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주아니 단편 소설: 죽음의 매듭
by 오딘 오스틴 샤퍼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sejuani-color-story/
세주아니는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베었다. 다섯 번째 도끼질에 나무가 쓰러졌다. 십수 그루째가 되자 그녀는 숨이 찼다. 추울수록 강해지는 냉기의 화신이었기에 남부의 더위 속에서 세주아니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쳐 있던 약탈조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비록 백 명밖에 안 됐지만, 그들의 포효는 주변 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더는 몰래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수천 규모의 남부 병력이 한나절 거리에 있었고, 주변 언덕에서는 적군 정찰병들이 그들을 감시했다.
세주아니의 본대는 최북단 지역에서 여름을 맞아 가축을 먹이고 낚시와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소규모 약탈조들을 편성해 데마시아 국경 지대로 보냈다. 약탈조는 마을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요새를 파괴했다. 그렇게 방어선을 약화시킨 후, 겨울이 오면 본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그때 상흔의 자매 키엘크가 다가왔다. 다른 약탈조 병사들처럼 그녀 역시 황소보다 몸집이 크고 멧돼지처럼 생긴 드류바스크를 타고 있었다.
"전쟁의 어머니시여, 강 너머로 적들이 집결했습니다!" 키엘크가 드류바스크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안내해라." 세주아니가 드류바스크에 오르며 대답했다. 브리슬이라는 이름의 그 드류바스크는 보통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커서 마치 매머드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통나무로 뗏목을 만드는 전사들을 지나 세주아니는 키엘크와 함께 강기슭을 달렸다. 드류바스크의 등이 땀으로 젖었다.
폭포를 지나자 강 건너편에 데마시아군 척후병들이 보였다. 약 300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은 숲에서 빠져나와 바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수백 명의 궁수와 창병으로 구성된 전방 부대였다. 드류바스크를 탄 두 명의 프렐요드 여전사를 보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얼어죽을!" 세주아니가 강물에 침을 뱉으며 외쳤다. 겨울이었다면 습지나 호수, 그리고 앞에 흐르는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재빠른 그녀의 전사들에게 공격로를 제공했을 터였다.
그때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적의 본대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세주아니가 고개를 돌리자 언덕 위로 희미하게 빛나는 적들의 갑옷이 보였다. 데마시아군의 전략은 명백했다.
만약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면 척후대 궁수들이 병력의 수를 줄이고, 강기슭에서 창병들이 고지의 이점을 활용해 시간을 끌면, 본대가 도착해 잔여 병력을 처리하려는 속셈이었다.
격노한 세주아니가 브리슬을 앞으로 몰았다. 그리고 우거진 덤불과 여울을 지나 뗏목이 준비된 곳으로 돌아왔다.
전사들 대부분은 이미 적군을 발견하고 강을 따라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전투 때문이 아니라, 남부인들이 준비한 함정 때문이었다.
"강을 통한 퇴로는 기병들에게 막힐 것이다.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적과 맞설 수도 없다. 당장 강을 건너야 한다."
세주아니는 명령을 내린 다음 가죽으로 감싼 작은 나무 막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감겨 있던 거대한 철퇴, 혹한의 분노를 풀었다. 쇠사슬의 고리는 성인 남성의 손만큼이나 컸으며, 끝에는 얼음 정수 조각이 달려 있었다. 얼음 정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주변에서는 냉기 마력으로 인해 안개가 피어났다.
세주아니는 무기의 마력이 일으키는 고통을 가죽으로 감싼 나무 막대를 힘껏 물면서 견뎠다. 얼음 정수 무기를 사용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철퇴를 쥔 팔은 서리로 뒤덮였고 그녀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눈에 고인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다가 다이아몬드처럼 얼어붙었다. 하지만 전사들의 눈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확신과 노여움으로 가득했다. 세주아니는 철퇴를 휘둘러 강물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강물 위로 얼음 다리가 만들어졌지만, 물이 너무 따뜻했던 나머지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전사들이 건너기에는 턱없이 약했다.
강 건너편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궁수들이 사거리를 확인하는 듯 대부분은 강물에 빠졌다. 남부 병사들의 야유가 들렸다.
