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조용히 언덕 위에서 홀로 앉아 있는 꼬마 짐꾼이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양 어린아이답지 않은 무거운 표정을 짓곤 있지만, 꼬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감독관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름도 과거도 모르지만, 자신이 돈까지 쥐어주며 유일하게 잘해주었던 꼬마였다.
나이도 어리고 사리분별도 못할 테니 잘 꼬드기면 자신의 훌륭한 고기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감독관은 가식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꼬마 옆으로 다가갔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꼬마가 둘러 쓴 목도리가 나풀거렸다.
감독관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꼬마의 목도리를 칭찬하면서 다가왔다.
“좋은 목도리구나, 부모님이 짜주신 거니?”
감독관의 목소리를 들은 가온은 고개를 돌렸다.
가온의 눈빛은 정말 어린아이답지 않은 썩은 동태 눈깔 같았다.
가온은 잠시 입을 다문 채 감독관을 응시하더니 짤막히 말했다.
“전 부모님이 없어요.”
“아, 아앗, 미, 미안하게 되었구나.”
예상치 못한 가온의 말에 감독관은 심히 당황했다.
힘든 짐꾼 일에도 묵묵히 하는 것부터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다고는 생각했지만, 부모가 없었다니.
의도치 않게 아이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 셈이었다.
가온이 노예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감독관은 꼬마가 자신을 미워할까봐 서둘러 다른 주제로 돌렸다.
“큼큼, 짐꾼일은 힘들지 않니?”
“요 며칠 간 여기서 쉬기만 했잖아요, 힘든 건 없죠.”
“아하핫, 그, 그렇지.”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 저기 좀 보세요.”
“응? 저기?”
가온의 말에 감독관은 최대한 경청해주는 척 했다.
자신의 고기 방패가 되어줄 녀석이니 최대한 잘해줘야지.
감독관은 가온이 가리킨 곳을 따라 바라보았다.
가온이 가리킨 곳에는 자유해방단원들이 모인 진지가 있었다.
가온은 그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자유 해방단원들의 수가 처음 출발할 때 보다 열 명은 줄어들어 있어요.”
“뭐 정찰 갔다가 몇 명 죽었나보지, 이 숲은 위험하단다, 아차하면 숲의 짐승들이 널 물어뜯으러 올지도 몰라.”
감독관은 가온을 놀래 키려고 일부러 과장된 제스쳐까지 취했다.
하지만 가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쳇, 재미없는 녀석, 하지만 숲은 진짜로 위험하다고?”
“아니요, 여기서 지내는 내내 짐승 같은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음? 그러고 보니 이 숲은 위험한 짐승들이 많다 들었는데 도통 보지를 못했네.”
가온의 말에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짐승을 보지 못했어도 최소한 밤에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 정도는 들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짐승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감독관을 보며 가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자유 해방단원들의 표정들을 보세요.”
“표정들은 왜?”
“다들 표정들이 죽어 있어요, 죽은 사람 마냥 초점을 잃었다고요.”
“그거야, 정찰 임무 도중 동료가 죽은 것도 있고 우리 대장이 막 대하니 표정이 죽은 거겠지.”
감독관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런 위험한 임무에선 개개인의 감정은 억눌러지게 된다.
억눌러진 사람의 감정은 딱딱하게 굳은돌처럼 속내가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명령만 따르게 된다.
나름 임무 경험이 많은 감독관은 이번에야 말로 여유롭게 말하며 가온을 안심시켰다.
“원래 이런 격한 임무에선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이란다.”
“저런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요?”
“음? 뭐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거…….”
감독관은 가온이 가리키는 쪽으로 재차 고개를 돌리다 입을 다물었다.
가온이 가리킨 곳에는 정찰 임무 도중 팔 한 쪽이 날아간 자유 해방단원이 있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붕대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지만, 다친 자유 해방단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다른 자유 해방단원들도 죽은 눈으로 돌아다니면서 다친 동료의 상처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흘러나온 피가 땅에 떨어지며 붉게 적실 정도로 심한 모습이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절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다친 건 그 자유 해방단원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자유 해방단원들이 부상을 당했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이들은 없었다.
가온은 다시금 물었다.
“저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요?”
“어, 어음, 저건 좀 심각한데, 정찰 임무 중 뭔 일을 당했길래.”
감독관은 턱 끝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 해방단원들은 기사단원들보다는 약해도 하나하나가 수준급의 용병들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씩 다니는 이들이 저렇게 다쳐서 올 정도라니.
심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감독관에게 가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알게 되겠죠.”
“이제부터?”
가온의 말에 감독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온의 환심을 얻으려고 다가간 감독관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독관은 가온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다.
