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픽시브를 둘러보던 중 발견한 소전 동인 소설입니다
다른 글도 재밌지만 제가 자스타바를 좋아하기도 하고
재밌는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허락을 받고 번역 해봤습니다
출처는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1666825
입니다
참고로 읽기전에 알아두면 좋은 설정이 있는데
자스타바는 손톱마다 전부 색이 다를만큼 네일 아트를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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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s M21 단편, 내일의 데이트보다, 오늘의 저를
"자, 도착 했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앞 유리에서 눈부신 빛이 들어와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조수석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다. 졸다니 이상하네, 라고 생각하며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운전석 쪽으로 돌렸다.
젊은 여성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처진 큰 눈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잠이 부족한 듯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어깨까지 늘어진 갈색 머리칼이 작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 이 사람은 나의 지휘관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인데 판별에 시간이 걸려버렸다.
자다 일어난 것과 그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핀의 빨간 제복이 아니라 연갈색 울 롱코트를 입고 있다.
"지휘관님, 음 저기... 여기가 어디죠?"
"하하, 아직 잠이 덜 깼어? 베오그라드야. 약속했던 데이트 하러 왔어. 빨리 가자."
데이트 약속? 그런 말을 들으니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휘관을 따라 차에서 내린다.
차에서 내리니 돌 바닥길의 고풍스런 거리였다. 길 양 옆에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근대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건물에 자리한 상점도 많이 있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것을 보고 관광객을 위한 번화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베오그라드예요? 우리 기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귀중한 휴일을 이동에 할애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와 지휘관 부대는 철혈의 최전선에 배속되어 있다 .그것도 격전지이다.
우리 인형은 물론 지휘관들도 밤낮없이 계속 일한다.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은 좀처럼 없다.
"왜냐면, 너의 고향이잖아?"
"음, 분명히... 저는 세르비아의 총입니다. 하지만 제조사는 다른 곳인데다, 그건 총 이야기이고, 제 출신은 I.O.P지만 말이에요"
지휘관에게 손을 이끌리며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내가 세세하게 설명하자 그녀는 뭐가 재미있는지 쾌활하게 웃었다.
뭐, 싫은 것은 아니다. 일부러 지휘관이 시간을 내서 데려와 줬고, 단둘이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다.
부대에 있을 때는 다른 인형들도 있고 지휘관도 바쁘다. 모처럼의 기회라면 즐기는 편이 합리적이다.
"어때? 뭔가 느껴지지 않아? 이 나라와 각인으로 맺어진 네 총의 기록이 반응하지 않아?
"어떻냐고 물어도요... 각인은 어디까지나 총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기 위한 기술로,
총과 제조국의 역사에 대해서 일일이 익히거나 하지 않아요. 애초에 무기에 감상이 필요한가요?
감정은 다양한 행동에 제약이 됩니다. 병기인 전술인형에 탑재하는 것은 실용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여전하구나. 너무 현실적이라니까.”
반박 당했는데도 지휘관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말하고 나서 이것은 몇 번이나 되풀이된 문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잡아당기던 손을 놓고, 내 얼굴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
“게다가, 인간성이 없다면 이런 일도 할 수 없잖아? Zas는 이것도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그건... 합리적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요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내민 왼손 약지에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도 같은 모양의 반지를 하고 있다.
나와 지휘관은 서약한 사이다. 단순한 인형과 지휘관이라는 관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반지를 받아주겠냐고 물어봤을 때의 진지한 표정,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인간과 인형이라니, 그녀가 앞으로 고생할걸 알면서도 나는 받아들였다.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기뻤으니까.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자, 가자. 모처럼의 데이트니까 재미있게 놀아야지."
내가 인간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안심했는지 지휘관은 활짝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지도도 보지 않고, 마치 익숙한 거리를 걷는 것처럼 인파 사이를 쓱쓱 헤쳐 나아간다.
이미 데이트 계획을 세워 놓은 것 같다. 평소보다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몸을 맡기기로 했다.
