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기 치다 걸림
그것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드러난 새하얀 속살이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다. 긴 속눈썹이 수줍은 듯 자꾸 눈을 감추려 든다. 차디찬 바람이 지나가자 그것이 휘날린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속살이 드러난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용기를 낸다. 별 빛이 은은한 밤하늘 아래서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악마님, 제 탈모를 고쳐주세요!”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난 치명적인 뱃살라인이 인상적인 이 중년남성은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악마인 내가 할 일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안타깝군.
그도 그럴게 이 남자는 1분 뒤에 죽는다. 어느 저승사자에게 들은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고작 빈다는 소원이 탈모치료라니. 물론 이 중년 아저씨는 자기가 1분 뒤에 죽을 걸 모른다. 알았다면 다른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 이 남자는 진심이다. 악마소환 의식에 대한 정보와 도구들을 비싼 값에 사서 실행하기까지, 그리고 정말로 나타난 악마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소원을 빌기까지 엄청난 돈과 용기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빈 소원은 그것을 되살리는 것.
영혼을 대가로 그것을 원한다는데 그것 보다 더 바라는 게 있을 리 없다. 나는 진지하게 이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어떤 헤어스타일로 해드릴까요, 고객님?”
“땅에 닿을 만큼 길게 해주세요!”
잘 들었다고, 아저씨의 유언.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서둘러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저씨의 그것이 살아나면서 무럭무럭 자란다. 결국 그것이 땅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쓰러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웬 젊은 남성이 그를 찌른 것이다. 아저씨가 이렇게 살해 될 거란 것도 저승사자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인이 어찌됐든 그가 곧 죽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에게 악마 의식에 대한 정보를 흘렸고 그는 걸려들었다. 이렇게 하면 아저씨 같은 계약자에게 약속받은 영혼을 바로바로 수거할 수 있다. 내 상관인 사탄의 눈을 피해 이런 짓을 한 지도 천 년이 지났다. 사실 나뿐만이 아니라 몇 몇의 악마들이 나를 따라서 그렇게 한다. 이제껏 걸린 악마는 없다.
“살려주세요.”
“너 같으면 살려주겠냐?”
아저씨의 말에 그를 찌른 남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그 남성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 남성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게 부탁하는 것이다. 계약자가 아니라서 내가 보이지 않은 그 남자는 아저씨가 헛소리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 멍청한 남자는 아저씨의 머리가 갑자기 자라난 것도 비싼 발모제를 써서 그렇다고 멋대로 믿고 있다.
어차피 이 아저씨가 죽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대답했다.
“무슨 고객님은 영혼이 두 개 세요? 영혼을 줘야 소원을 들어주죠. 그런데 이미 영혼 하나는 탈모 고치는데 썼잖아요.”
“당신은 천사잖아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가 피 묻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리킨 건 내 머리 위에 떠다니는 도넛이다. 인간들은 이걸 천사 고리라고 부른다.
“고객님, 미안하지만 난 천사가 아니에요. 7년 전에 천사는 다 뒈졌거든요. 덕분에 우린 일이 두 배로 늘었고.”
2012년 12월 21일 세계종말설이 떠돌던 그날 신은 죽었다. 천사들은 신과 같이 딸려 나오는 증정품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신을 따라서 죄다 멸종했다. 신과 할 일을 나눠서 하던 사탄은, 그리고 천사와 할 일을 나눠서 하던 악마는 이 일을 계기로 위기에 처했다. 쉽게 말하면 그 미친놈들이 죽으면서 우리에게 일을 다 떠넘긴 거다.
내가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이 도넛이 그 증표다. 천사와 악마는 그 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악마들이 도넛을 하나씩 달고 있다. 그 놈들이 왜 죽었는지, 왜 오지랖 넓은 사탄이 천사들의 일을 도맡자고 했는지, 왜 이 도넛은 도넛 맛이 안 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린 좇 됐고, 사탄은 조금 덜 좇 됐다는 것이다.