세주아니는 혹한의 분노를 거두고, 나무 막대를 뱉은 다음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늑대의 창자로 만든 끈을 손목에서 풀었다. 그 동작에 전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두려움을 떨쳐 낸 전사들은 구호를 외쳤다. 특별한 의식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주아니는 겨울 발톱 부족에게 가장 신성한 맹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죽음의 매듭이었다.
세주아니는 땋았던 머리를 풀고 능숙하게 늑대 창자로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음의 맹세를 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아마 십수 회 정도. 세상의 어떤 전사보다도 많은 횟수였다. 언젠가는 그녀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과연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세주아니는 궁금했다.
또다시 화살이 세주아니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전사들이 반격해 보려고 했지만, 맞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겨울 발톱 부족 전쟁의 어머니이자 혹한의 분노, 삭풍의 철퇴 세주아니다!" 마지막 삼각형 매듭을 묶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너희가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죽어서라도 이 강기슭을 사수하겠다. 이것이 내 맹세다! 늑대가 보인다. 내 운명은 정해졌다!"
전사들이 환호했다. 목소리가 쉬어 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길게 울부짖었다.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세주아니의 맹세에 전사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별다른 명령 없이도 전사들은 무기를 쥐고 뗏목에 올랐다. 최대한 빠르게 강을 건너 세주아니와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시 가죽으로 감싼 나무 막대를 물고, 뻣뻣한 털이 난 브리슬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무런 맹세나 명령을 하지 않아도 세주아니의 마음을 잘 아는 브리슬은 소리를 내더니 강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세주아니는 한 번 더 혹한의 분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통과 더위로 땀을 흘리며, 철퇴를 강물 속으로 처박았다.
동시에 브리슬이 돌진하면서 얼음 다리가 만들어졌다. 다리가 기울어지면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만 브리슬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때 화살이 날아왔다. 사거리를 확인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세주아니는 방패를 들었지만, 어깨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브리슬의 몸에도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다리가 무너졌고, 브리슬과 세주아니는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브리슬은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강기슭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붉게 물든 강물만 세주아니의 눈에 들어왔다.
브리슬은 괴성을 냈다. 마치 천둥이 치고 아기가 통곡하는 소리 같았다. 그러더니 고통에 겨운 듯 거품을 물었다. 세주아니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브리슬을 감쌌다. 그리고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방패로 브리슬의 얼굴을 가렸다.
세주아니는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
그 순간 브리슬이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았는지, 발로 바닥을 박차며 강기슭으로 뛰쳐나왔다.
세주아니는 안장 위에 서서 철퇴를 전방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얼음이 폭발하며 갑옷을 걸치지 않았던 궁수 수십 명이 나가떨어졌다. 브리슬의 엄니와 발길질에 또 두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궁수들은 언덕 위로 올라가 창병들의 방패 뒤로 숨었다. 창병들이 세주아니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며 돌격을 준비하는 동안 궁수들은 화살을 쟀다. 하지만 궁수들이 공격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개를 돌리자 강을 건너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주아니가 일제 사격을 막은 덕분에 병력 손실은 전혀 없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맹세를 지켰다.
맹세의 이행. 세주아니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카이사 단편 소설: 괴물
by 그레이엄 맥닐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kaisa-monstrous-story/
만약 어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고 있다면...
땅속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있었다.
내 눈은 오직 어둠만을 봐 왔지만,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들이 색조와 음영을 통해 괴물들을 막고 있는 벽을 드러냈다. 벽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마치 연극 무대에 쳐 놓은 배경막처럼 얇았다.
이렇게 보이는 세상이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적응하지 않았다면 난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가끔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에 있는 남자는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광원이라곤 희미하게 반짝이는 내 어깨 주머니뿐이었으니까.
그 정도 빛만 가지고 인간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겁을 먹은 남자는 움직일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이곳 지하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지상에서 그는 사막 정착지의 지도자였다.
이자를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줘야 주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남자를 반쯤 업다시피 한 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생체 갑옷 덕분에 힘들진 않았다.
갑옷은 내 피부 전체에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살 속에 파고든 듯했다. 울퉁불퉁하고 뻣뻣한 그 갑옷은 내 몸과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치 고양이 혀 같은 그 느낌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갑옷이 몸 위로 번져나갈 때, 그것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과 고독으로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게 내 목소리이길 바랐다.
