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자매들 1편: 묵은 상처
by 이안 세인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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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어둠 속에서 티팔렌지는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가 들려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는 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뜨끈하고 역겹도록 달콤한 그 어둠은 썩어 버린 꽃의 냄새처럼 방 안을 채웠다. 어리지만, 평생을 룬과 함께했던 티팔렌지는 자신을 둘러싼 어둠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없습니다."
"좋아."
어둠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스승이 높이 평가하더구나. '유능'하다고." 어둠은 티팔렌지의 스승 목소리를 흉내 내더니 덧붙였다. "유능한 아이들은 쓸데가 많지."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기가 옅어지면서, 마치 사람들로 가득 찬 것처럼 방안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옆을 힐끗 바라보자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와 목소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달을 주시해라."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바닥이 은빛으로 빛났다. "달의 움직임과 위상의 변화를 살펴라."
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했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허락된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업을 우선시해라."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티팔렌지의 턱을 잡았다. "네가 찾아야 할 것은 대체될 수 없다." 손이 머리를 들어 올리자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대체될 수 있지."
에라스는 녹서스의 아들이었다. 제국에 편입된 이후 태어난 첫 세대였던 그는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용기와 규율, 의지에 관해 배웠다.
그는 목자들과 함께 자랐다. 가축과 짐 나르는 짐승을 수확철이 올 때까지 돌봤다. 살생하는 법도 배웠다. 늘 몸에 지니는 단검으로 빠르고 깔끔하게 해치웠다. 녹서스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필요한 기술이었다.
그는 제국의 적을 죽이더라도 미워하지는 말라고 배웠다. 명예와 목적의식을 심어 주면 녹서스의 형제자매들처럼 동지가 될 수 있다고, 그래야 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죽이든지 가족이 되게 하라.' 전쟁이 남긴 흉터를 보여 주며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에라스는 적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정체조차 모르는 적을 동정하게 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거리를 채웠다. 수만의 병사가 불멸의 요새 도로를 행진했다. 전투 구호와 행진 신호, 전쟁 노래가 수십 가지 언어로 울려 퍼졌다. 제국 전역에서 활약하던 녹서스 군의 진정한 힘이었다. 가죽옷과 의식용 예복을 입은 부족 전사들 뒤로 검은 판금 갑옷을 입은 병사들, 밝은 복장의 슈리마 출신 해군이 보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병력이 뒤를 이었다.
하나의 제국을 위해 모인 그들의 무력시위에 에라스는 숨을 죽였다.
수도 북쪽의 달라모르 평원에서 온 에라스의 부족은 아직 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노를 저으며, 도착 이틀 전부터 보이던 불멸의 요새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거의 도착했을 때, 족장 야비가 갑판수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에라스는 훨씬 더 가까워진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요새 중앙에 자리 잡은 세 개의 거대한 탑 뒤로 태양이 보석처럼 빛났다.
에라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녹서스의 적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대체 누가 이 힘에 맞서겠어?'
그때 창병 도니스가 에라스를 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족장이 손짓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앞에 가서 섰다. 야비의 손에는 막 지급받은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곧 이동한다." 명령서를 훑어보며 야비가 부족의 언어로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들으셨어요?" 에라스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아니." 인상을 쓰며 명령서를 읽던 야비가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상관없어. 넌 따로 갈 데가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에라스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족장님의 종자인데요." 출정하기 직전 피의 시험을 통과해 쟁취한 자리였다. 야비의 무기를 보관하고, 전투 전야에 유물검의 날을 갈고 기름을 칠하며, 장비를 입히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종자의 임무였다. 야비가 전사하면 시신도 수습해야 했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종자 역할은 하게 될 거다. 다만 다른 곳으로 파견됐을 뿐이지." 에라스가 당황하자 야비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녹서스를 위하여."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곧추세우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경례했다. "제국을 위하여."
야비는 경례에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제국의 부름을 받으면 응답해야지. 날카로운 검과 강인한 정신으로 무장한 채로 말이야."
심호흡을 하며, 에라스는 실망감을 떨쳤다. "전 준비됐어요."
