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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유니버스] 지옥의 문이 열리고 / 카시오페아+카이사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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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 단편 소설: 괴물

by 그레이엄 맥닐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kaisa-monstrous-story/

 

만약 어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고 있다면...


땅속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있었다.


내 눈은 오직 어둠만을 봐 왔지만,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들이 색조와 음영을 통해 괴물들을 막고 있는 벽을 드러냈다. 벽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마치 연극 무대에 쳐 놓은 배경막처럼 얇았다.


이렇게 보이는 세상이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적응하지 않았다면 난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가끔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에 있는 남자는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광원이라곤 희미하게 반짝이는 내 어깨 주머니뿐이었으니까.


그 정도 빛만 가지고 인간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겁을 먹은 남자는 움직일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이곳 지하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지상에서 그는 사막 정착지의 지도자였다.


이자를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줘야 주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남자를 반쯤 업다시피 한 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생체 갑옷 덕분에 힘들진 않았다.


갑옷은 내 피부 전체에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살 속에 파고든 듯했다. 울퉁불퉁하고 뻣뻣한 그 갑옷은 내 몸과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치 고양이 혀 같은 그 느낌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갑옷이 몸 위로 번져나갈 때, 그것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과 고독으로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게 내 목소리이길 바랐다.


발아래의 바닥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녹은 바위가 흐르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의 '존재들'이 마치 썩은 꿀열매 속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처럼 위로 올라오면서 만든 길이었다.


이러한 현상과 그 '실체'를 보고 위쪽 사람들은 지하 세계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공허.


하지만 공허라는 이름은 이 암흑세계의 '진짜' 위협과 공포를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땅 위로 올라가 살육을 일삼는 괴물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아래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도 한때 이케시아 왕국이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과거의 공포는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고, 피와 고통으로 깨우친 교훈은 여행자들이 모닥불에 앉아 풀어 놓는 괴담이나 민간 신화로 전락했다. 그저 달빛 진주를 난로 위에 달고 나서스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굶주린 괴물들의 허기를 달래 줄 염소를 바깥에 매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공허의 생명체들은 일반적인 포식자들과 달랐다.


어렸을 때, 크미로스 한 무리가 다친 스칼라시를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거대하지만 온순했던 그 동물이 죽는 걸 보고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크미로스를 미워하진 않았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크미로스는 악하지 않았다. 그저 굶주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허 태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


"부탁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을 때쯤, 남자가 애걸했다. "제발 날 좀 풀어 주시오."


이동을 멈추고 남자를 벽으로 강하게 밀치자, 그는 꼴사납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놓아 주리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손의 칼날이 치명적인 보라색 빛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전환되며 남자의 몸속을 흐르는 피에서 빛나는 마력 줄기가 보였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력 줄기는 공중으로 퍼져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공허 포식자들이 냄새를 맡고 마치 배설물에 이끌린 모래파리처럼 몰려들기에는 충분했다.


생체 갑옷이 남자를 먹어 치우길 원했다. 나는 움찔했다.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욕구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지상의 인간 모두가 그렇듯 남자는 나약했다. 어쩌면 지하의 괴물들에게 영혼이 '해체'되기 전에 내 빛의 칼날로 숨통을 끊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도 몰랐다.


'안 돼! 난 그들을 보호해야 해. 그래서 다시 돌아간 거잖아.'


나는 갑옷의 살인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자 뻣뻣해진 손가락에서 빛이 희미해졌다. 나는 몸서리치며 심호흡을 한 뒤, 주먹을 쥐었다.


시야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지면과 더 가까웠다. 따라서 눈앞의 광경이 나타내는 심각성은 더욱 컸다. 터널은 마치 지하 호수를 품은 동굴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 그 빛은 지상의 인간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였다. 마치 조안사의 모래 바다와 같이 두 세계의 경계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운 빛을 받아 빛나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흐트러졌다가 새로워졌다. 그곳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잠수한 레비아탄이 머무른다는 이야기 속 그곳처럼 가끔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남자는 이 광경을 꼭 '봐야' 했다.


영혼이 없는 검은 눈들이 합쳐지더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질의 소용돌이가 흉측한 모습을 갖추었다.


구부러진 척추가 펼쳐지고 탐욕스러운 팔다리가 길게 늘어나더니 갈고리발톱이 액체 속에서 만들어졌다. 반투명한 육체를 지닌 괴물들이 광기 어린 진화를 거친 후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놈들이 왔다...'


"눈을 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갑옷의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왜곡되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목구멍에 피가 엉긴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갑각 투구를 뒤로 젖혔다. 투구는 마치 곤충이 등딱지 안으로 날개를 접듯 접혀 들어갔다.


"눈을 떠." 다시 말하자 남자가 알아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나를 보고 남자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예전과 많이 다를까? 공허에 더 '어울리는' 존재처럼 보일까?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아직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이면 좋겠는데.


빛이 차오르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심연을 바라봤다.심연 속 생명체들이 떼를 지어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중심과 그 너머까지 뻗어 있는 광기의 바다에서 올라온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그곳에서 떨고 있었다. 진짜 정체가 뭔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끝없는 충동을 지닌 이 괴물들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이 기세를 더하고 있는 지금, 악몽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저놈들이 보이나? 무슨 상황인지 '이해'돼?"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놓아주었다.