발아래의 바닥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녹은 바위가 흐르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의 '존재들'이 마치 썩은 꿀열매 속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처럼 위로 올라오면서 만든 길이었다.
이러한 현상과 그 '실체'를 보고 위쪽 사람들은 지하 세계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공허'.
하지만 공허라는 이름은 이 암흑세계의 '진짜' 위협과 공포를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땅 위로 올라가 살육을 일삼는 괴물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아래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도 한때 이케시아 왕국이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과거의 공포는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고, 피와 고통으로 깨우친 교훈은 여행자들이 모닥불에 앉아 풀어 놓는 괴담이나 민간 신화로 전락했다. 그저 달빛 진주를 난로 위에 달고 나서스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굶주린 괴물들의 허기를 달래 줄 염소를 바깥에 매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공허의 생명체들은 일반적인 포식자들과 달랐다.
어렸을 때, 크미로스 한 무리가 다친 스칼라시를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거대하지만 온순했던 그 동물이 죽는 걸 보고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크미로스를 미워하진 않았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크미로스는 악하지 않았다. 그저 굶주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허 태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
"부탁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을 때쯤, 남자가 애걸했다. "제발 날 좀 풀어 주시오."
이동을 멈추고 남자를 벽으로 강하게 밀치자, 그는 꼴사납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놓아 주리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손의 칼날이 치명적인 보라색 빛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전환되며 남자의 몸속을 흐르는 피에서 빛나는 마력 줄기가 보였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력 줄기는 공중으로 퍼져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공허 포식자들이 냄새를 맡고 마치 배설물에 이끌린 모래파리처럼 몰려들기에는 충분했다.
생체 갑옷이 남자를 먹어 치우길 원했다. 나는 움찔했다.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욕구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지상의 인간 모두가 그렇듯 남자는 나약했다. 어쩌면 지하의 괴물들에게 영혼이 '해체'되기 전에 내 빛의 칼날로 숨통을 끊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도 몰랐다.
'안 돼! 난 그들을 보호해야 해. 그래서 다시 돌아간 거잖아.'
나는 갑옷의 살인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자 뻣뻣해진 손가락에서 빛이 희미해졌다. 나는 몸서리치며 심호흡을 한 뒤, 주먹을 쥐었다.
시야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지면과 더 가까웠다. 따라서 눈앞의 광경이 나타내는 심각성은 더욱 컸다. 터널은 마치 지하 호수를 품은 동굴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 그 빛은 지상의 인간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였다. 마치 조안사의 모래 바다와 같이 두 세계의 경계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운 빛을 받아 빛나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흐트러졌다가 새로워졌다. 그곳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잠수한 레비아탄이 머무른다는 이야기 속 그곳처럼 가끔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남자는 이 광경을 꼭 '봐야' 했다.
영혼이 없는 검은 눈들이 합쳐지더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질의 소용돌이가 흉측한 모습을 갖추었다.
구부러진 척추가 펼쳐지고 탐욕스러운 팔다리가 길게 늘어나더니 갈고리발톱이 액체 속에서 만들어졌다. 반투명한 육체를 지닌 괴물들이 광기 어린 진화를 거친 후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놈들이 왔다...'
"눈을 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갑옷의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왜곡되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목구멍에 뭔가 엉긴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갑각 투구를 뒤로 젖혔다. 투구는 마치 곤충이 등딱지 안으로 날개를 접듯 접혀 들어갔다.
"눈을 떠." 다시 말하자 남자가 알아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나를 보고 남자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예전과 많이 다를까? 공허에 더 '어울리는' 존재처럼 보일까?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아직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이면 좋겠는데.
빛이 차오르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심연을 바라봤다.심연 속 생명체들이 떼를 지어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중심과 그 너머까지 뻗어 있는 광기의 바다에서 올라온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그곳에서 떨고 있었다. 진짜 정체가 뭔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끝없는 충동을 지닌 이 괴물들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이 기세를 더하고 있는 지금, 악몽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저놈들이 보이나? 무슨 상황인지 '이해'돼?"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놓아주었다.
