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 짤에 나온 것처럼 임진왜란 때의 도움으로 조선에게 명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라는 밈이 생겼다 과연 조선은 명을 무조건 칭송만 했을까?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2월 17일 신사 2번째기사 1668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이어 명나라 말기의 일이 언급되어 송준길이 아뢰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023)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되지만, 만력(萬曆)024)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으로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승정원 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5월 18일(계미) 맑음
상이 이르기를,“중원의 분위기는 어떻던가?”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중원 사람들은 조불려석(朝不慮夕)입니다. 사대부들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들까지도 모두 전리(田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하고, 김지수가 아뢰기를,“운남(雲南), 귀주(貴州) 등지의 적(賊)들이 침략을 그치지 않고 있고 동호(東胡) 또한 그러합니다. 게다가 지난해에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극에 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천명이 곧 다할 것이라고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천조의 일 또한 한심스럽다.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4월 18일(임진) 맑음
윤방이 아뢰기를,“송(宋)은 인후한 나라이므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에 있어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간관을 대하는 것이 지나치게 야박한 듯하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대명(大明)의 법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되었는가? 아마도 잘못된 폐습을 인습하고서 고치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인조 5년 정묘(1627) 5월 18일(계미) 맑음
목서흠이 아뢰기를, "중원(中原)에서는 직임이 종반(從班)에 있는 자도 청구(請求)한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탐욕스러운 풍조가 매우 놀랍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이렇게 비루한 일은 없지만 직임에 태만한 것이 하나의 폐단을 이루었다."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8월 23일 무인 2번째기사 1644년
상이 이르기를,"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2년 병오(1726) 10월 5일(계해) 맑음
상이 이르기를, 한나라와 송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는 끝내 중흥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원진이 아뢰기를, “한나라의 사백년 기업은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진(秦)나라의 혹정을 없앤 것에서 실로 근원합니다.
한 고조(漢高祖)는 관후(寬厚)함으로 나라를 세워 인심을 굳게 결속시켰으므로, 한나라가 비록 중간에 망했어도 사람들이 한나라를 다시 그리워하여 얼마 안 가서 중흥한 것입니다.
송나라도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우고 의리를 크게 밝혔으므로, 그 힘은 병력의 약함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와 금의 강함으로도 송나라를 망하게 하지 못하였고, 원 태조의 강함으로도 송나라가 날로 쇠미해 갈 때를 맞아서도 단번에 멸하지 못하고 4세나 지난 세조에 이르러서야 통일할 수 있었으며, 애산도 해전(崖山島海戰)에서는 송나라의 군민(軍民) 수만 명이 한 사람도 흩어지지 않고 같은 날에 죽었습니다. 이는 실로 인후함으로 나라를 세워 인심을 굳게 결속하였고 의리를 크게 밝혔기 때문이니, 나라를 가진 자라면 정사를 인후하게 하고 의리를 밝히도록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명(明)나라는 정령이 엄하고 살육을 좋아하여 인후함으로 나라를 세워 인심을 굳게 결속할 수 없었으므로, 한창 왕성할 때였는데도 일개 유적(流賊)을 만나자 적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쳐서 마침내 망하게 되었고, 망한 뒤에는 백성들이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았으므로 또한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연경(燕京)은 오랑캐 땅에 바짝 다가가 있습니다.
아마도 오랑캐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제압하고자 한 것일 테지만, 후세에 나라가 쇠하게 되면 오히려 오랑캐에게 쉽게 핍박당할 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처사입니다. 오랑캐의 기병이 관문을 들어온 지 수일도 안 되어 막아 주는 울타리가 없이 바로 황성(皇城) 아래에 이르렀으니, 이래서야 어찌 근본을 튼튼히 하고 오랑캐에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영종(英宗)이 토목(土木)의 변에서 에센[也先] 군대의 포위망에 빠져 사로잡혔으니, 이것이 그 증험입니다. 명나라 유학자도 이 점을 말했는데, 뒤에 모두 증험되었으니 또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명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역수(曆數)에 밝아, 자손에게 두 구(句)의 이름을 지어 주어 한 구가 끝나도 다시 한 구가 있게 하였습니다. 국호를 명이라 한 것도 해와 달의 뜻을 취한 것이니, 해는 중천에 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중천에 뜨며, 달은 차면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다시 찹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명나라가 다시 일어날 조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나라의 중흥은 모두 망한 지 오래되지 않아 일어났는데 지금 명나라가 망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어찌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주씨(朱氏)가 부흥한다 해도 요임금의 후손으로 한나라 고조가 부흥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한나라와 송나라의 중흥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명나라가 망한 지 지금 100년이 다 되어 가니 어찌 부흥할 수 있겠는가.
주씨가 부흥한다 해도 요임금의 후손으로 한나라 고조가 부흥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좋은 비유라 할 만하다.”
이 여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은 명나라의 실저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만력제를 가리켜 정사를 돌보지 않은것은 경계로 삼고 절대 본받으면 안될 혼군으로 평가했으며
인조는 수차례 명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는 등 은근히 명나라에 부정적인 태도를 많이 보였다.
인조가 명나라에 다녀온 김상헌과 김지수에게 명나라에 대한 일을 묻자 김상헌은 사대부들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들까지도
모두 전리(田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답했고 김지수는 백성들이 명나라는 천명이다했다며 두려워 하고 있다고 말하자
인조는 명나라에게 크게 실망하며 천조의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며 명나라를 한심하다고 평했다
1632년 4월 11일에는 인조가 신료들과 명나라의 일에 대해 논할때 명나라의 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으며,
1636년 4월에도 명나라 내부의 부패한 풍조를 논하면서 명나라의 탐욕스러운 풍조가 매우 놀랍다며 반응했다.
명나라가 끝내 멸망했을 때는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없는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 그렇다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영조와 조정신료들 역시 남송과 명나라를 비교하며 명나라를 비판했다.
조선에서도 만력제가 조선을 도와준 것에 고마워는 했지만 명나라를 몰락시킨 원흉이며
명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명나라가 망할만 해서 망한 나라로 평가했다
장제스도 정작 대만에선 평가 안좋던데
ㅇㅇ 명나라가 쩔어서 만력제 시기에 안망한거
고마운건 고마운데 중박은 쳐줘야 주작이라도 해보지
사실 임진왜란은 그렇다 쳐도 후금 건국이나 병자호란의 직간접적 원인이 명나라 만력제라는 걸 생각하면...
그렇군
만력제 업적 - 세금은 은으로 받아야지 -> 이후 전 세계 은이 청으로 -> 아편전쟁 시작 - 조선은 그냥 도와 -> 요동군 와해 -> 후금(청)의 성장 - 조선 : 와 역시 유가 사상 대로 천자(명)을 믿으니까 왜로 부터 우릴 지켜줬다 이제 이걸 교리로 체계화 한다!!! -> 후에 청이 아편전쟁으로 줘 터지든, 일본이 메이지 유신 하든 알빠노 공자님이 최고!! (ㅄ 국가 탄생)
장제스도 정작 대만에선 평가 안좋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