나와 있을 때의 지휘관은 활기가 넘쳐 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도착한 곳은 네일 전문점이었다. 고풍스런 거리 풍경에 맞게 외관은 수수했지만,
현대적이고 실용적 디자인을 한 가게 안에는 알록달록한 작은 매니큐어 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런 가게에 온다면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입을 꾹 누르고 작게 웃었다.
하지만 내 취미를 잘 알고 있다. 싸구려가 아니라 전문 아티스트가 사용할 만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좋은 느낌의 가게네요"
"그렇지? Zas랑 오고 싶었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새로운 색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나의 네일 아트는 모두 다른 종류다. 처음에는 차이를 설명해도 지휘관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와 맺어지고 나서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전선에 있으면 외모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도 매니큐어를 발라주기도 한다.
선반 위의 향기로운 도료를 음미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작은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머리 색과 비슷한 하늘색 매니큐어. 비슷한 색은 갖고 있지만 이건 내 머리와 꼭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에 든다.
“이게 좋겠어요. 맑고 아름다운 색이네요. 이 제품은 처음이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지휘관에게도 발라줄까요?”
지휘관에게 보여주려고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입을 꾹 다물고, 고통을 참는 듯한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알아채고 그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건 억지 웃음이다. 알고 지낸 지 오래돼서 알 수 있다.
“응, 예쁜 색이네. Zas의 머리칼을 닮았어. 나도 칠해볼까?”
"...지휘관?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무것도 아냐. 그럼 계산 하고 올게."
지휘관은 별 말없이 매니큐어를 포장해 달라고 점원에게 말하러 갔다. 방금 건 뭐였을까? 비싼 것을 골라서? 하지만,
이 가게에 있는 것은 모두 고급스러운 물건뿐인데. 아니면 그저 잘못 본걸까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팔을 잡아 끌며 거리를 걷는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바쁜 걸음걸이였다.
여유롭게 쉴 수 있을 정도로 휴가가 충분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세련된 부티크였다. 명품 브랜드 전문점처럼 보인다.
은은한 빛이 비치는 가게 안에 고급스런 옷이 전시되어 있다.
"묘하게 기세가 좋네요."
심중을 더듬어 볼 겸 그렇게 말했다. 딱히 지휘관이 돈이 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안 쓴다. 단지, 맘대로 고급스런 가게로 끌고 올만한 사람도 아니다.
"기지에 있으면 돈을 쓰질 않으니까 모이기만 할 뿐이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걸로 사. 허세를 부린 멋쟁이 Zas가 보고 싶어."
"하아... 전 언제나 멋 부리는데 신경 쓰고 있지만요. 알았어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점내를 둘러봤다. 심플한 디자인부터 정교한 디자인까지, 다양한 의복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모두 가격 비싸 역시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사양하는 것도 실례가 된다고 생각해서 가격표를 보는 것은 그만두었다.
나는 흰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실크 같은 부드러운 촉감이 손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등에 학 날개 같은 장식이 멋지게 늘어져있다. 원피스를 들고 조심조심 지휘관 쪽으로 향한다.
"지휘관, 저는 이게 좋아요."
"좋은걸 골랐네. Zas가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 입어 보는 게 어때?"
지휘관은 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아까는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에게 이상한 느낌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보며 점점 표정이 느슨해진다.
“보기만 하지 말고 더 제대로 칭찬해주세요”
“아하하, 미안 미안. 이대로 입고 갈래?”
"아니요, 더럽혀 버릴지도 모르니 원래 옷으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계산을 하기 위해 점원에게 갔다. 원피스는 접혀서 세련된 종이봉투에 들어갔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방문해 주시기를...."
봉투를 건네줄 때, 점원의 영업용 미소가 흐트러졌다. 표정이 굳어지면서 의아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보았다.
지휘관이 곧바로 가게에서 나가버려서 나도 따라나갔다. 뭐였을까 그 표정은.
인형에게 값비싼 옷을 사주는 사람이 신기한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서로 한 쌍의 반지를 끼고 있고.