줄곧 굳은 표정이었던 야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 에라스. 그분도 널 보며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에라스가 고개를 떨구자 야비가 단단하게 묶인 두루마리를 건넸다. "앞에 보이는 운하를 건너 요새의 아홉 번째 관문으로 가라. 군단병이 막거든 이 두루마리를 보여 줘."
트리파르 군단을 생각하자 그는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두루마리는 표백된 종이였다. 생전 처음 본 종이는 부족의 임무가 적힌 양피지보다 부드러웠다.
"운명이 네 길을 정해 주었나 보다, 엔하시." '엔하시'는 부족 언어로 출정을 앞둔 전사를 뜻했다. 야비는 흉터투성이인 손을 에라스의 어깨에 올리며 덧붙였다. "잘 따라가 봐."
에라스는 전투에 임할 각오를 다지며 도시의 인파 사이로 걸었다. 외딴 목자 마을에서 자란 그는 수도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대의 행진으로 다져진 거리 옆으로 돌과 철, 유리로 만든 기념물과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팔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언어가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던 그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임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부족에서 녹서스어를 배운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에라스는 공용어인 바-녹서스어와 제국의 옛 문자는 어느 정도 알았다. 덕분에 표지판을 보고 새 지휘관이 기다리는 아홉 번째 관문으로 갈 수 있었다.
장비가 든 자루를 어깨에 멘 채로 에라스는 조끼로 손을 뻗었다. 손은 목에 건 뼈 펜던트를 만졌다가, 표백된 종이로 된 명령서로 옮겨 갔다. 누구를 섬기게 될지, 어떤 중요한 임무를 맡을지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관문 앞에 도착한 사실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두 형체 앞에 선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코시스 그비아르!"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에 에라스는 얼어붙었다. 키보다 큰 도끼창 두 자루의 날이 가슴 높이에서 번득였다. 창의 주인은 검은 판금 갑옷을 입은 거구의 병사들이었다. 어깨에서는 핏빛 망토가 뻗어져 나왔고, 징 박힌 투구에 달린 무표정한 가면은 얼굴을 가렸다.
에라스는 숨을 죽였다. 그들은 트리파르 군단병이었다. 관문에는 빗장이 없었다. 녹서스 최고의 정예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기에 빗장은 필요 없었다.
다른 군단병이 또다시 수하를 했다. 가면 때문인지 그들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들어 보는 방언에 에라스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녹서스어인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운 내용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군단병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거칠게 헛기침을 했다.
"어디로 가느냐, 꼬마야?" 한결 또렷한 목소리였다.
마침내 알아듣게 되자 에라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에 여전히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천천히 조끼 안으로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군단병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두 병사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에라스에게 말을 걸었던 쪽이 도끼창을 어깨에 메고,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었지만, 군단병의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령서를 건넸다.
군단병은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철갑을 두른 두꺼운 손 안에서 종이 두루마리는 보잘것없어 보였다. 주먹을 쥐자 붉은 봉랍이 바스러져 쏟아지면서 명령서가 풀어졌다. 내용을 확인한 후, 군단병은 홱 돌아서더니 도끼창의 자루로 매끈한 돌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자루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굉음이 아치형 관문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가죽신을 신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예복을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붉은 두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단병의 기세에 전혀 위압되지 않은 그녀는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따라와." 여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하더니 안뜰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에라스는 서둘러 따라가며 뒤를 돌아봤다. 군단병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운하를 건너 분주한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병력이 오가고, 막사가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대로를 피해 좁은 골목만 골라서 걸었다.
얼마 후,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자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푸라기와 풀, 배설물의 냄새였다. 낮게 짖는 소리도 들렸다. 일부는 에라스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좁은 골목이 끝나고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그곳은 동물을 돌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동물이 우리 안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양의 상태를 확인하고 닭의 머릿수를 세었다. 원래는 공원이나 정원으로 쓰이던 곳 같았지만, 지금은 대규모 병력 동원을 위해 징발된 듯했다.
익숙한 광경에 에라스는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후, 여자는 광장 외곽에 있는 막사 앞에 멈추더니 두루마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입구를 열어젖힌 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곧바로 사라졌다.