가온은 고개를 갸웃하는 감독관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하튼 정찰 임무가 시작되면 제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이 어린 녀석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게 잘해줬다? 그쪽이 자기 이득을 위해 다른 짐꾼들의 화를 제게 돌린 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게 친근한 척 다가오는 것도 절 고기방패로 세우려는 의도겠죠.”
“커, 커흠?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뜨끔했는지 속내가 들통이 난 감독관은 움찔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가온은 감독관이 놀라든 말든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찰 임무 도중 무슨 일이 생기면 제 곁으로 오세요, 살고 싶다면 말이죠.”
“으윽, 난 널 감독하는 감독관이다, 명령은 내가 내리고 넌 내 명령에만 따라야 한다!”
“헛소리 작작하라고,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무, 무슨.”
어린 가온이 반말까지 하며 위협을 하지만, 감독관은 화를 내기는커녕 말을 더듬었다.
감독관은 서늘한 가온의 눈빛에 오금을 지렸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지만, 뿜어내는 기세는 귀족보다 더 강렬하고 매서웠다.
가온은 서늘한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 내 쪽으로 와, 그럼 살려는 주지.”
“크윽, 꼬맹이 녀석이.”
“놈이 온다, 준비해.”
“놈이 온다고?”
감독관은 가온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부장 막심, 짐꾼들을 이끌고 정찰할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감독관에게 다가온 막심은 옆에 있는 가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감독관과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감독관, 준비는 되었지?”
“아, 넵, 물론입니다.”
“짐꾼들은 내가 통솔할 테니 자네는 내 옆에 붙어있기나 하게, 응? 옆에 있는 소년은?”
막심은 그제야 가온을 발견했다.
막심은 가온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그래, 우리 원정대에 어린아이 한 명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들었던 것보다 훨씬 어리군, 소년의 이름은 뭔가?”
“……가온입니다, 나으리.”
“흠, 가온? 괜찮은 이름이군.”
막심은 가온의 예의바른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감독관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에게 대할 땐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대했는데 막심에겐 하인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얌전했다.
감독관은 속으로 가온을 욕했다.
‘뻔뻔한 자식.’
대놓고 욕을 못하지만, 감독관은 가온에 대한 적개심을 품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품으면서도 감독관은 가온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 꼬마는 대체 뭐하는 꼬맹이야?’
애당초 저렇게 어린 녀석이 목숨이 위험한 이 임무에 지원한 것부터 이상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들어온 건가.
평범한 꼬마가 아닌 건 분명했지만,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부장 막심의 지휘에 따라 짐꾼들은 정찰 임무를 시작했다.
정찰 인원은 짐꾼 전원과 부장 막심 그리고 자유 해방단원 중 멀쩡한 두 명을 뽑아 호위까지 총 열 세 명의 인원이었다.
호위로 참여하는 자유 해방단원은 눈이 완전히 풀린 채 죽어 있었다.
두 호위를 보는 짐꾼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괜찮은 거 맞아? 팔에서 피가 좀 흐르는 거 같은데.”
“죽은 거 같아, 소문으로만 듣던 좀비도 아니고 저게 뭐야.”
“가다가 우릴 물어뜯는 거 아니야?”
“야 농담도 무섭게 하지 마.”
짐꾼들의 웅성거림을 막심은 무시한 채 당당히 외쳤다.
“잡소리 말고 출발하도록!”
푸석 푸석.
며칠 동안 눈이 내린 숲은 눈이 닿는 어디든 하얀 눈이 쌓인 그야말로 백색의 세상이었다.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고 지천에 널린 나무들조차 눈에 쌓여 처음부터 백색의 자작나무인 것 마냥 순백으로 보였다.
눈은 끝없이 내리며 세상을 하얀 색으로 물들이겠다는 듯이 내리고 또 내리는 중이었다.
푸석 푸석.
눈은 사람들의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많이 쌓여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쌓인 눈 때문에 걷는 게 힘든 건 물론, 행군에 익숙지 않은 짐꾼들은 넘어지기 까지 했다.
성인인 짐꾼들이 이정도니 가장 나이도 어리고 체격이 작은 가온은 눈이 허리까지 쌓일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걷는 건 둘째 치고 눈이 끝없이 내리니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행군에 지장이 생겼지만, 막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짐꾼들을 지휘했다.
“움직이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그렇게 느려가지고 뭘 하겠다고!”
“으으, 나으리 좀 봐주십쇼, 저흰 짐꾼에 불과합니다, 이런 눈길을 헤치고 가기는 힘듭니다!”
“못 가겠다면 여기서 나한테 죽어라.”
“허, 허억, 가, 가겠습니다!”
막심이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자 못 가겠다는 짐꾼은 서둘러 움직였다.
걷는 것도 힘들지만, 정찰 임무 자체의 위험을 걱정하는 짐꾼들도 많았다.