“그럼 전 지옥 갑니까?”
갑자기 아저씨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아저씨가 죽고 그 혼이 빠져나온 것이다. 아저씨의 혼은 내가 소원을 들어준 대로 머리가 땅 바닥에 닿는 장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솔직히 영혼까지 걸 만큼 그게 가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못생겼다.
“고객님은 제게 영혼을 파셨으니 저희 악마들의 노예가 됩니다. 안 그래도 인력난이 심한데 저희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동료 분이신가요?”
무슨 소리인가 하고 돌아서니 거기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존재가 있었다. 내 상관인 사탄이다.
사탄 얼굴의 코가 있을 자리에 있는 역십자가 모양의 구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고객님, 저는 그의 상관인 사탄이라고 합니다. 지금 고객님께서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데 이 문 열고 들어가셔서 상담원에게 이름 말하시고 대기해주세요. 거기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갑자기 사탄의 옆에 문이 생겨났다. 아저씨가 문을 여는 시늉을 하자 곧바로 문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이곳엔 시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살인마, 머리 뿔 꼭대기까지 화나있는 사탄, 조금 곤경에 처해있는 악마가 남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사탄이 다 알고 나를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기 쉬는 시간에 나를 찾아올 위인이 못 됐다.
아니나 다를까 사탄은 그 얘기를 꺼냈다.
“당신이 뭘 잘못 하셨는지는 아시죠?”
머슴처럼 생긴 주제에 엘리트 코스를 타고 자라온 사탄의 말은 항상 존댓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화나 있는 상태에도 존댓말을 쓸 줄은 몰랐다.
“모르겠는데요, 하나님.”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마라 했죠. 그리고 시치미 떼지 마십쇼. 사실 제가 다 알고 찾아왔다는 걸 당신도 아시잖습니까?”
“제 동료들이 불었습니까?”
내가 지금 언급한 동료들은 나와 똑같이 이 사기 행각을 저지르는 동료들을 말한다. 그들도 저승사자 역할을 하는 악마들에게 뇌물을 주고 곧 죽는 인간들의 정보를 얻어왔다. 그렇게 일찍 죽는 인간들을 자신들에게 소원을 빌게끔 유도하고, 영혼들을 거두어 실적을 쌓은 것이다. 실적에 따라 나오는 돈으로 게임기도 사고 옷도 사고 내친김에 차도 샀을 것이다.
“사실 당신들이 그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탄의 눈을 쳐다봤다. 한 쪽 눈은 그 위의 근육이 내려 앉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한 쪽 눈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내 상관이 허세를 부리는지 표정으로 파악하는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그 말이 허세라는 건 알고 있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사탄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그것보단 조금 늦게 알아차렸죠. 그래도 조기에 알아차리긴 했어요.”
“그런데도 묵인하신 거네요?”
“아시다시피 7년 전부터 우리 악마들 인력이 딸리잖아요. 그래서 당신들이 저지르는 부정을 조금 이용하기로 했죠.”
“그런데 이제 와서 따지시는 이유가 뭡니까?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오셨으면 돈이 다 모여서 제 집을 샀을 거라고요.”
“지금 상관 앞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모은 돈으로 집 사겠다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마 아닐 걸요.”
사탄은 역십자가 구멍에서 손을 넣어 커다란 검을 꺼냈다. 마치 그 모습이 마술사가 재롱 부리는 모습 같아서 재밌게 감상하다가 꼭 재밌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검에 묻은 용암을 보고서야 이 양반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실감했다.
나는 두 손바닥을 보이며 내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요, 제가 제 집 장만하겠다고 부정을 저질렀고, 그 주제에 사탄님께 까불었네요. 진정하시고 그 콧물 묻은 검 좀 넣어두시죠.”
내 말에 이 악마 자식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 베여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건 없었지만 정말 아프다는 건 확실히 말해둬야 할 것 같다.
“젠장, 종이에 베인 것만큼 너무 아파요!”