막사 안의 공기는 차가웠고, 강한 향냄새로 가득했다. 어찌나 강한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에라스는 코를 찡그리며 내부를 살폈다. 막사 중앙에 무릎을 꿇은 한 여성에게서만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는 검에 빛나는 초록색 룬 문자를 새기고 있었다.
에라스는 룬 문자가 춤을 추며 검날에 새겨지는 광경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어릴 때 봤던 부족의 주술사들이 떠올랐다. 주술사들은 의식을 치르기 위해 공기로 불꽃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는 룬 문자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곁눈질만 해도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마지막 룬 문자를 새겨 넣자 검이 떨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에라스를 바라보더니, 떨어지는 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고드립니다." 에라스는 재빨리 차려 자세를 취하고 경례했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건네며 덧붙였다. "제 명령서입니다."
여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검을 받침대에 올렸다. 그리고 막사 중앙에 있는 등불을 켰다. 황색의 부드러운 불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여자는 키가 컸으며 피부색이 어두웠다. 에라스가 나고 자란 북부 지방 출신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에라스를 바라봤다. 두 눈은 룬 문자와 같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나?"
에라스는 머뭇거렸다. 바-녹서스어로 말했지만, 수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경쾌하고 감미로운 억양이었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표정으로 볼 때 여자는 지쳤거나 지루한 듯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압니다, 마님."
"명령서를 읽어 보았나?" 언제 낚아챘는지, 여자는 명령서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좋아." 여자는 종이를 소매 안으로 찔러 넣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티팔렌지다. 지금부터 내 말은 곧 법이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만 읽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만 지키면 별 탈은 없을 거야. 이해했나?"
에라스는 다시 경례하며 대답했다. "예, 마님."
"수도를 벗어나면 경례는 금지다." 그녀는 탁자에서 장부를 집어 들더니 내용을 살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마님?"
"이번만 허락하지."
"어떻게 모시면 되겠습니까?"
그녀는 장부를 덮으며 대답했다. "어린 짐승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 달라모르 평원 출신이지?"
"그렇습니다. 저는 양치기였습니다." 에라스는 화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족장의 종자가 되기 위해 피의 시험에서 사촌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는데, 다시 짐승이나 돌보라고?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는 좀 더 특별한 동물을 돌보게 될 거야."
그때 누군가 막사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에라스는 단검에 손을 뻗으며 돌아섰다.
"가만히 있어." 티팔렌지가 말했다. 에라스는 조금 전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용 사냥개 네 마리가 막사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물결 모양의 탄탄한 근육과 가시가 돋친 껍질,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평원의 부족들이 제국에 편입될 때, 대족장이 용 사냥개 새끼 한 마리를 하사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다. 새끼 한 마리는 마차 세 대 분의 은화보다 더 값지다고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사냥개들 뒤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판금 가면 뒤로 눈빛이 번득였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은 질끈 묶어 마치 갈기처럼 찰랑였다. 여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사냥개들이 두 마리씩 좌우로 움직이며 길을 냈다.
"아렐." 티팔렌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리 왔네, 추적자."
에라스는 아렐을 바라봤다. 용 사냥개를 네 마리나 거느린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마님은 귀족이십니까?"
아렐은 갑옷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힐긋 보더니 다시 티팔렌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종자야." 티팔렌지는 에라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귀족을 토코골로 보내는 일은 없어."
"서부 전선이군요." 에라스가 대답했다. "토코골은 어떤 곳인가요, 마님?"
"추웠지." 아렐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양이 매우 독특했다.
"그렇군요. 돌아오는 길은 어떠셨나요?"
"멀더군." 아렐은 티팔렌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에라스는 깜짝 놀랐다. "저 때문에 불쾌하셨습니까, 마님?"
"넷째야." 아렐이 부르자 용 사냥개 한 마리가 에라스와 그녀 사이에 섰다. 근육질의 몸에서 사나움이 느껴졌다. 비쩍 마른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녀석은 거품을 물며 침을 흘렸다.
"불쾌했다면 이 녀석이 먼저 반응했을걸. 그리고 난 네 마님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에라스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어지간하면 부르지 마." 자꾸 말을 시켜서 목이 아프다는 듯 그녀는 날카롭게 대답하더니,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밖에 병참 장교가 보급품을 싣고 있을 거야." 티팔렌지가 요청서를 건네며 말했다. "찾아가 봐."