나는 지상의 빛을 향해 기어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위를 긁는 발톱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팔이 심연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그 뒤로 삐걱거리는 갑옷과 돌출된 뼈, 죽음의 빛을 내는 살점을 지닌 끔찍한 괴물이 기어 올라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축축하고 번들거렸지만, 상체 갑각에 달린 검은 눈에서는 무한한 악의가 느껴졌고 해쓱한 배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입술이 없는 입에는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가 나 있었고 그 사이로 체액이 흘러내렸다.


곧이어 다른 괴물들이 올라왔다. 크기는 작았지만,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뒤틀리게 했으며, 발톱 아래의 땅은 검은 연기를 내며 녹아내렸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몸에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위협을 감지한 팔다리에서 힘이 차올랐다.


예전에는 이런 충동을 애써 떨쳐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었다.


갑각 투구가 내려와 내 얼굴을 가렸다. 시야도 다시 전환되었다.


한때는 이 변신 과정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빛을 통해 사냥감의 약점을 파악했다. 나는 다시 포식자가 되었다.


어깨에 붙은 갑옷의 형태가 바뀌었고, 주머니가 열리며 눈 부신 빛을 드러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괴물들을 향해 작열하는 미사일을 연사했다.


몸집이 작은 괴물들이 보라색 체액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내 몸에 놈들의 피가 튀자 곡선형의 갑옷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흡수된 피는 영양분이 되겠지만, 나는 역겨움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팔을 뻗으며 앞으로 달려가 빛의 칼날을 손에 장착한 후, 터널 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을 향해 보랏빛 불꽃을 발사하자 괴물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커먼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이하게 뒤틀린 팔을 휘둘렀다.


나는 착지해 몸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맹렬한 빛을 내며 괴물의 살을 불태웠다. 동족이 만들어낸 불꽃보다 공허 생명체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없었다.


괴물이 쓰러지려 하자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공허 태생에게 '죽음'은 그 의미가 달랐다.


놈은 팔다리를 통해 작은 괴물들의 피와 정수를 빨아들였다. 마치 찢어진 담요를 꿰매듯이, 빛줄기와 꿈틀거리는 물질이 놈의 살을 다시 기워 붙였다. 거대한 몸통은 경련을 일으키며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약점은 더욱 보강하며 새로운 팔다리를 만들어냈다. 갈라진 살 사이로는 작열하는 검은 광선이 솟아 나와 마치 채찍처럼 지면을 때렸다.


딱딱한 돌바닥이 마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그때 광선 줄기 하나가 무릎을 스치자 나는 비틀거렸다. 갑옷의 일부가 검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나는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살갗을 보았다. 마치 바위 아래로 숨는 사막의 파충류처럼 내 피부에서는 생명력이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왠지 속이 메스꺼웠다. 죽어버린 듯한 내 피부를 봐서인지, 아니면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탓에 몸놀림이 둔해졌다.


비록 찰나였지만, 공허충과 사냥꾼들이 몰려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몸집의 두 배나 되는 괴물이 발아래에서 나를 집어삼켰다. 발톱이 가슴팍을 할퀴었고, 머리 위로 이빨이 닫히며 내 투구에 구멍을 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요동치는 목구멍에는 이빨이 빽빽이 솟아나 있었고, 괴물의 혀는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괴물의 몸에 주먹을 박아 넣고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폭발했고 살아 있는 갑옷은 그 에너지를 흡수했다.


발톱과 이빨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하며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계속 발사했다. 하지만 심연 속에서 끝없이 괴물이 쏟아져나왔다. 놈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갑각과 발톱으로 무장한 적들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어깨 주머니에서 강렬한 불꽃이 분출됐지만, 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허에 증오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나를 적잖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놈들은 나를 같은 공허 태생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상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


나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채, 과거 크미로스가 스칼라시를 사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내게는 맞서 싸울 힘이 있었다.


나는 발뒤축으로 회전하며 불타는 주먹을 휘둘러 내 주변에 보랏빛 불꽃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불꽃의 위력에 괴물들이 물러서자 여유가 생겼다. 나는 탈출 경로를 확인한 후 적들 사이를 헤집으며 이동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나는 초자연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망연자실한 듯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을 불꽃과 검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포위에서 벗어났다.


나는 뒤돌아서 심연으로부터 멀어졌다.


놈들과 거리를 유지하되 아예 멀어지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종종 그렇게 된다.


가끔 태양의 모양이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아내는 법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뜨거운 사막 지대 출신으로서 태양을 잊어버릴 때면 나는 울고 싶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하늘에 떠 있는 황금색 눈, 숨 쉴 때마다 가슴에 차오르던 기쁨의 열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억들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직접 알고 느낀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 말해준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밀어냈다.


기억에 정신이 팔리면 둔해진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는 작은 소녀였다. 그 아이는 옛 기억을 들추고, 예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심연의 괴물들은 여전히 나를 쫓고 있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톱을 세운 채, 터널을 가득 메웠다. 나는 남자를 놓아준 곳과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더 깊은 사막으로, 놈들이 탄생한 잊혀진 땅을 향해 이동했다.


전부터 수없이 해왔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춤과 같았다.절대 끝나지 않는 춤.


괴물들은 명백히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았다.