그래서 그런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별일 아니다. 더 이상 생각해도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생각을 중단했다.
잠시 거리를 거닌 뒤, 우리는 쉬기로 했다. 전통음식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고 지휘관이 안내했다.
그녀는 역시 일정을 다 정해둔 듯이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다. 거리가 보이는 테라스석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여기 말이야, 세르비아 요리를 먹을 수 있대"
"음... 세르비아 요리는 처음 먹어보네요."
메뉴에는 본 적 없는 요리 이름만 춤추고 있다. 지휘관에게 어떤 것으로 할 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슬픈듯한 눈으로.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떤 걸로 할까, 고민되네."
지휘관은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메뉴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뭔가 숨기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반지를 선물한 사이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일 거야. 그런데도 숨기는 일이 있다니. 답답하고, 불안해서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굴라쉬라는 요리로 정했다. 고기 조림이란 뜻인 것 같다. 내가 결정하자 지휘관도 그걸로 하겠다고 했다.
요리되어 나온 것은 토마토로 붉은 색을 낸 걸쭉한 스튜였다.
푹 삶은 돼지고기와 양파가 들어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이 느껴지는 맛이 난다.
우리는 식사하는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지휘관은 침울하고, 울적했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뭔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도저히 요리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진흙탕이라도 먹는 기분이다.
요리를 겨우 치우고 식후 커피가 서빙 된 뒤에도 지휘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컵에는 손을 대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검은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지휘관,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거짓말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어요. 모처럼 하는 데이트니까 즐기자고 말한 건 당신이에요.
당신이 그런 모습이면 전 전혀 즐겁지 않아요.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야기는 해줬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래도 지휘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흐른다. 가슴속에서 어떤 의심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의심은 확신에 가까운 것으로 바뀌었다. 탁자 위에 양손을 올려놨다.
“지휘관도 네일 아트 실력이 늘었네요. 처음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최근에는 즐기고 있잖아요. 저와 같은 취미를 가져줘서 기뻤어요.”
지휘관은 눈만 움직여 내 손톱을 보았다. 조금 있으면 감정이 드러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한눈에 알아채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직 멀었네요.
여기, 약간 얼룩이 있거든요. 저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아요. 제 손톱, 지휘관이 칠했군요.
내가 말하자 지휘관은 어깨를 움찔했다. 들어올린 얼굴에는 조바심과 슬픔이 뒤섞여 있다.
그녀와 마주하는 순간 확신했다. 가슴에 찬 낙담덩어리를 그대로 한숨과 함께 내쉬었다.
"...그런가요.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죽은거죠?"
지휘관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괴롭혔는지 이제야 이해한다. 낙담과 조금 분노가 섞였다.
“지휘관은 너무 잘 속아 넘어가네요. 방금 건 거짓말이에요. 얼룩 같은 건 없었어요.
네일도 잘하는걸요, 제가 가르쳤으니 당연하지만요.”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를 계속 보고 있다. 내 거짓말에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였다
“전 죽어버린 거네요.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어요.
데이트를 약속한 기억은 애매하고, 당신은 슬퍼 보이고... 전사한 저를 백업으로 복원하셨군요. 그런데 ...그래서요?”
아무래도 나는 죽고, 복원된 것 같다. 그건 알겠지만 지휘관이 그렇게 심각해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부대는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죽음은 일상이다. 철혈에게 당하고, 백업으로 복원된 동료는 많이 있다.
마인드맵 데이터를 남겨 두면 기억도 경험도 돌아온다, 그것이 인형이다. 인간과 인형은 죽음에 대한 무게가 다르다.
복원된 내가 눈앞에 있는데 우울할 이유가 없다 고 생각한다.
“Zas,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복원은 완벽한 것이 아니야. 마지막 백업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신체로 되돌아가는 거야.
기억, 감정, 인격, 마인드맵의 데이터는 너무 복잡해. 복사된 데이터는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열화 돼.
복사본의 복사를 반복하면 더욱… 정신에 치명적인 결함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
“그래서 숨긴거에요?”
