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도열해 있는 군대를 향해 외쳤다.
“랠리 숲의 위치를 알았다! 바로 출발 할 테니 잘 따라오도록!”
“넵!”
언뜻 보아도 천 명이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군세, 군사들이 휘두르는 깃발에는 하룬가의 상징인 뱀과 칼이 교차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방인 하운드를 잡기 위한 하운드의 추가 토벌군이었다.
토벌군들은 살며시 잿더미가 된 마을을 보았다.
큰 마을은 아니더라도 백여 명은 사는 규모의 마을을 이방인 둘이서 단 몇 분 만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일반병들은 잡담을 떨며 두 이방인의 힘과 잔혹함을 두려워했다.
“어, 엄청나긴 하군, 조, 조금 무섭기도 하네, 이방인들은 다 저렇게 살벌한가.”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저렇게 막 죽여도 되는 거야?”
“불꽃 채찍이 마을을 한 번에 휩쓰는 거 봤어? 길이도 자유자재로 늘어나던데.”
“닿기만 해도 살이 녹아버리는 채찍이라니, 저분들이 우리 대장이라 다행이야.”
일반병들의 잡담을 하면서도 최대한 조용하게 말했다.
자신들의 대화가 저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 들렸다간 잿더미가 된 마을처럼 죽을 것이다.
이 군대가 출발한지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수십이 넘는 병사들이 저 두 이방인에게 죽었다.
죽은 이유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냥 눈 한 번 마주쳤다고 죽이거나 대답한번 잘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하룬가에 머물며 여러 악행을 저지른 하룬가의 병사들조차 이들의 광기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병사들은 이런 잔학한 이방인들의 행위에 확신했다.
저들은 태생부터 그냥 미친 자들이다
지금 불타는 리앤 마을을 파괴한 이유?
하룬가의 보호비를 받지 않는 해충들을 박멸한다는 이유는 핑계일 것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죽이고 싶어서 한 게 분명했다.
사람을 사람보다 못한 짐승 취급하는 게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들에게 목숨을 잃지 않고 싶다면 쥐 죽은 듯이 하라는 명령을 따르며 이번 토벌이 빨리 끝나기를 빌어야 했다.
모든 병사들이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딱 한 사람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군대 행렬 선두에 선 왜소해 보이는 체구의 한 남자가 두 이방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방인 두 분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진군하지 않고!”
“…….”
“어서 진군하지 못해?”
왜소한 체구의 남성은 주춤거리는 병사들에게 칼을 뽑아든 채 위협했다.
“빨리 안 가면 내가 직접 목을 치겠다! 그러니 어서 가!”
왜소한 체구의 남성은 높이 치켜 든 검도 제대로 못 드는지 팔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약해보이는 남자가 입은 갑옷에는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룬가의 기사단 중 하나인 늑대 기사단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배불뚝이어도 강했던 하워드에 비해 단장은 툭 건드리면 쓰러질 듯 것 같은 왜소한 체구였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늑대 기사단 단장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런 약골이 대장이라니, 젠장 이번 원정 괜찮은 거 맞아?”
“어차피 이방인은 같은 이방인이 잡아주겠지, 저 약골 대장은 있으나마나한 놈이야.”
“약이랑 여자에 빠져서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진짜일 줄이야, 저러다간 부단장한테 단장 자리를 뺏기겠네.”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따라야겠지.”
아무리 약해보여도 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 직위에 선 자의 말에는 권위와 힘이 담겨 있었다.
병사들은 늑대 기사단 단장의 명령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군하는 병사들을 보며 늑대 기사단 단장은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이번 토벌에서 제대로 공만 세우면 돼지 같은 부단장은 내 자리를 넘보지 못할 거야.”
매일 하룬가에서 약에 취하고 여자를 안으며 시간을 보내던 늑대 기사단 단장.
그로인해 몸이 망가지고 폐인소리까지 들으며 직위가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 토벌 원정에서 공을 세우면 자신의 단장 자리는 안전해질 것이다.
“망할 하워드 놈, 감히 자기 먼저 공을 세우겠다고 내 부하들을 데리고 뛰쳐나가?”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진다, 자신이 어떻게 가꾼 기사단원들인데, 그걸 몽땅 데리고 가다니.