놈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간 내 의지가 꺾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지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싸워야 했다.


태양처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여전히 위에 있었다. 나는 하늘이 어땠는지 잊어버렸거나 악의로 가득 찬 공기가 지겨워졌을 때 가끔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올라갔던 건 오래전 일이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그 공기는 내게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를 지상 세계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인지 두려웠다.


위에서 만난 한 소녀가 생각났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았던 어린 그 소녀는 날 싫어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그 소녀는 보았다.


내 갑옷을 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들을 원망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과거의 나는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존재로 변하여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 내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뭔가 고귀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점차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소녀마저도 잊어버리면 난 어떻게 될까?





공허 생명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난 즉시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추격이 시들해졌다. 마치 내게 관심이 없어진 듯했다.


놈들의 파괴 본능을 충족시킬 더 나은 표적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괴물들에게서 벗어났다.


갑옷의 힘으로 놈들보다 빠르게 구부러진 비밀 통로를 통해 터널을 돌았다. 계속 움직이면서 추격의 강도가 약해진 것을 확인한 후, 긴장으로 가득한 지상 세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지상의 정착지에서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뾰족한 바위탑의 숨겨진 틈으로 빠져나와 햇빛을 받는 순간, 내 생각이 얼마나 틀렸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가 괴물들을 유인했다고 정말 믿고 있었다.


바위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머리뼈가 표지판처럼 놓여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타내는 경고였다.


확실했다. 내가 놓아둔 것이기 때문에 잘 알았다.


나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정착지를 내려다봤다.


제대로 보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아래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건물 사이로 정돈된 거리가 뻗어 있었다. 정착지 남쪽 끝에는 비단 차양으로 덮인 북적이는 시장과 신전인 듯한 건물 지붕에 달린 황금색 원판이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위탑까지 들려왔다.


구운 고기와 가축의 분뇨, 자극적인 향신료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지상 세계의 '삶'이자 일상의 냄새였다.


잠깐이지만 나는 반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모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떠올랐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이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을까?


갑옷의 안쪽 면이 몸을 강하게 옥죄자, 나는 고통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굶주려 있었다. 나 자신과 갑옷, 어느 쪽이 내 행동을 더 많이 결정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워 공허의 존재들을 탐색했다.


놈들은 아주 가까운 사막 아래에서 지면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놈들의 공격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투구를 쓰고 시야를 전환해 빛과 열의 형태를 확인했다.


정착지 쪽을 바라보자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정착지 끝의 연병장으로 눈을 돌렸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수십 명의 사람이 무장한 채 정렬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들을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전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뚜렷했다.


그는 내가 지하에 데려갔던 그 지도자였다.





나는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며 정착지 쪽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공허 생명체가 있어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머지않아 이곳에 들이닥칠 기세였다.


우리 안으로 뛰어들자 내 냄새를 맡은 가축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갑옷과 결합된 내 몸을 보고 하나둘씩 비명을 질렀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지도자에게 곧장 달려갔다.


내가 보여줬는데!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지?' 지하 괴물들을 보고 느낀 공포를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줬어야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저항 의지를 북돋운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누군가 죽는다면 전부 내 잘못이자 내 책임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 때문에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은 무기를 쥐고도 내 모습에 겁에 질려 흩어졌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의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지금 증오로 변해 있었다.


이자는 내가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투구를 벗고 남자 앞에 섰다.


"왜 아직 여기에 있지?" 난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사막 공기와 정착지 아래에 있는 공허 생명체의 냄새가 느껴졌다. 마치 구리 동전을 입에 넣은 느낌이었다. "어서 가!"


"꺼져라, 이 악마!" 남자가 소리쳤다. "너는 재앙의 전조일 뿐이야!"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괴물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해?"


"네 정체는 잘 알고 있다." 남자는 내게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공허의 딸이야. 네가 어딜 가든 괴물들이 뒤따르지."


난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인하려는 순간...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공허 태생의 생명체들과 마주하고 싸웠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보라색 광선이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 힘을 내 몸의 일부로 보았다. '내'가 이 '능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나는 곧바로 확인했다. 빛줄기가 내 의지대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사실일까? 공허의 생명체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놈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마음속 의문은 분노로 변했다. 손에 달린 빛의 칼날이 번득였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따돌렸다." 남자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이끄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겠다."


"날 따돌렸다고?" 기가 막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칼을 휘둘렀지만,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공격을 피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이 몰려들어 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남자의 공격과 주민들의 적대심에 살아 있는 갑옷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내 몸에서는 전투 본능과 '살인 충동'이 끓어올랐다.


사람들은 내 두 번째 피부를 보고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건 공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이들은 갑옷 밑에 숨어 있는 소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이들에게 괴물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믿는 게 더 편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내 가슴은 냉담해졌다. 왜 이들을 구해야 할까? 상실감 때문에 상처가 될 뿐인데, 왜 인간성을 지키려고 싸워야 할까?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어 버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그때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 문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사랑과 작은 친절이 이 세상에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괴물들과 싸우는 이유였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싸웠다. 나처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그저 방관한다면, 내 안에 남은 소녀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난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이번 역시 내가 나서야 했다. 비록 피를 흘리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그 짐은 내 몫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의지하는 사람이자, 이들이 정착지에 머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기거나 타협할 수 없고, 살육과 함께 더욱 강해지는 적과 싸우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존재였다.