에라스는 조심스럽게 아렐과 사냥개들을 피해 막사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아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왜 나를 불렀지, 룬 세공사?"
"바실리스크는 처음 보나?"
거대한 야수에 정신을 팔린 나머지 에라스는 병참 장교의 얘기를 못 들을 뻔했다.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긴 바실리스크의 초록색 피부는 쇠처럼 단단했고, 통나무처럼 두꺼운 다리와 꼬리에는 근육이 가득했다.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어떤 동물을 돌봤지?" 병참 장교가 물었다.
"전 양치기였어요."
"걱정하지 마." 에라스의 등을 치며 그가 말했다. "덩치가 큰 양이라고 생각해. 아직 새끼라서 사납지는 않아."
"이게 새끼라고요?"
병참 장교가 키득거렸다. "다 자란 녀석은 성벽을 부술 수 있지."
에라스는 티팔렌지가 준 요청서를 살폈다. 다행히도 쉬운 내용이었고 그마저도 숫자가 대부분이었다. 모르는 부분은 병참 장교가 설명해 주었다. 이 바실리스크는 야영지 구축에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짊어질 예정이었다. 다만 세 사람이 쓰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았다. 아렐의 용 사냥개를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다 준비됐나?" 등 뒤로 티팔렌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한 그녀는 등에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을 메고 있었다. 발치에는 천으로 만든 배낭이 보였다.
"거의 다 됐습니다. 가죽 부대만 실으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잘됐군." 티팔렌지가 해의 높이를 확인하며 말했다. "남쪽 관문의 마차들과 함께 해가 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해."
"길이라고요?" 에라스가 물었다. 수도에 도착한 후로, 자기 부족을 비롯한 녹서스 병력이 부두의 수송선으로 향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바다를 건너지 않고요?"
티팔렌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본토에서 할 일이 남았어. 찾아야 할 사람이 있거든."
일행은 혼돈 속 질서가 유지되던 수도에서 출발했다. 에라스와 아렐, 티팔렌지는 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불멸의 요새를 뒤로 하고 녹서스 남부의 초원 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향했다. 행렬은 붉은 깃발과 검은 강철로 된 거대한 뱀처럼 보였다. 평원을 건너며 에라스는 고향 달라모르를 생각했다.
"우린 수가 너무 많아." 야영을 하던 어느 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하사관이 배급을 기다리며 말했다. "수도의 부두는 규모가 크고 밤낮으로 가동되고 있지만, 총동원에는 부족한 수준이지."
"그래서 동쪽으로 가는 건가요?" 에라스가 물었다.
하사관은 투덜거렸다가, 양철 그릇에 스튜와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채워지자 미소 지었다. "나머지 병력이 눅눅한 수송선에 처박혀서 쥐새끼들과 동침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편하게 지내야지. 어차피 곧 배를 타야 하니까."
"어디로 가나요?" 식사를 배급받은 에라스가 요리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무도 얘기 안 하던가? 우린 아이오니아로 간다."
에라스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음식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가슴팍에 있는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다. '아이오니아.'
"다음 사람도 받게 비켜." 하사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라스는 나직이 말했다. "지난번에 제국에서 전쟁을 한답시고 부족 남자들을 절반이나 데리고 갔어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죠."
"그럼 이번에 복수하면 되겠군." 하사관이 상의를 내리자 가슴에 난 붉은 흉터가 보였다. 마치 번개처럼 갈라진 기이한 형태였다. "마법 때문에 이렇게 됐지. 나 말고도 빚이 있는 자들이 많아. 오래 참았으니 이제 갚아 줘야지."
에라스는 억지로 희미하게 웃어 보인 다음 숙소로 돌아갔다. 더는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료한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병력은 지정된 항구로 조금씩 흩어졌다. 냉담한 티팔렌지와 아렐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에라스는 바실리스크를 돌보는 임무에 집중했다.
몸집이 거대하고 힘도 어마어마했지만, 수도의 병참 장교 말대로 녀석은 새끼였다. 순하고 말도 잘 들었다. 언젠가 아렐의 용 사냥개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직 주인만 따라다니며 순종하는 짐승이었다.