“네가 충격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충격이요? 전 전술 인형이에요. 싸우는 게 일이니까 죽을 수도 있어요. 복원은 겁나지 않아요.
충격이라면 이렇게 당신이 저에게 숨기는 편이 훨씬 더 상처 받겠네요.”
“미안해....”
지휘관은 가냘픈 목소리로 사과했다. 확실히 나는 상처 받았다.
마치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보다도 열악하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다.
“제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아닌가요?
저의 죽음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서 말이에요... 분명히 말해 주세요. 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나요?
인형이라고는 하지만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조잡하게 조작된 기억을 삽입하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요. 이건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잖아요”
"그래... 맞아. 당신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일곱 번째야. 그 때마다 백업에서 복원했어.
당신의 정신은 열화가 시작되고 있어. 중대한 버그가 생길 수도 있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과연 충격을 받을 만 하다. 대놓고 면전에서 정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일곱 번 죽었다는 사실도. 나는 한번도 죽은 기억이 없다.
“혹시 제가 죽을 때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나요? 이 거리에서, 같은 데이트를....
그래서 제 취향이 변화하고 있지 않은지 체크하고 있었나요.
제가 다른 저로 변해버린 건 아닌지, 당신이 알고 있는 저로부터 벗어난 건 않은지...
허용되는 건 어디까지인가요? 매니큐어까지 인가요? 요리? 다른 옷을 고르면 저는 제가 아닌 건가요?”
지휘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통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지휘관이 익숙하게 나를 이끈 것도, 그 점원이 우리를 의아한 눈으로 본 것도.
분명, 나는 몇 번이나 저 원피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매번 같은 인형과 인간이 같은 옷을 사가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제 기억에 손대는 것은 조금... 아니, 꽤 화가 나네요. 절 시험하다니, 이런 반지까지 건냈으면서 저를 신뢰하지 않는군요.
제가 '저'와 연속된 존재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아닌가요?”
지휘관은 완전히 식은 커피잔에 시선을 떨구고 입을 다문 채였다. 화가 치민다.
감정과 인간성, 내 안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그대로 부인 당한 것 같아 괜스레 화가 났다. 그걸 긍정한 건 바로 당신이잖아.
“당신에게 있어서 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인가요? 서약했을 때 당신이 말했잖아요.
저는 단순한 도구도 무기도 아니라고. 전 당신의 소중한 존재라고.
그건 거짓말이었나요? 뭐 어쩔 수 없죠. 인형은 어차피 인형, 인간과 대등한 입장이 될 수 없으니까요.”
지휘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놀라웠다.
최대한의 모욕을 할 셈이었다. 화낼 거라 생각했지만 지휘관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격무 속에서도 인형의 사기 관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반지를 건네주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째서.
생각에 잠겼다가 겨우 깨달았다. 분명, 이것과 같은 말을 이전의 "나"도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나서, 어떻게든 그 표정을 바꾸게 하고 싶어졌다.
어휘를 파헤쳐서 내가 말할 것 같지 않은 매도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의 나도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바보 같아져서 그만두었다.
“만약 제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면 어떡할 건가요? 버릴 건가요? 아니면 초기화?
이번의 저는 어땠어요? 못 쓰겠다면 다른 편리한 인형을 찾아 드릴까요? 반지 돌려드릴까요?
다음 인형에게 그대로 건네줄 수 있도록..."
"그만해!"
내가 반지를 빼는 시늉을 하려고 하자 지휘관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깜짝 놀라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던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할 수 있을 리가...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걸 보는 게 무서웠어.
하지만, 당신을 포기할 수도 없어. 내 마음대로 한 것은 사과할게, 미안해.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마."
"죄송해요, 말이 너무 심했어요..."
급격히 화가 식으며 후회가 마음에 가득 찼다. 나는 지휘관에게 내가 ‘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속된 존재이고, 이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고 인정해주길 바랬다. 그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끌고 싶었다.
“맞아, 난 네가 죽음을 겪을 때마다 똑같은 데이트를 반복하고 있어.