주민들의 몰살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남자의 어설픈 공격을 쳐낸 뒤, 안으로 파고들어 손에 달린 빛의 검을 휘둘렀다.


작열하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남자의 혈관과 신경, 뼈가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큰 폭발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공허의 습격이 임박해 있었다. 공기의 질감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공허 괴물들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모랫바닥 위로 남자의 시체가 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어깨 주머니에 광선을 충전했다. 그대로 발사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나는 나선형의 광선을 발사해 버려진 곡물 저장고를 박살 냈다. 씨앗과 바구니들이 불붙은 채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시장에 불꽃을 발사하자 비단 차양이 사막 쾌속선의 돛처럼 불타올랐다.


밝은 보라색 불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착지의 집들을 파괴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들은 나를 끔찍한 괴물로 보았다.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투시경으로 확인한 후, 사람이 없는 건물만 파괴했다.


사람이 없는 장벽과 방어벽 등, 공허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만한 구조물은 모조리 무너트렸다.


난 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길' 바랐다.





바위탑에서 불타는 정착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나는 경고의 표시로 놔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있었다. 공허 태생의 괴물 무리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기이한 모양의 팔다리를 휘저으며 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 소리는 마치 추수철 곡식을 휩쓰는 곤충 떼 같았다.


수를 세기는커녕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빨과 발톱이 큰 덩어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을 내뿜었다.


놈들은 내 위치를 감지했지만, 난 도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놈들이 나를 쫓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은 안전할 테니까.


지평선 위로 소름 끼치는 불빛이 일렁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밝은 보라색 광선이 사막 깊숙한 곳에서 갈라지며 솟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들은 가축이 묶인 형형색색의 수레에 필요한 살림을 싣고 떠났다. 고대의 도르문 기수처럼 길게 줄지어서 서쪽으로 멀리 벗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강을 찾아 다시 정착할 때까지 모랫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다. 다시 정착하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했다.


집을 떠나던 주민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위탑 위에 있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저주했다.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던 그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계속 날 증오하며, 괴물이 되어 버린 버림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를 죽이고 마을을 파괴한 그 날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슈리마 제국의 전설처럼 내 이야기는 점점 과장되어,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인 무정한 살인마로 둔갑될 것이다.


선두의 괴물들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갑각 투구로 얼굴을 덮고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리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익숙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난 상관없었다.


그런 짐이라면 기꺼이 질 수 있다.


'내가 그들의 괴물이 되면 된다.'

 

 

 

 

 

 

카시오페아 단편 소설: 허물을 벗고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assiopeia-color-story/

 

카시오페아는 무딘 톱니 모양의 옥상 한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우르제리스의 골목길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해안 도시 우르제리스는 몇 년 전부터 녹서스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변화를 거부한 채 고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참으로 슈리마다운 도시였다.


반투명 실크 원피스를 입은 카시오페아는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하늘거리는 원피스 너머로 왠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그녀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살갗은 엉덩이께부터 물결무늬의 뱀 껍질로 변해 있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카시오페아가 있는 옥상 꼭대기까지 퍼져 올라갔다. 그곳은 마치 비밀스러운 요새 같았다. 하지만 그 냄새가 아무리 강한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악취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속의 침에 독이 섞여 들자 혀끝이 따끔거렸다. 카시오페아는 근육질의 꼬리에 힘을 준 후 돌로 만든 조각상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단번에 금이 가며 갈라져 버렸다. 그녀는 바스러진 돌 조각을 사람들이 붐비는 골목길로 거침없이 내던졌다.


갑작스러운 돌 세례에 골목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화들짝 놀란 쥐들은 떨어지는 돌을 피해 황급히 달아났다. 사람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돌에 맞을까 얼굴을 가린 채 후미진 곳으로 몰려들기도 했고 고개를 푹 숙이고서 도망치기도 했다. 선술집 안팎으로는 비틀거리며 웅성대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서둘러 길모퉁이 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 어둠 속, 저 높은 곳에 포식자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시오페아는 기다란 손톱으로 비늘로 뒤덮인 자신의 살갗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흡사 뱀과 같은 그녀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녹서스 최고의 거물이었다.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그녀에게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오페아 앞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군대 내 추한 비밀까지 실토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장성들은 내심 지원을 기대하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녹서스는 그녀의 손안에 있지 않다. 카시오페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괴수의 형상으로 변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운명과 마주해야 했다. 이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휴우- 깊이 내쉬는 한숨도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렸다.


사막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 그녀는 지하에 숨어 지냈다. 괴상하게 바뀌어버린 모습에 자기 자신조차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빛도 들지 않는 차갑고 눅눅한 곳에서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역겨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군림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던 옛 시절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끓어오르는 사냥 본능을 주체하지 못한 카시오페아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도시로 나왔다. 모든 위험을 무릅쓴 채.


어둠이 내린 저녁, 떡 벌어진 어깨에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 하나가 선술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기가 오른 듯 보였지만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카시오페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그녀의 사냥감이었다. 카시오페아는 이내 병사를 쫓기 시작했다. 요새의 벽과 아치형 지붕을 타고 스르륵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밟았다. 어느 순간 병사는 작은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숨어들 곳이라곤 전혀 없는 탁 트인 곳! 모든 것이 완벽했다. 카시오페아는 바로 옆 건물 지붕으로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포식자의 맹렬한 눈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압도했다.


