. 셔츠는 볼품없이 주름져 있겠지. 한심하다. 한태는 허둥지둥 대고 있었고 유진이는 걱정스럽게 날 보고 있었다. 영태에 이르러선...
“그럴 리가 없잖아? 농담도 정도껏 해라.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별 일 아닌가 보군.”
“야, 김영태.”
유연하게 받아주었다. 굳은 표정도 풀린 지 오래이고. 내가 요즘 주변에 민폐 끼치고 있는 걸 걱정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걸까. 너는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 듯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착실한 것도, 사람 파악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마치 인생 2회차의 여유 같다. 그런 점이 그가 인기 있는 요인 중 하나겠지만 말이야.
한태는 납득하지 못하겠는지 영태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걸 유진이가 말렸다. 한태는 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놓았다.
이상하네. 나는 어느 쪽으로 행동하든 민폐를 끼쳐버리는 걸까? 이래선 발전이 없다. 훌훌 털어버려야지. 내 친구들에게까지 나만의 문제로 고통을 줄 순 없으니까. 나는 주름진 셔츠를 털어 펴고 박수를 짝! 쳤다.
“난 수업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열심히 계획 짜고 있으라고!”
나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지수가 나갔다. 수업 시작하기 전이라니. 아직 점심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 우린 그런 줄 알고 들어줘야지. 하지만 우리끼린 이야기 해야 한다.
“영태야, 요즘 지수 이상하지 않아?”
“확실히 꽤나 지쳐 보이네. 너희 지수 눈밑 다크서클 봤어?”
“지수 진짜 걱정되는데 어떻게 할 방법 없을까?”
목불인견이다. 고민하는 영태를 보고 난 한숨을 쉬었다. 쟤조차 어떻게 할 줄 모르겠으면 어쩌란 거야. 한태는 이런 문제에서 도움되는 건 논외이고.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보통 학교란 작은 사회에서 친구는 가족보다 가까운 게 보통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부대끼다 보면 가족에게도 부끄러운 일을 친구 앞에선 태연히 하는 게 학교란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그게 소꿉친구라면 말할 것도 없다. 우리들에게 숨기는 일이 있다면 정말 큰일일 것이다.
한태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10년지기잖냐? 고민이 있으면 말해주면 좋을 텐데.” 나는 그 말에 동감했다. 우린 서로간에 알 거 모를 거 전부 알고 있었다. 간단한 예시로 당장 이 반에서 지수가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걸 아는 것도 우리들 뿐이다.
“역시 타인이란 테두리를 못 벗어나서일까?”
“그걸 벗어나면 이미 한몸이지. 그래도 저렇게 초췌할 정도의 일인데 아무 상담도 안 하는 건 이상하지 않냐? 막말로 우린 걔 등에 점 있는 것도 알 정도 잖아. 숨길 게 뭐가 있어?”
“영태야, 한태가 작년에 바다 갔을 때 알아챈 걸 무척 이상하게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밟히고 싶나.”
“자, 장난이잖아! 으악!”
갑자기 딴길로 쭉 새버린 한태를 우린 질겅질겅 밟아주었다. 이런 때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얘는. 격한 응징을 실행한 우리는 다시 본제로 되돌아갔다.
“사실 이렇게 애기하곤 있지만 뚜렸한 방법은 없다. 우리가 캐묻는다고 생각해봐. 걔가 대답해 주겠나?”
“간단명료, 절대 아니지. 오히려 관짝까지 가져갈 가능성이 높지.”
“그럼 어떻게 해?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아니지. 우린 ‘내일’이 있다.”
격화소양 아닐까. 나와 한태는 미심쩍은 눈으로 영태를 바라봤다. 우리가 정한 곳은 사실 정말 별 거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번도 안 간 곳이니 지수한테 당당했던 것뿐이지.
“......그걸로 사람 마음이 열린다면 세상의 심리상담사는 사라져야 할 텐데?”
“딱히 거기서 지수의 고민을 완전히 파헤치자는 건 아니다. 그래도 대화하기엔 딱 좋은 곳이잖아?”
“괜찮을까?”
“괜찮고 말고를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친구로서 최선을 다하자. 라는 거지. 그래도 역시 처음부터 그러면 절대 마음을 열 리 없으니까 초반엔 우리도 생각 없이 놀아보자.”
영태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지수만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즐겁자고 놀러가는 거다. 아닌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지수한테도 그런 정신을 탁! 일깨워 주자고.”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태는 아직도 걱정이 많나 보다. 염려스러운 표정을 아직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괜찮을까? 그거 말고 우리가 지수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더 찾아보는 게 낫지 않아?”
한태의 염려도 당연하다. 하지만 영태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조급하면 될 일도 안 되잖아. 시험 시간에 자주 그렇지 않아?”
영태가 한 말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겪었을 일이다. 역시 시간이 얼마 없다고 급하게 풀다 보면 맞을 문제도 틀리는 일이 많지. 지금 상황도 그렇다고 영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놀랍다. 아직 같은 고등학생이고 같은 18살인데. 어떻게 저리 침착할 수 있을까? 친구지만 가끔씩 존경심이 들 때도 있다.
“다 상의 했어?”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 우리는 뒤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손에 묻은 물을 털며 다가오는 지수가 보였다. 의외로 한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이지. 기대해도 돼, 지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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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간만에 제대로 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