생각하면 부단장말만 믿고 뒤따라간 기사단원들도 괘씸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킬킬거리는 늑대 기사단 단장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가느다란 손이 올라갔다.
“허, 허억?”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단장의 시야에는 아름다운 구릿빛 피부의 미인이 서 있었다.
여성은 싱긋 웃으며 독설을 내뱉었다.
“어머, 놀라는 모습 봐, 너무 추한 걸?”
“아, 카, 카시아님이셨군요.”
단장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여성에게 예를 표했다.
이번 원정의 핵심 전력인 이방인이니 만큼 단장은 이방인 카시아에게 아양을 떨어댔다.
“아까 전 외성 바깥의 마을을 파괴하신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두 분의 위업을 하룬가는 높게 평가할 것입니다.”
“쯧, 쓸데없는 칭찬이나 하기는.”
단장의 가식적인 칭찬에 카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짓는 카시아의 모습에 단장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룬가에서 많은 여자들을 안아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처음 보았다.
이국적인 외모와 나풀거리는 화려한 옷 사이로 드러나는 몸매.
이방인만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려고 했을 것이다.
이 생각을 들켰다간 단번에 목이 날아가겠지만, 단장은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방인이라 해도 어차피 같은 인간, 언젠가 내가 이 가문의 가주가 된다면 저 건방진 계집도 내 것이 될 거야.’
지금 당장 이방인 앞에선 주인님 모시듯이 굴지만, 단장의 검은 속마음은 이 여자를 갖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룬가를 통솔하는 가주의 명령에는 이방인들조차 꼼짝 못한다.
그래, 가주, 가주만 된다면 못할 게 없다, 지금보다 더 큰 쾌락을 얻으며 평생 살 수 있을 것이다.
불타버린 리앤 마을에서 출발하고서 한 나절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다.
랠리 숲까지 가는 데 남은 거리는 절반.
숲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면 갈수록 눈으로 덮인 평원에 초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목이라고 하기는 뼈 밖에 남지 않은 메마른 나무들이 다였지만, 목표 지점까지 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던 두 이방인 중 카시아는 따분한 행군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주우우운, 나 잠깐 놀아도 돼?”
“또 병사들을 죽이려고?”
“죽이는 게 아니라 군의 기강을 잡는 거지.”
“기강은 무슨,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이려는 거겠지, 더 죽이는 건 안 돼.”
카시아의 요청을 준은 딱 잘라 거절했다.
준의 단호한 거절에 카시아는 볼을 부풀이며 교태를 부렸다.
“주우우우우우운?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진짜로 심심해 죽겠다고.”
“저들도 우리 전력이다, 더 죽여서 좋을 게 없어.”
“날 파리 같은 것들이 전력이 되겠어? 그리고 준도 죽이고 싶잖아?”
“…….”
카시아의 말에 정곡을 찔린 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준을 보며 카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능력을 쓰는 이방인들은 능력을 쓰면 쓸수록 능력에 잡아먹히며 원초적인 본능이 드러난다.
저 굳게 닫힌 투구 속에서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처럼 살육 본능이 튀어나기 직전의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카시아는 준의 두꺼운 갑옷을 톡톡 건드리며 자극했다.
“한번만 하자?”
“……이방인 하운드는 어떤 녀석인지 아냐?”
“에이,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화제 돌리기야?”
“같은 이방인끼리의 싸움이니 조심해야지.”
준의 말에 카시아는 볼을 부풀이던 걸 그만두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새침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몰라, 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방인이라는 것 외에는.”
“늑대 기사단 단장은?”
“저 약골 호색한이 뭘 알겠어? 랠리 숲에 있을 거란 정보만 듣고 움직인 거지, 설마 하운드라는 이방인한테 쫄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준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같은 이방인이 상대라 해도 이쪽은 수가 둘이다, 설령 혼자 싸운다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이방인 중에서도 강한 이방인이니깐, 옆에 있는 카시아와 함께 수많은 적들을 도륙해오고 압도해왔다.
이곳 세계가 아닌 전에 있던 지구에선 온갖 핍박을 당하며 살아왔지만, 이 세계에선 자신이 주인공이다.
이 세계에서 최강은 자신이다, 준은 그렇게 확신했다.
딸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작지만, 맑은 소리, 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응? 준 갑자기 왜 멈추고 그래?”