병사가 있는 쪽으로 카시오페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취기가 한껏 올라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 병사가 소리쳤다.


먹잇감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들뜬 카시오페아는 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러고는 두 개로 갈라진 혀를 죽 내밀며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했다. "후우우우." 깊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잔뜩 긴장한 사냥감이 내뿜는 숨소리가 더없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얼굴 보고 정식으로 붙자고! 무슨 짐승마냥 뒤에 숨었다가 몰래 들이받으면 재미없어!"


약이 오른 카시오페아는 쉬익 쉬익 소리를 내며 분을 삭였다. 병사가 위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정원 반대편으로 스르르 넘어가 그의 머리 위에 멈춰 섰다. 이번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짐승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봐? 그렇지?" 카시오페아가 물었다.


병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두리번두리번 찾고 있었다.


"빨리도 건너갔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의 긴장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짐승만도 못한 녀석 같으니." 카시오페아가 받아쳤다.


순간 병사는 뭔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에 보이는 문마다 돌아다니며 주먹으로 내리쳤지만 어느 하나 쉬이 열리지 않았다. 대체 누가, 왜 자신을 쫓는 것인지 병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카시오페아는 그런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병사는 기어코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휘둘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나와 대적하기 싫은 게로군. 너보다 훨씬 끔찍한 적수도 나한테는 맥을 못 추고 나가떨어졌어! 알아?"


"비단 적수만이 아니었지. 네가 저지른 그 끔찍한 짓들을 난 모조리 알고 있어. 술에 취해 밤거리를 헤매는 순진한 모습? 그게 네 전부가 아니잖아? 다 알고 있어!" 카시오페아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병사가 몸을 돌리자 카시오페아는 그를 향해 퉤! 하고 고약한 독침을 뱉어냈다. "아아악!" 그는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동전만 한 작은 불구멍이 병사의 갑옷을 뚫고 타들어 갔다. 재빠른 공격이 단번에 성공하자 카시오페아는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무나 흡족한 나머지 고통의 신음 소리에 박자라도 맞출 기색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병사는 맥없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대체 누구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널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 네가 누군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카시오페아가 대답했다.


"내가 뭘 하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아이들을 죽여서 용의 먹이로 쓴다고? 꽤 돈이 되는 장사라지?"


병사는 바로 옆 건물로 달려가 창틀을 내리찍으며 어떻게든 열어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지. 선술집에 있던 세 명의 아가씨, 사멜라, 엘민, 릭스. 이들 모두 어제 강변에서 발견됐어. 하나같이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흉측한 모습으로 말이야."


카시오페아는 이들 대신 복수라도 하듯, 날카로운 발톱으로 병사에게 고통의 심판을 내리는 끔찍한 상상을 하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결투 준비를 마친 병사가 소리쳤다. "그림자와는 대적할 수가 없지. 어서 나와!"


"좋아." 카시오페아가 대답했다.


스르륵, 그녀는 순식간에 정원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병사보다 훨씬 큰 키에 체구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병사는 일순간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를 압도한 카시오페아는 병사를 향해 매섭게 눈을 흘겼다.


"으악! 괴…괴물이다!" 병사가 소리쳤다.


"괴물이라... 그보다 더한 말도 들었는데 뭐." 카시오페아가 혼자 중얼거렸다.


순간 카시오페아는 재빨리 왼쪽으로 빠져서 병사의 다리를 자신의 꼬리로 후려쳤다. 그러자 그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날쌔게 꼬리를 들어 올려 병사의 가슴팍을 둘둘 감아 지그시 눌러버렸다. 쿵쾅쿵쾅 그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자 조금씩 강도를 높였다. '으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세게 눌러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지만 카시오페아는 거기서 멈췄다. 그러고는 슬며시 손에 힘을 풀었다. 병사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몸도 가누지 못한 채 거의 기다시피 칼 쪽으로 향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카시오페아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병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시오페아가 병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병사는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 카시오페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 기억난다. 카시오페아! 그런 꼴을 하고 있다니!" 다소 놀랍다는 듯 그가 말했다.


병사는 칼에 의지한 채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녹서스의 더럽고 추악한 곳들만 돌아다니며 나 같은 취객을 잡아다 본때를 보여주는 거. 이게 네 일인가 보지? 그 위대하신 카시오페아가 이렇게 추락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안 그래?" 병사가 비꼬듯 말했다.


순간 기분이 확 상한 카시오페아는 누런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는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쉬익 쉬익 성난 소리를 내뿜었다.


카시오페아는 병사의 두 눈을 향해 강한 빛을 발사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된 듯, 그의 두 눈이 얼어붙었다. 과연 눈길만으로 상대를 압도해버리는 섬뜩한 존재였다. "이야아아아아!" 카시오페아는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속에 있는 모든 분노를 쏟아내는 것 같았다. 괴수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비참한 처지, 실패로 끝나버린 불같은 야망. 그 모든 것이 쓰디쓴 원한으로 사무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몸부림치듯 울부짖으며 속에 있는 감정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렇게 한바탕 퍼붓고 나자 그간의 묵은 감정이 일순간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었던 카시오페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타들어 갈 듯 이글거리는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양손을 꽉 움켜쥔 병사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듯 보였다. 병사의 두 눈은 잿빛으로 굳어져 갔다. 몸도 점점 뻣뻣해졌다. 카시오페아의 저주가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의 온몸은 순식간에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끄아아악!" 그의 마지막 절규가 울려 퍼졌다.