“고통에 거의 무감각하신 분이 엄살은 심하시네요. 그리고 이건 콧물이 아니라 당신들이 절 속 썩일 때마다 몸에 축적된 천불입니다. 지압마사지보다 건강에 좋을 걸요.”
이 미친 악마 새끼는 마치 검을 채찍처럼 계속 휘둘러댔다. 악마는 아무리 베여도 상처는 없지만 고통은 생생이 느낀다. 내가 최후의 수단으로 두 손을 비비며 머리를 조아리고 빌자 그제야 검을 제자리에 넣었다.
“이제 얌전히 제 얘기 듣는 겁니다?”
“네.”
“사실 이 인력난이 해소되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면 그때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일이 터졌어요. 현자가 이 일을 알아버린 거죠.”
“그 영감탱이가요?”
나는 놀래서 소리 질렀다.
악마들에게 사탄이 있고 천사들에게 신이 있듯이 인간들에겐 현자가 있다. 인간들은 그 영감탱이의 존재를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인간들의 대표다. 우리처럼 죽지도 살지도 않는 어중간한 상태의 존재로 신이나 사탄을 붙잡고 괴롭히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신이나 사탄이 저지르는 잘못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서 트집 잡고 그걸 구실로 부려먹을 생각만 하는 망할 노친네다.
“현자는 당신들이 부정으로 착취한 영혼들을 당장 해방시키라 명령했어요. 결국 그들을 제 갈길 보냈고, 저는 그 다음 현자가 요구하는 걸 들어줘야 했죠. 그게 당신들 처형하는 거랍니다.”
나는 도넛을 내 머리 위에서 끌어내려 씹기 시작했다. 스트레스 받을 땐 당이 최고다. 비록 도넛에선 시금치 맛이 났지만 식감은 좋았다.
처형은 악마들 사이에선 도넛과 같은 하나의 은어다. 악마가 죽는 일은 천사가 죽는 일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천사는 정말 죽어버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처형이라는 은어의 의미다. 악마들에게 처형이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의 고문을 말한다. 즉 내 앞엔 사탄의 콧물 묻은 검보다 더 괴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한다.
사탄은 헛기침을 하고 얘기를 이어 갔다.
“안 그래도 많은 영혼을 해방시켰는데 당신들을 고문하면서 붙잡고 있을 수는 없죠. 인력난이 심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손이 닳도록 빌면서 다른 요구사항을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뭐라 합디까?”
“당신들이 부정으로 착취한 영혼들이 1억 명입니다. 그 1억 명의 영혼들은 사실 죽기 직전에 소원을 성취해서 그 소원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죠. 그러니 그 1억 개의 소원을 무료로 들어주라고 하더군요.”
나는 도넛을 씹다가 멈췄다. 반 바퀴 돌리고 다시 씹으니까 씹을 만해졌다.
“우리보고 그 해방된 1억 명의 영혼들이 환생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 그 한 명 한 명의 소원을 다 들어주란 말씀입니까?”
“그런 말은 안 했거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당신들보고 하라고 하지도 안했어요.”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기뻐서 펄쩍 뛰었다. 가끔 옛날 감성으로 이렇게 기쁨을 표현하는 일은 우리 악마들 정서에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 말이에요. 말했지만 인력난이잖아요? 그러니 가장 부정을 많이 저지른 당신이 책임지고 그 일을 하는 거죠.”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도넛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도넛은 다시 내 머리 위로 돌아와 내가 씹을 때 묻혔던 내 침을 내 머리 위로 흘렸다.
“윽, 당신 역겨운 거 알아요?”
“말씀 계속해주시죠.”
“사실 현자가 이번 일을 트집 잡은 것은 원하는 게 있어서예요.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원하는 건 한 여자에게 1억 개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에요. 그것도 공짜로요. 제가 봤을 땐 당신이 그 여자에게 붙어서 삽질하는 걸 당분간 구경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흔쾌히 받아들였죠. 그 여자의 이름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