나는 지상의 빛을 향해 기어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위를 긁는 발톱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팔이 심연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그 뒤로 삐걱거리는 갑옷과 돌출된 뼈, 죽음의 빛을 내는 살점을 지닌 끔찍한 괴물이 기어 올라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축축하고 번들거렸지만, 상체 갑각에 달린 검은 눈에서는 무한한 악의가 느껴졌고 해쓱한 배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입술이 없는 입에는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가 나 있었고 그 사이로 체액이 흘러내렸다.
곧이어 다른 괴물들이 올라왔다. 크기는 작았지만,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뒤틀리게 했으며, 발톱 아래의 땅은 검은 연기를 내며 녹아내렸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몸에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위협을 감지한 팔다리에서 힘이 차올랐다.
예전에는 이런 충동을 애써 떨쳐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었다.
갑각 투구가 내려와 내 얼굴을 가렸다. 시야도 다시 전환되었다.
한때는 이 변신 과정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빛을 통해 사냥감의 약점을 파악했다. 나는 다시 포식자가 되었다.
어깨에 붙은 갑옷의 형태가 바뀌었고, 주머니가 열리며 눈부신 빛을 드러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괴물들을 향해 작열하는 미사일을 연사했다.
몸집이 작은 괴물들이 보라색 체액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내 몸에 놈들의 액체가 튀자 곡선형의 갑옷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흡수된 피는 영양분이 되겠지만, 나는 역겨움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팔을 뻗으며 앞으로 달려가 빛의 칼날을 손에 장착한 후, 터널 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을 향해 보랏빛 불꽃을 발사하자 괴물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커먼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이하게 뒤틀린 팔을 휘둘렀다.
나는 착지해 몸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맹렬한 빛을 내며 괴물의 살을 불태웠다. 동족이 만들어낸 불꽃보다 공허 생명체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없었다.
괴물이 쓰러지려 하자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공허 태생에게 '죽음'은 그 의미가 달랐다.
놈은 팔다리를 통해 작은 괴물들의 피와 정수를 빨아들였다. 마치 찢어진 담요를 꿰매듯이, 빛줄기와 꿈틀거리는 물질이 놈의 살을 다시 기워 붙였다. 거대한 몸통은 경련을 일으키며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약점은 더욱 보강하며 새로운 팔다리를 만들어냈다. 갈라진 살 사이로는 작열하는 검은 광선이 솟아 나와 마치 채찍처럼 지면을 때렸다.
딱딱한 돌바닥이 마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그때 광선 줄기 하나가 무릎을 스치자 나는 비틀거렸다. 갑옷의 일부가 검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나는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살갗을 보았다. 마치 바위 아래로 숨는 사막의 파충류처럼 내 피부에서는 생명력이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왠지 속이 메스꺼웠다. 죽어버린 듯한 내 피부를 봐서인지, 아니면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탓에 몸놀림이 둔해졌다.
비록 찰나였지만, 공허충과 사냥꾼들이 몰려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몸집의 두 배나 되는 괴물이 발아래에서 나를 집어삼켰다. 발톱이 가슴팍을 할퀴었고, 머리 위로 이빨이 닫히며 내 투구에 구멍을 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요동치는 목구멍에는 이빨이 빽빽이 솟아나 있었고, 괴물의 혀는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괴물의 몸에 주먹을 박아 넣고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폭발했고 살아 있는 갑옷은 그 에너지를 흡수했다.
발톱과 이빨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하며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계속 발사했다. 하지만 심연 속에서 끝없이 괴물이 쏟아져나왔다. 놈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갑각과 발톱으로 무장한 적들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어깨 주머니에서 강렬한 불꽃이 분출됐지만, 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허에 증오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나를 적잖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놈들은 나를 같은 공허 태생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상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
나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채, 과거 크미로스가 스칼라시를 사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내게는 맞서 싸울 힘이 있었다.
나는 발뒤축으로 회전하며 불타는 주먹을 휘둘러 내 주변에 보랏빛 불꽃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불꽃의 위력에 괴물들이 물러서자 여유가 생겼다. 나는 탈출 경로를 확인한 후 적들 사이를 헤집으며 이동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나는 초자연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망연자실한 듯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을 불꽃과 검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포위에서 벗어났다.
나는 뒤돌아서 심연으로부터 멀어졌다.
놈들과 거리를 유지하되 아예 멀어지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종종 그렇게 된다.