변해가는 당신을 보는 것은 두려워. 하지만 얼마나 변했는지 있는지 알고 싶었어.”
“하지만 매니큐어나 요리 고르기 같은 걸로 그걸 알 수 있나요?
뭘 고를지는 계절과 날씨,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다를 텐데요. 신뢰할 수 없어요.”
그런 사소한 일로 나를 판단하지 않길 바랬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Zas, 매니큐어 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음... 투명하고 깨끗한 색이라고 했습니다만..."
“내가 새로운 색깔을 시도해 보라고 해서 그걸 골랐지. 갖고 있지 않다고.
그건 새로운 색이 아니야... 당신은 이미 갖고 있어 손톱에 바르기도 했지. 내가 너에게 선물했어.
너의 머리색을 닮은 아름다운 색이니까. 너도 예쁘다고, 좋은 향기라며 왼쪽 새끼손가락에 자주 발랐어.
나에게 발라준 적도 있어..."
"..."
"아까는 뭐라고 했지? 세르비아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고. 아니, 있어.
나는 전투에서 돌아온 너와 동료들에게 굴라쉬 요리를 해준 적이 있어. 너의 출신국의 요리라고 들어서...
그다지 잘하진 못했지만, 넌 좋아한다고 말해줬어. 좋아하는 거라고... 그 뒤로 몇 번이나 만들었지. 때로는 둘이서...."
"그랬었군요..."
나는 입가에 손을 얹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잊을 리가 없다. 금방 생각날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거야?"
지휘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냘펐다. 나에게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조인다.
기억 났다. 저 매니큐어는 지휘관이 서약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에 사온 거다. 그녀는 기념이라고 말했고 난 호들갑을 떨며 웃었다.
지휘관이 기뻐할 거라 생각해서 네일을 새로 칠했다. 생각대로 그녀는 기뻐했고, 그 후로 계속 그 매니큐어를 사용했텐데...
굴라쉬도 기억이 났다. 철혈의 공세가 있어 우리 부대도 동원되었다.
심한 피해가 발생한 격전으로 일주일이 넘어서야 부대로 복귀했다. 지친 우리들을 지휘관은 직접 만든 요리로 맞이했다.
덜 익어서 딱딱했지만, 그녀도 잠을 자지 않고 일부러 만들어준 사실이 기뻤다.
여태껏 먹어본 요리 중에 최고로 맛있는 요리였다.
둘 다 소중한 추억인데. 어째서 기억이 안 났을까? 그래서 지휘관은 그렇게 슬픈 얼굴을…
잊은 것도 아닌데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의 인격과 기억은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변해가고 있었다. 죽음과 복원을 반복함으로써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휘관을 바라본다. 그녀는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지휘관, 저와 함께 있는거 괴로워요?"
"그렇지 않아...!"
“만약 힘들어서 견딜 수 없을 때에는, 절 복원하는 것은 그만두세요. 원망같은건 하지 않아요.
저를 어딘가에 묻고 그대로 잊어주세요.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생물은 없으니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계속 함께 했잖아 ... 널 잊어달라니… 그럴 수는 없어..."
“인형은 죽어요. 총을 맞으면 부서져요. 전쟁을 위한 일회용 기계니까요. 언제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전투에 부상은 따르기 마련이고, 죽어버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철혈은 언제나 전력에서 앞서있고, 철혈 엘리트 인형을 만나면 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대신해 싸우고, 인간을 대신해 죽는다. 그것이 전술인형입니다. 알잖아요, 지휘관이니까.
우리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은 당신이에요..."
지휘관은 침묵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사실은 보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명령이야. 전력이 부족해.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철혈은 계속 몰려와. 널 보내지 않으면 더 큰 참사가 일어날 거야.”
“지휘관은 언제나 진지하니까요.”
날 전투에서 빼고 진짜 인형처럼 간직할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동료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
최전방에서 살아가는 인형들은 끊임없이 죽고 살아난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외를 만들면 안 된다.