카시오페아는 완전히 굳어버린 병사의 곁으로 스르륵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매끈하고 따뜻했던 병사의 피부는 마치 가뭄에 바싹 말라 갈라진 강바닥처럼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을 조종하고 매수도 하며 살살 구슬려서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젠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즉시 내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되었어!"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력해진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카시오페아가 말했다.


그녀는 꼬리를 앞으로 홱 잡아당겨 병사의 동상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동상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 돌무더기 속으로 매캐한 먼지가 흩날리자 카시오페아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한때 녹서스를 장악했던 일인자의 인생은 분명 끝났다. 하지만 그녀의 핏속에는 여전히 무한한 괴력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시오페아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그녀는 다시 지붕 위로 올랐다. 다음 상대로 누구를 선택할지, 수많은 후보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오늘보다 더 흥미진진한 대결을 기대하며, 그녀는 다시 녹서스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by 제러드 로슨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with-hell-before-them/

 

1868년 6월 7일


나는 여행 상단과 함께 더스트에 도착했다.


더스트는 생기 없이 황량한 마을이다. 남쪽 끝자락에 있는 대부분의 선로가 사막의 모래에 묻혀 사라지듯, 이 마을 역시 쇠락해 가고 있다. 대확장 시대에는 꽤 잘 나가는 도시였지만, 이제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술집과 다 무너져 가는 집 몇 채밖엔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내가 지나치자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지만, 나는 진짜 천사가 아니다. 그들의 기도엔 응할 수 없다.


이 마을이 암울한 개척지에서 얼마나 오래 버텨낼지 알 수 없다. 내가 돌아올 때쯤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 가야만 한다.


내가 향하는 곳은 사암 아치와 드넓은 황무지가 있는 동쪽이다. 정신이 멀쩡한 자라면 이런 곳에 정착해 살지 않을 것이다. 노련한 모험가에게도 쉽지 않을 만큼 온갖 위험으로 가득한 데다, 내가 찾고 있는 사냥감은 평범한 강도나 무법자 무리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렇기에, 나는 보수의 절반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진정한 전사를 고용해 대동했다.


그는 몸집이 거대한 남자로, 이런 류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인상이 어두웠다. 가까이 가면 사악한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피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지만, 이번 일에는 이런 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힘과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자. 그것이 내가 황량한 검은 협곡으로의 여정에 인간사냥꾼 다리우스를 고용한 이유다.


나는 그와 함께 그 음산한 검은 협곡에서 악마를 찾아 처단할 것이다.





1868년 6월 9일

더스트를 떠난 지 이틀이 지났지만, 다리우스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가슴 속 깊은 분노에서 나오는 단호하고 확고한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나를 창조해 낸 동쪽의 존재들을 닮았다. 그러나 창조자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전에, 그의 선조들이 떠오른다. 수년 전 낙원의 정원에 침입해 모든 것을 말살한 자들이.


옛 천사들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기계와, 학살자들의 피를 물려받은 학살자. 그 둘이 계약을 맺고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큰 죄악의 산물을 처단하기 위해 떠난다. 그것이 바로 이 여정의 가장 큰 모순이다. 내 동반자 역시 내심 우스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람을 거슬러 유황 잿더미, 불타는 발굽 자국, 지옥불에 그을린 수풀 냄새를 따라 이동했다. 이 땅에는 흙, 풀, 야생 라벤더가 수천 리그에 걸쳐 뻗어 있다. 끝없는 평야는 하늘에 맞닿은 지점을 넘어 영원히 펼쳐진다. 실로 축복받은 곳이다. 나는 탄생 이후 오랜 시간을 들여 이 땅의 곳곳을 방문했으며, 나를 담고 있는 육체가 존재하는 한 더 많은 곳을 순례하며 몇 세기를 보낼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창조에 대한 비밀은 역사 속에 잊힌 지 오래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공 천사이며, 옛 천사들의 피를 이어받았다. 지금도 그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울리지만 신들은 이미 살해당했으며, 천사들 역시 개척지 곳곳에 묻혀 있다. 그들의 말은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이 공허하게 울리다 언젠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이다. 옛 존재들이 사라졌을 때 남겨진 이들이 우리를, 최소한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도록.


언젠가 현세의 내 육신도 녹이 슬고, 그 안에 깃든 존재 역시 천사들의 영혼을 좇아갈 것이다. 그곳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일지도 모른다. 그때가 온다면, 나는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 땅을 다시 한번 눈에 담을 수 있을까.





1868년 6월 11일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2층짜리 농가와 마구간이 시커먼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찾고 있는 악마의 흔적이었다. 불타는 발굽 자국과 타다 만 동물과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사악한 거인이 공중으로 집어 던진 후 내팽개친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들의 그을린 얼굴은 하나같이 공포에 뒤틀려 있었다. 흐릿한 눈에는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망할 악마들! 지하 세계의 사악한 존재들이 연기와 암흑의 감옥을 벗어난 것이다. 이곳에 눌러앉은 부류도 있었다. 가축의 해골 형상을 하고 고대 신들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이 땅을 배회하던 존재들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갇혀 있는 영혼들을 고문하고, 사악함과 절망으로 가득한 자들의 혼에 고통을 안겨 주며 영겁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천국이 최초의 침략에 점령당했을 때, 낙원은 영영 인간성을 상실했다.