가끔 태양의 모양이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아내는 법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뜨거운 사막 지대 출신으로서 태양을 잊어버릴 때면 나는 울고 싶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하늘에 떠 있는 황금색 눈, 숨 쉴 때마다 가슴에 차오르던 기쁨의 열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억들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직접 알고 느낀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 말해준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밀어냈다.
기억에 정신이 팔리면 둔해진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는 작은 소녀였다. 그 아이는 옛 기억을 들추고, 예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심연의 괴물들은 여전히 나를 쫓고 있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톱을 세운 채, 터널을 가득 메웠다. 나는 남자를 놓아준 곳과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더 깊은 사막으로, 놈들이 탄생한 잊혀진 땅을 향해 이동했다.
전부터 수없이 해왔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춤과 같았다.절대 끝나지 않는 춤.
괴물들은 명백히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았다.
놈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간 내 의지가 꺾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지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싸워야 했다.
태양처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여전히 위에 있었다. 나는 하늘이 어땠는지 잊어버렸거나 악의로 가득 찬 공기가 지겨워졌을 때 가끔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올라갔던 건 오래전 일이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그 공기는 내게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를 지상 세계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인지 두려웠다.
위에서 만난 한 소녀가 생각났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았던 어린 그 소녀는 날 싫어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그 소녀는 보았다.
내 갑옷을 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들을 원망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과거의 나는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존재로 변하여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 내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뭔가 고귀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점차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소녀마저도 잊어버리면 난 어떻게 될까?
공허 생명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난 즉시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추격이 시들해졌다. 마치 내게 관심이 없어진 듯했다.
놈들의 파괴 본능을 충족시킬 더 나은 표적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괴물들에게서 벗어났다.
갑옷의 힘으로 놈들보다 빠르게 구부러진 비밀 통로를 통해 터널을 돌았다. 계속 움직이면서 추격의 강도가 약해진 것을 확인한 후, 긴장으로 가득한 지상 세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지상의 정착지에서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뾰족한 바위탑의 숨겨진 틈으로 빠져나와 햇빛을 받는 순간, 내 생각이 얼마나 틀렸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가 괴물들을 유인했다고 정말 믿고 있었다.
바위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머리뼈가 표지판처럼 놓여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타내는 경고였다.
확실했다. 내가 놓아둔 것이기 때문에 잘 알았다.
나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정착지를 내려다봤다.
제대로 보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아래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건물 사이로 정돈된 거리가 뻗어 있었다. 정착지 남쪽 끝에는 비단 차양으로 덮인 북적이는 시장과 신전인 듯한 건물 지붕에 달린 황금색 원판이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위탑까지 들려왔다.
구운 고기와 가축의 분뇨, 자극적인 향신료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지상 세계의 '삶'이자 일상의 냄새였다.
잠깐이지만 나는 반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모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떠올랐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이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을까?
갑옷의 안쪽 면이 몸을 강하게 옥죄자, 나는 고통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굶주려 있었다. 나 자신과 갑옷, 어느 쪽이 내 행동을 더 많이 결정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워 공허의 존재들을 탐색했다.
놈들은 아주 가까운 사막 아래에서 지면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놈들의 공격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투구를 쓰고 시야를 전환해 빛과 열의 형태를 확인했다.
정착지 쪽을 바라보자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정착지 끝의 연병장으로 눈을 돌렸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수십 명의 사람이 무장한 채 정렬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들을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전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뚜렷했다.
그는 내가 지하에 데려갔던 그 지도자였다.
나는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며 정착지 쪽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공허 생명체가 있어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머지않아 이곳에 들이닥칠 기세였다.
우리 안으로 뛰어들자 내 냄새를 맡은 가축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갑옷과 결합된 내 몸을 보고 하나둘씩 비명을 질렀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지도자에게 곧장 달려갔다.
내가 보여줬는데!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지?' 지하 괴물들을 보고 느낀 공포를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줬어야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저항 의지를 북돋운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누군가 죽는다면 전부 내 잘못이자 내 책임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 때문에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은 무기를 쥐고도 내 모습에 겁에 질려 흩어졌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의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지금 증오로 변해 있었다.
이자는 내가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투구를 벗고 남자 앞에 섰다.
"왜 아직 여기에 있지?" 난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사막 공기와 정착지 아래에 있는 공허 생명체의 냄새가 느껴졌다. 마치 구리 동전을 입에 넣은 느낌이었다. "어서 가!"