인형들의 사기를 관리하는 면에서 그녀는 우수한 지휘관이었다.
“당신도 삐뚤어진 사람이네요. 그리핀의 지휘관이니까 인형을 전투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돼요.
하지만 인형과 서약 같은걸 해버렸죠. 단지 기계일 뿐인 인형을 사랑했어요. 마치 인간을 상대하듯이...
그리고는 사랑을 속삭였던 입으로 저에게 명령하죠. 싸우라고, 사지로 가라고.
전투의 도구면서 감정을 지닌 우리만큼이나 비뚤어진 존재예요, 당신은.”
"그럴지도 몰라..."
삐뚤어진 것은 언젠가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도를 담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포기할 사람은 아니다.
제대로 된 감성을 갖고 있으면 전술인형과 서약 따위를 할 리가 없으니까.
약해질 대로 약해져 초췌한 그녀에게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휘관, 사랑의 도피라도 하지 않을래요? 이대로..."
"뭐..."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는 망설임이 보였다. 예상한 반응이다.
“농담이에요. 후훗, 진짜 하려고 했어요?”
지휘관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사람이 못 된다. 지휘관으로서의 직무와 동료들,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혼자서 껴안고, 고통스러워 한다. 부관으로서, 그녀와 서약한 인형으로서, 고통을 분담할 수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지휘관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인형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다.
문득 내가 지휘관 입장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관은 전선에는 나가지 않는다. 안전한 장소에서 지휘를 한다.
부럽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나를 전장으로 내보낼 때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의 곁에는 항상 죽음이 있고, 그녀는 기도밖에 하는 수 없다. 내가 출격할 때마다 글과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의 지휘한 결과로 내가 죽는다. 복원하여 계속 변질되어 가는 나와 데이트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인형에 영혼이 있다면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까요. 기억이 아니라고 한다면 인격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육체?
그렇다면 저는 훨씬 이전부터 다른 존재라는 말이 되겠네요.”
"...Zas가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거야? 산타가 다 웃겠는데.”
“그냥 해본 말이에요. 인형에 영혼도 신도 없어요.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지만요.
모두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절대적인 누군가가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아요.
인간도, 인형도, 형태에 차이만 있을 뿐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뿐이에요"
우리는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저물고, 주위가 어두워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응..."
지휘관도 일어서서 함께 차를 향해 갔다. 이번엔 내가 앞장설 차례였다.
지휘관은 천천히,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따라온다. 나는 멈춰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어둡게 보인다.
"지휘관, 이 데이트 기억은 지울 건가요?"
"...지우지 않을게."
힘없는 대답이었다. 지우겠지. 지금까지 죽음이나 데이트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분명 그 편이 좋을 것이다. 자신이 변해버렸다고 자각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고,
지휘관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평범한 사람들은 그게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말도 있지만 인형은 언제가 인생이 시작된 날인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지휘관의 손에 손가락을 감아 꽉 쥐었다.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지휘관, 다음 데이트보다 오늘 저를 어떻게 기쁘게 할지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후훗..."
"그래야겠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휘관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꽉 조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지휘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
“나도 그래, Zas. 앞으로도 계속... 언제까지나..."
언제까지 나는 "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이 사람을 사랑하자. 다른 부분이 아무리 변해도, 그것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언젠가 정말로 마지막 날을 맞이했을 때는, 누군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사람을 구해 주세요.
인형과 지휘관의 고뇌네요... 분명 저 지휘관 자스런하다 몇번 사고난듯요
“인형은 죽어요. 총을 맞으면 부서져요. 전쟁을 위한 일회용 기계니까요. 언제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전투에 부상은 따르기 마련이고, 죽어버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철혈은 언제나 전력에서 앞서있고, 철혈 엘리트 인형을 만나면 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대신해 싸우고, 인간을 대신해 죽는다. 그것이 전술인형입니다. 알잖아요, 지휘관이니까. 우리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은 당신이에요..." 나름대로 짠 하네요. 핫산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냥 모에모에 큥. 을 바라는 분들은 이런걸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