굴복당한 인간들의 영혼은 사악하게 미소 짓는 지옥의 입구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지옥조차도 울부짖는 인간들의 영혼을 전부 붙잡아 둘 수는 없었고, 이들은 곧 불길과 증오로 가득한 채 터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마들이 마침내 악령과 합세한 것이다. 가짜 약장수, 축제 호객꾼, 출장 장의사로 위장해 잔혹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절박한 사람들을 속이는 악마들은 새롭게 탄생한 지옥불과 죽음의 사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제 천국은 텅 비었고, 지옥은 범람했으며, 힘없는 인간들의 영혼은 스스로 만들어 낸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계속되는 파괴의 흔적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나와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기계 천사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선과 악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는 나의 존재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듯했으며, 기적을 일으켜 내면의 어둠을 밝혀 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곧 마주하게 될 전투와 승리에 대한 보상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는 인류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으나, 그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뢰한다. 그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땅거미가 지고 쉴 곳을 찾아 자리 잡을 때면, 그를 지켜보곤 한다. 그는 언제나 불길 속의 깜박이는 숯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1868년 6월 14일

악마가 이끄는 공포의 기사들이 남긴 검은 발굽 자국을 따라 이동한 지 수일이 지나고, 우리는 검은 협곡의 언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리우스의 말이 협곡으로 들어가길 거부해 나 역시 타고 있던 말 '자비'를 남겨 둔 채 걸어가기로 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말이 놀라 적에게 발각되면 곤란하니까.


인간사냥꾼 다리우스는 거대한 도끼를 가지고 다닌다. 도끼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른 듯 자루가 상당히 닳아 있다. 인간 이하의 존재에 큰 공격성을 보이는 보안관들과는 달리, 감정이 없는 자는 공포와 나약함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의 눈은 폭력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주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한다. 노련한 전사들이 그렇듯, 예측하기 힘든 초자연적 존재들에 주의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조약돌이 밟히는 소리 외엔 사방이 고요했다. 다리우스는 악마가 왜 이런 곳에 사느냐고 물어 왔다. 악마에게는 지옥 외엔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우리는 인간에게 살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의 뼈무덤 한가운데 도달했다.


불과 50년 전의 일이었다. 정부는 서쪽 끝으로 후퇴하지 않은 신들을 맹렬히 추격했고, 그들은 연방 정부 보안관의 총 끝에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곳곳에서 돈 냄새를 맡은 자들이 몰려들어 모든 것을 훔쳐 갔다. 너무 크고 무거워 옮길 수 없는 뼈는 이곳에 남겨졌고, 곧 돌에 파묻히고 지형의 일부가 되어 협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담한 최후였다.


다리우스의 웃음소리가 석회암 벽을 따라 깊은 공동으로 울려 퍼졌다. 일그러지고 뒤틀린 소리가 진동하여 거대한 석판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서서히 소리가 잦아들어 마침내 고요해지자, 다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학살자들이 신을 죽이는 데 얼마나 걸렸을 것 같나?" 그가 묻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끼를 어깨에 지고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길을 따라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굶주린 표정이었다.





1868년 6월 15일

다리우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잔혹함이 필요해 고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의 무언가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잠든 괴물을 일깨운 것 같다. 게다가 이제 그 괴물은 전보다 더욱 사악한 기운을 뿜고 있다. 그는 도끼를 손에 단단히 쥐고 결의에 찬 듯 걸음을 옮긴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더 이상 동반자가 아닌 도전자의 그것이다. 힘만 있다면 세계를 두 동강 내는 일도 서슴지 않을 도전자. 그는 내게서 바로 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듯하다. 희미해지는 하늘과 점점 무겁고 뜨거워지는 공기만 아니었다면, 이미 나를 배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밤이 되면 악령과 악마, 그리고 그들과의 계약에 대해 중얼댄다.


"악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고, 악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1868년 6월, 날짜 알 수 없

여정을 계속하자 검은 협곡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진입하자, 피를 타고 울려 오던 속삭임이 점점 흐려졌다. 협곡의 넓고 들쭉날쭉한 돌담이 마치 가시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계곡의 흙과 먼지 위로 기이한 흰색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주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산이 둘러싸여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밤과 낮의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협곡 깊은 곳에 있는 악마의 은신처로 향했다.


다리우스는 신과 괴물, 천사와 악령에 대해 종종 물으며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가 질문하기 전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고, 귓가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양 귀를 털어 낸다. 나는 매일 밤 야영할 때마다 그를 유심히 관찰한다. 조용히 타오르는 불길과 숯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사납게 일렁인다. 그리곤 내게 이곳에서 죽은 신과, 그가 정확히 어떻게 살해당했는지에 대해 캐묻는다.