“나, 나으리,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 두 명의 호위만으로 괜찮은 겁니까? 이전부터 이 숲에는 무서운 것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괜찮다, 요 며칠 간 자유 해방단원들로 하여금 정찰을 돈 결과 이 숲에 위험한 건 없다.”
“그, 그렇습니까?”
“그래.”
짐꾼들은 막심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높은 하룬가의 인물이 직접 한 말이었다.
짐꾼들은 힘들지만, 부장 막심의 말을 믿고 힘을 내 걷는 중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막심이나 따라온 자유 해방단원들이 지켜주겠지.
그러나 짐꾼들 모두가 이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행렬 뒤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감독관은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 숲이 안전하다고? 그럼 자유 해방단원들은 왜 열명이나 줄어들고 다들 부상을 입은 거야, 분명 누군가와 싸웠을 텐데.”
감독관의 중얼거림은 누구도 듣지 않았다.
힘이 없다는 걸 들키고 난 감독관은 이미 짐꾼들 사이서 왕따 취급이었다.
감독관은 자신에겐 신경도 안 쓰는 주위 짐꾼들을 보며 짜증을 냈다.
“망할 자식들, 지들 목숨이 위험한 줄 도 모르고.”
감독관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보다 상급자인 막심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만, 이번 정찰 임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걷기도 힘든 눈 내린 날에 이렇게 행군이라니, 이래서는 이방인의 흔적은커녕 가다가 길을 잃을 판이었다.
이건 정찰 임무가 아닌 마치 자신들을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정찰 전 꼬마 녀석의 말을 들어서 인지 감독관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저 막심이라는 놈을 계속 믿고 따라가도 되는 건지 원.’
마음이 조급해진 감독관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온을 찾으려 이동했다.
그런데 꼬마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다.
높이 쌓인 눈 속에 파묻히기라도 한 걸까.
끝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불안한 눈으로 계속 두리번거리던 감독관의 한 손이 당겨졌다.
“어, 어엇, 뭐, 뭐여?”
“쉬잇.”
감독관의 손을 잡아당긴 건 높게 쌓인 눈 속에서 튀어나온 가온이었다.
체격이 작아서 눈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가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눈으로 범벅이었다.
마치 눈 속에서 튀어나오는 은 여우마냥 작고도 하얀 모습이었다.
잠시 당황했던 감독관은 가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젊었을 적 결혼해 자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저 건방진 성격이 문제지만, 성격만 빼고 겉으로만 보면 어리고도 귀여운 꼬마다.
가온을 싫어하지만, 어리기 때문일까,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가온의 눈으로 범벅인 머리를 털어주었다.
가온은 딱히 감독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그가 눈을 다 털어주기까지 기다렸다.
털어주던 감독관의 손길이 가온의 목도리에 다다르자 가온은 갑자기 격하게 반응했다.
“그만, 나머지는 제가 할 게요.”
“흠? 뭐 그래라.”
가온의 이상한 반응에 감독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가온이 스스로 눈을 터는 동안 감독관은 자연스레 물었다.
“눈 속에 파묻혀서 뭘 한 거냐?”
“여러 일들을 했죠.”
“말해줄 생각은 없고?”
“때 되면 말해드리죠.”
가온의 당당한 대답에 감독관은 말문이 막혔다.
기껏 자신이 눈까지 털어줬는데.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자식.”
“칭찬 감사합니다.”
가온은 언제 눈 속에 파묻혔나는 듯 행렬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뻔뻔한 가온의 행동에 감독관은 말문이 막혔지만, 질책하거나 가온의 개인행동을 막심에게 일러바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정찰 임무가 지속되는 동안 감독관이 믿을 구석은 가온뿐이었다.
감독관은 슬그머니 가온에게 다가가선 자비로운 사람 마냥 말했다.
“큼큼, 그동안 널 이용한 건 미안하게 되었다, 서로 잘못한 건 잊고서 친해지는 건 어떠냐?”
“……같잖은 소리 말고 얌전히 걷기나 하세요.”
“끄응.”
“그러고 보니 당신 하룬가 사람이었지요, 물어볼 게 좀 있는데.”
가온의 물음에 감독관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온의 환심을 얻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감독관은 뭐든 물어보라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게 뭐냐, 우리 위대한 하룬가에 대해 알고 싶은 거냐?”
“피와 죄로 얼룩진 가문의 위상 따윈 알고 싶지 않네요.”
“하여간 건방진 녀석, 넌 나 같이 착한 사람을 만나서 다행인 줄 알아야 해,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감독관의 말에 가온은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하고 싶은 질문을 까먹었을 리는 없고 하려는 질문이 보통 질문이 아닌 듯 했다.
입을 다물던 가온은 결심이 섰는지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감독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우릴 이끄는 막심이라는 작자에 대해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