“소리 못 들었나?”
“소리?”
카시아는 방울 소리를 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앞서 걸어가던 두 이방인이 멈춘 걸 보고 뒤따라오던 단장은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고 있으십니까?”
“방울 소리가 들렸다.”
“방울 소리요?”
준의 말에 단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울은커녕 다른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숲길이었다.
딸랑!
그때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전과는 다르게 이번엔 분명하게 들렸다.
준뿐만 아니라 카시아와 단장 그리고 뒤에 있던 다른 병사들에게까지.
스윽.
“크르르르.”
그리고 어두운 숲 길 사이로 거대한 뭔가가 나타났다.
하얗고 빛나는 백색 갈기를 가진 거대한 늑대, 외형은 분명 짐승이지만, 짐승답지 않은 자채와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짐승의 목에 달린 빨간 방울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딸랑!
갑작스러운 거대 늑대의 출현에 병사들은 당황했다.
“뭐, 뭐야, 저 커다란 늑대는?”
“뭐가 저렇게 커, 사람보다 큰데?”
“마차 수레보다 큰 놈이야.”
“랠리 숲에 저런 위험한 짐승이 살고 있었나?”
거대 짐승의 출현에 두려워하는 병사들과는 달리 두 이방인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저런 큰 짐승이 이 세계에선 흔한 건가? 재미있군.”
“그건 아닐 걸 준? 뒤에서 벌벌 떠는 날 파리들 표정 봐봐, 희귀종이라도 되는 걸까?”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두 이방인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늑대 기사단 단장은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두 이방인에게 점수를 딸 기회라고.
어차피 자신과 병사들로선 이방인 하운드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저 커다란 짐승을 잡고 두 이방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번 원정에서 자신의 공을 더욱 높이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두 이방인에게 말했다.
“두 분께선 걱정하지 마십쇼, 저런 짐승은 저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단장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늑대 기사단 단장으로서 그리고 이 원정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내린다, 지금 당장 저 눈앞에 천박한 짐승을 잡는다!”
단장은 그렇게 말하며 무기를 든 채 자신이 가장 먼저 앞서 달려갔다.
“가자! 저 짐승을 죽이러!”
“우오오오오오!”
“우와아아아아!”
겁먹고 도망칠 줄 알았던 단장이 나서니 병사들도 자연스레 힘을 얻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든 채 저 멀리 있는 짐승을 노려보았다.
그래, 아무리 크고 무서워보여도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
병사들은 힘을 얻고 단장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자신을 따라 달려가는 병사들을 보며 단장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좀만 뛰다가 슬쩍 빠져야지.’
병사들의 기세를 세워주기 위해 앞서 달리고는 있지만, 결코 싸울 생각은 없었다.
검 하나 쥐기도 힘든 자신에게 싸움은 이제 먼 이야기였다.
좀만 더 뛰다가 달려가는 병사들 틈 사이에 껴서 옆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자신이 빠지고 짐승과 싸울 병사들의 목숨?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자기 목숨만 보전하면 될 일이었다.
멀리 있는 짐승까지 달려가려면 한참 걸리니 좀만 더 뛰자.
‘못해도 몇 십 미터나 되는 거리인데 저 짐승이 바로 올 리가…….’
사박.
거대한 짐승이 발을 떼며 움직였다.
“응?”
달려가던 단장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저 멀리 있던 짐승은 분명히 한 발자국을 움직였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게 무슨?”
벌어진 일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짐승의 앞발은 앞장 서 달려가던 단장의 몸을 살포시 짓눌렀다.
콰직!
살포시 누른 거 치곤 핏물이 거칠게 사방으로 튀었다.
뒤따라가던 병사들은 우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앞에서 용맹하게 뛰어가던 대장이 한순간에 죽어버렸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닌 토마토 터지듯이 터져버렸다.
얼어붙은 병사들은 싸울 생각은커녕 도망갈 생각도 못한 채 우뚝 서서 눈앞에 늑대를 바라보았다.
거대 늑대는 방금 밟아 죽인 시체를 쓰레기 치우는 것 마냥 저만치로 던져버렸다.
거대 늑대 아니 이방인 하운드는 얼어붙은 병사들에게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 하운드, 이방인, 살고 싶으면, 꿇어라, 전부.”
딸랑!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