이따금 그가 자고 있을 때,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며 웃음 짓는 이방인의 그림자가 보인다. 내가 있는 한 감히 접근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들이 왜 왔는지 알고 있다. 악마와의 거래를 절실히 원하는 그의 욕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가 점점 위험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악마를 만나게 될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악마를 처단하는 일은 결코 혼자서 해낼 수 없다. 일을 마치고 나면 그도 이성을 되찾고 이곳을 뒤덮은 안개 역시 마침내 사라지도 모른다.


다리우스가 나를 배신할 때를 대비해 대책을 세워 두었다. 악마와 맞설 때까진 서로가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그는 세상의 끝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운명이 나를 등진다면, 우리 셋 모두 그렇게 되겠지.





???

나는 나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태어나던 순간을 잘 기억하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끌려 와 오래된 기계의 삐걱대는 소리에 둘러싸여 깨어났다. 나의 탄생은 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거대한 은빛 도시에서 발견된 고대 설계도를 기반으로, 한때 그곳에 살았던 존재들의 정수를 채워 창조되었다. 그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하자 나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나는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창조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협곡의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불타는 악마 헤카림의 해골을 최후의 순간까지 기억할 것이다.


계곡 밑바닥에 도착하자 무거운 공기를 뚫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동반자도 이성을 되찾았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긴장감도 마침내 사라진 듯했다. 바위 사이로 나타난 거대한 입구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땅에는 작은 불씨가 깜박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증오로 가득 차 언제나 헤카림을 따르는 악령 기수들이 분명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우리는 무기를 꺼내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는 어두운 통로뿐, 기수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늠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어두운 길을 따라 이동했다. 안은 용광로처럼 뜨거웠고, 빛이라곤 바닥을 따라 늘어선 잿더미의 불씨뿐이었다. 한참을 들어가자 협곡 반대편 끝의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적황색 불이 뱀의 혀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악마가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악마를 쫓는 동안, 그 역시 우리를 쫓고 있었다. 그것이 악마의 본능이다. 악마는 지옥의 왕이며, 고대 귀족이나 동쪽 땅의 고위 관료처럼 부유하고 고귀한 자들을 찾아간다. 악령은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기만한다. 그들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 후, 그 끔찍한 선물의 무게를 느끼고 나면 대가를 받아 간다. 그러나 악마는 항상 철저하게 계획하며, 언제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다리우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거대한 장작불처럼 강렬한 불길이 서려 있었다. 매일 밤 불꽃 속에서 지켜보던 무언가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우리는 녹아내린 돌과 타오르는 열기가 한데 섞인 공간에 도달했다. 그 주변은 협곡의 능선만큼이나 높은 불기둥에 둘러싸여 있었다. 중앙에는 헤카림이 서 있었다. 거대한 검은 말의 형상에 인간의 상체가 붙어 있고, 불타는 말의 해골이 머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끝에는 흉측한 뿔이 자욱한 연기에 싸여 있었다. 그가 입을 열자 산 전체가 서서히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긴 왜 온 거지?


다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그가 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은 이미 말했을 테니까. 어쩌면 자고 있을 때, 어둠으로 가득한 꿈속에서, 혹은 긴 여정을 하는 동안 돌과 먼지를 밟으며 그는 힘을 원한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다리우스는 나를 대신해 대답하 듯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새빨갛게 불타는 도끼가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


나는 두 개의 화살을 발사했고, 두 발 모두 명중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찌를 수 있는 힘.' 다리우스는 계약을 완료하기 전에 땅으로 쓰러졌다.


아무 말 없이, 인간사냥꾼 다리우스는 그렇게 끝났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악마를 향해 다시 화살을 겨눈 순간, 다리우스가 일어났다. 얼굴은 증오 가득한 미소로 일그러져 있었고, 도끼는 지옥의 힘을 받아 빛났다. 그리고 그 뒤의 불길 너머로 악령 기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헤카림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동굴을 따라 도망쳤다. 검은 협곡의 굽이진 통로를 올라 말을 타고 드넓은 평야로 달렸다. 지옥의 군단과 사악하고 난폭한 남자의 그림자가 나를 맹렬히 추격했다. 악한 자들은 그러한 힘에 이끌리고 휘둘리다가 결국은 무기가 되어 이 땅과 모든 생명을 먼지로 만들게 마련이다.


나는 변경에 있는 마을, 천사의 안식처를 향해 달렸다. 그곳에 악마 사냥꾼이자 개척지에 살던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남자가 살고 있다. 무질서한 패거리를 모아 위협에 대적할 수 있는 자다. 모두를 종말로 몰아넣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울 생각은 없을지 몰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싸울지도 모른다.


이 일기를 찾았다면, 우리의 싸움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힘을 모으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옥이 다가오고 있다. 하나가 되어 맞서지 않으면, 서부를 영영 잃게 될 것이다.

 

 

 

 






댓글 4 | 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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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카이사"
히이잉? | 14.7.***.*** | 19.10.23 01:34

세계관 하나하나 갈아엎다보니 슬슬 잡혀가네

최전방고라니 | 45.64.***.*** | 19.10.23 00:05

바루스 3p 짓거리 이후로는 괜찮은거같음

킹크림슨 | 175.223.***.*** | 19.10.23 01:10
BEST

"야, 카이사"

히이잉? | 14.7.***.*** | 19.10.23 01:34

카이사는 언제 카사딘 만나려나

솔라뎀 | 175.223.***.*** | 19.10.2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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