그는 바실리스크에게 '탈츠'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어릴 때 기르던 목양견의 이름이었다. 풀을 뜯으러 가거나 수송대와 함께 이동할 때, 녀석도 새 이름을 알아듣고 에라스를 따랐다.
출발 일주일째, 티팔렌지는 에라스와 아렐을 불렀다. 본대가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는 동안,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블러드클리프로 간다." 티팔렌지가 말했다. 에라스는 멀어지는 수송대의 모습을 바라봤다. 녹서스 전사들은 흐트러짐 없이 해안으로 향했다.
"거기는 왜요?"
"사람을 찾아야 하거든."
일전에 티팔렌지가 했던 말이 떠오른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탈츠의 등에 실은 보급품을 살피며 물었다. "누구인가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나아드'지." 아렐이 손바닥에 물을 부어 사냥개들에게 먹이며 말했다. 첫째의 귀가 쫑긋했다. 에라스는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렐은 티팔렌지를 비웃으며 덧붙였다. "시간 낭비야. 그 여자는 없어도 돼."
"판단은 내가 해." 티팔렌지는 딱 잘라 대답하더니, 에라스를 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마리트라는 여자를 찾아야 해."
"허구한 날 혁명이 일어나기 전,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귀족이었는지 떠벌리는 여자야." 아렐이 툴툴거렸다. "토지와 권력을 빼앗긴 지금도 꿈속에서 사는 듯하더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자기네 가문 영토가 얼마나 근사한지 자랑하더니. 완전히 시궁창이잖아?"
"대신 군인으로서는 뛰어나지. 실전 경험도 많아서 도움이 될 거야. 불평은 그만해."
일행은 메마른 평원과 무더운 구릉 지대를 지나 블러드클리프로 향했다. 늘 안개로 뒤덮인 달라모르에서 살아온 에라스에게 더위는 낯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지독히 더운 날씨가 이어지자 그는 식수를 신경 써서 관리했다.
순간 아렐이 걸음을 멈췄다. 에라스는 아렐을 바라보며 탈츠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지하라는 신호였다. 아렐은 무릎을 꿇더니 땅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뭔가 접근하고 있어."
탈츠의 등에 탄 티팔렌지가 허리띠에서 놋쇠 망원경을 꺼내 전방을 살폈다. "기수들이다. 녹서스인은 아니군."
언덕 위로 두 개의 작은 형체가 보였다. 말을 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손을 내려 가죽으로 감싼 언월도의 자루를 쥐었다. 따분한 여정이 지겨웠던 그는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둘째, 셋째야." 아렐이 호출하자 용 사냥개 두 마리가 앞으로 나왔다.
"잠깐." 티팔렌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게 다가 아니야."
후방과 양쪽에 더 많은 형체가 나타났다. 일행을 향해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나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약탈조야. 원형으로 진형을 갖춰." 티팔렌지가 룬 검을 뽑으며 말했다.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수들이 가까워지자 천둥이 치는 듯 요란했다. 에라스는 탈츠 쪽을 돌아봤다. 날뛸 때를 대비해 묶어 둘 요량이었다. 그때 티팔렌지가 머리를 치며 말했다.
"집중해!"
그는 탈츠를 내버려 두고 언월도를 뽑았다. 그리고 아렐과 티팔렌지의 사각을 방어했다. 약탈조의 모습이 완전히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경량 갑옷으로 무장한 채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미늘창 끝에는 청록색 깃발이 달려 있었다.
일행은 돌격에 대비했다. 에메랄드빛 불꽃이 티팔렌지의 검에서 피어올랐다. 아렐의 사냥개들도 울부짖었다.
그러나 기수들은 공격하지 않고 일행 주위를 둘러쌌다. 말들이 일으킨 먼지가 시야를 차단해, 에라스에게는 적들의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몸을 피하자 에라스가 서 있던 자리에 창이 박혔다. 그때 아렐이 명령을 내렸다. 사냥개 한 마리가 먼지 속으로 돌진했다. 티팔렌지는 귀가 아플 정도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검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이-라-데크!"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초록색 파동이 발사되었다.