"꺼져라, 이 악마!" 남자가 소리쳤다. "너는 재앙의 전조일 뿐이야!"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괴물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해?"
"네 정체는 잘 알고 있다." 남자는 내게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공허의 딸이야. 네가 어딜 가든 괴물들이 뒤따르지."
난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인하려는 순간...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공허 태생의 생명체들과 마주하고 싸웠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보라색 광선이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 힘을 내 몸의 일부로 보았다. '내'가 이 '능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나는 곧바로 확인했다. 빛줄기가 내 의지대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사실일까? 공허의 생명체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놈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마음속 의문은 분노로 변했다. 손에 달린 빛의 칼날이 번득였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따돌렸다." 남자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이끄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겠다."
"날 따돌렸다고?" 기가 막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칼을 휘둘렀지만,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공격을 피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이 몰려들어 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남자의 공격과 주민들의 적대심에 살아 있는 갑옷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내 몸에서는 전투 본능과 '살인 충동'이 끓어올랐다.
사람들은 내 두 번째 피부를 보고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건 공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이들은 갑옷 밑에 숨어 있는 소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이들에게 괴물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믿는 게 더 편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내 가슴은 냉담해졌다. 왜 이들을 구해야 할까? 상실감 때문에 상처가 될 뿐인데, 왜 인간성을 지키려고 싸워야 할까?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어 버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그때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 문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사랑과 작은 친절이 이 세상에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괴물들과 싸우는 이유였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싸웠다. 나처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그저 방관한다면, 내 안에 남은 소녀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난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이번 역시 내가 나서야 했다. 비록 피를 흘리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그 짐은 내 몫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의지하는 사람이자, 이들이 정착지에 머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기거나 타협할 수 없고, 살육과 함께 더욱 강해지는 적과 싸우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존재였다.
주민들의 몰살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남자의 어설픈 공격을 쳐낸 뒤, 안으로 파고들어 손에 달린 빛의 검을 휘둘렀다.
작열하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남자의 혈관과 신경, 뼈가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큰 폭발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공허의 습격이 임박해 있었다. 공기의 질감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공허 괴물들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모랫바닥 위로 남자의 시체가 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어깨 주머니에 광선을 충전했다. 그대로 발사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나는 나선형의 광선을 발사해 버려진 곡물 저장고를 박살 냈다. 씨앗과 바구니들이 불붙은 채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시장에 불꽃을 발사하자 비단 차양이 사막 쾌속선의 돛처럼 불타올랐다.
밝은 보라색 불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착지의 집들을 파괴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들은 나를 끔찍한 괴물로 보았다.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투시경으로 확인한 후, 사람이 없는 건물만 파괴했다.
사람이 없는 장벽과 방어벽 등, 공허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만한 구조물은 모조리 무너트렸다.
난 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길' 바랐다.
바위탑에서 불타는 정착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나는 경고의 표시로 놔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있었다. 공허 태생의 괴물 무리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기이한 모양의 팔다리를 휘저으며 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 소리는 마치 추수철 곡식을 휩쓰는 곤충 떼 같았다.
수를 세기는커녕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빨과 발톱이 큰 덩어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을 내뿜었다.
놈들은 내 위치를 감지했지만, 난 도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놈들이 나를 쫓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은 안전할 테니까.
지평선 위로 소름 끼치는 불빛이 일렁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밝은 보라색 광선이 사막 깊숙한 곳에서 갈라지며 솟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들은 가축이 묶인 형형색색의 수레에 필요한 살림을 싣고 떠났다. 고대의 도르문 기수처럼 길게 줄지어서 서쪽으로 멀리 벗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강을 찾아 다시 정착할 때까지 모랫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다. 다시 정착하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했다.
집을 떠나던 주민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위탑 위에 있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저주했다.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던 그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계속 날 증오하며, 괴물이 되어 버린 버림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를 죽이고 마을을 파괴한 그 날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슈리마 제국의 전설처럼 내 이야기는 점점 과장되어,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인 무정한 살인마로 둔갑될 것이다.
선두의 괴물들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갑각 투구로 얼굴을 덮고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리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익숙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난 상관없었다.
그런 짐이라면 기꺼이 질 수 있다.
'내가 그들의 괴물이 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