적에게 명중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아렐의 사냥개가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때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의 먼지가 요동쳤다. 그리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는 멀뚱히 선 채로 생각했다. '안 도와주고 뭐 해?'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에라스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언월도를 들고 부족의 전투 구호를 외치며 전방의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흙먼지가 옅어짐과 동시에 눈을 뜨자, 말이 아닌 다른 동물이 보였다.
그리고 기수는 에라스의 목에 창을 들이댔다.
"진정하라고." 그때 나긋나긋하고 고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쁜이가 오늘 배불리 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먹이를 마다하진 않을 테니까."
여자는 창날을 에라스의 턱밑에 대고 들어 올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나, 얼굴은 철가면과 검은 가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창끝에는 녹서스의 깃발이, 양어깨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의 깃발이 망토처럼 묶여 있었다.
호기로운 모습의 그녀는 두 발로 걷는 짐승을 타고 있었다. 근육은 날렵했고 꼬리는 채찍처럼 길었다. 마치 도마뱀과 새의 중간 모습이었다. 사나운 얼굴의 그 생명체는 피로 물든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자 약탈조의 시체가 보였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이었다.
에라스는 가면 뒤로 여자의 눈빛이 느껴졌다. 마치 뚫어질 듯이 그를 살피더니,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창을 휘둘러 약탈조의 깃발을 잘라 냈다. 다시 보니 나머지 깃발도 이미 안장에 달려 있었다. 그때 티팔렌지와 아렐이 다가왔다.
"아렐, 이 지독한 '나아드' 같으니." 여자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어디 있다가 불려 왔어? 듣기로는 자운의 시궁창에서 현상범들을 잡고 있다던데." 그러더니 과장되게 몸을 떨며 덧붙였다. "거기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네."
"마리트." 에라스는 무심하게 대꾸하는 아렐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냉담한 그녀였지만, 마리트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차가웠다. 심지어 눈빛도 사뭇 달랐다.
"친구들이야?" 마리트가 에라스와 티팔렌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은 아닌 것 같네."
"반갑군." 티팔렌지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고 당신 말대로야. 제국의 명령을 전하러 왔지."
티팔렌지가 두루마리를 건넸다. 가면 아래로 마리트의 검은 눈동자가 두루마리와 티팔렌지를 번갈아 살폈다.
"명에 따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읊듯 내용을 읽고는, 다시 티팔렌지에게 두루마리를 돌려주었다. "가짜 같지는 않네. 언제 출발하면 돼?"
"당장."
"좋아. 그런데 이 녀석은 종복인가?"
에라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저는 종자입니다..."
"마님이라고 해야지." 마리트는 자신이 탄 짐승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 우아한 아가씨는 오로곤티스의 레이디 헨리에타 엘리자 바스페이시언 4세야. 넌 그리 똑똑해 보이진 않으니 그냥 헨리에타로 불러."
헨리에타가 근육질의 목을 돌려 에라스를 바라보더니, 송곳니 사이로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헨리에타는 뭘 먹나요?" 에라스가 물었다.
"내 신경을 긁는 것들." 마리트는 자신의 천막으로 몸을 돌렸다. "잘 보살펴 줘, 꼬마야. 그리고 나한테 먼저 말 걸지 마."
에라스는 대꾸하려고 하자 헨리에타가 다시 쉭쉭거렸다. 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함께 마리트의 천막을 해체해 탈츠에 실었다. 바실리스크에게 그 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다 자란 녀석은 성벽을 부순다던 그 말이 납득되기 시작했다.
"준비는 끝났나?" 티팔렌지가 물었다.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출발 신호를 했다. 마리트는 광택이 나는 가죽 안장에 올라 녹서스 깃발을 창에 묶고, 다른 깃발을 목에 망토처럼 멨다.
"탈츠, 출발해!" 축축한 땅에서 풀을 뜯고 있던 바실리스크에게 에라스가 소리쳤다.
마리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바실리스크한테 이름까지 붙였어?"
"그래." 아렐이 대답했다.
마리트는 비웃었다. "나중에 잡아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질질 짜겠네."
"저 약탈조 말인데." 생존한 기수들이 도망친 방향을 보며 티팔렌지가 말했다.
"왜?"
"당신이 없으면 또 약탈하지 않을까?"
마리트는 손을 저었다. "어림도 없지. 여긴 우리 가문의 영토야. 말썽을 피우면 갔다 와서 죽이면 돼. 인상 쓰지 마, 주름 생겨."
며칠을 달린 끝에 일행은 블러드클리프에서 벗어났다. 티팔렌지의 지시에 따라 번갈아 가며 이동 중에 눈을 붙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멈추지 않았다. 이동 중이거나 야영을 할 때,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지켜봤다. 그녀는 언제나 일행과 떨어져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낮은 산맥을 둘러서 동쪽으로 이동한 끝에, 해가 뜰 무렵 드라켄게이트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 역시 다른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녹서스 동부 연안 전역에서 총동원이 진행되는 듯했다. 수천 명의 병사와 병기 제조자, 요리사, 건설공, 수리공, 사제, 대장장이가 수송선에 올랐다. 이제 거대한 핏빛 돛을 펼치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널 일만 남았다.
에라스는 도착하자마자 물자를 구하러 다녔다. 수송선에는 병사들과 비교적 평범한 동물을 위한 물자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에라스와 동행하는 짐승들은 다소 독특했고, 그것들을 돌보는 일은 그의 책임이었다. 다행히 티팔렌지의 위임장 덕분에 줄을 서거나 깐깐한 병참 장교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정오가 되기 전, 일행은 승선 준비를 마쳤다.
"저게 우리 배, 아토니아드호야." 티팔렌지가 부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라스는 배를 살펴보았다. 인상적인 선의 형태와 흑철 장갑, 어떤 파도도 뚫고 갈 듯한 붉은 돛까지 영락없는 녹서스 양식의 수송선이었다. 지금껏 그가 탔던 가장 큰 배는 부족과 함께 불멸의 요새로 올 때 탔던 나룻배였다. 하지만 아토니아드호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이미 사람들은 배에 오르기 위해 건널판에 줄지어 서 있었다. 짐승이나 공구, 돌, 목재를 실은 운반대는 그보다 넓은 건널판을 통해 이동했다.
"병사는 별로 없네요." 에라스가 말했다.
"인부들과 석공들이 대부분이지. 아토니아드호는 본섬이 아닌 파엘로어로 가니까." 티팔렌지가 대답했다.
"파엘로어라면 대요새로 가는 건가요?"
"그래. 지금은 대부분 파괴됐지만." 아렐이 중얼거렸다.
파엘로어의 비극은 달라모르까지 전해졌다. 부족 전체가 모닥불 주위에 앉아 주술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겁한 아이오니아인들이 녹서스 요새를 공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통제하지도 못할 마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2주 후,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부족의 전투원들은 수도로 향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출발한다." 티팔렌지가 넓은 건널판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넌 짐승들을 배에 태우도록 해."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렐에게 물었다. "사냥개도 제가 데리고 갈까요?"
그 말에 용 사냥개 네 마리가 에라스를 노려보았다. 화가 났는지 전부 동시에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데리고 간다." 아렐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냥개들이 조용해졌다.
에라스는 탈츠의 고삐를 쥐었다. 마리트도 마지막으로 헨리에타의 턱을 어루만지더니 고삐를 건넸다.
"우리 이쁜이는 혼자 지내도록 해 줘." 에라스가 배에 오르는 동안 마리트가 외쳤다. "다른 것들을 같이 넣었다간 잡아먹고 말테니까."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소금기 때문에 피부가 따가웠다. 열두 척의 배가 아토니아드호와 나란히 움직였다. 붉은색의 돛은 순풍을 받아 불룩했고, 덕분에 갑판 아래 노잡이들은 쉴 수 있었다. 병사들은 따분했는지 전날 해적들의 영역을 지났다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다만 아무리 해적이라도 병사들을 가득 실은 제국 군함을 공격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였다.
배들을 바라보던 에라스 곁으로 아렐이 다가왔다. 그는 경례하려다가 티팔렌지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아렐은 못 본 체했다. 그리고 난간을 꽉 붙잡고 있는 에라스를 보고 물었다. "바다를 건너는 건 처음인가?"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한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 사흘을 더 가야 한대요." 그는 끝없이 펼쳐진 잿빛 바다와 소금에 덮인 함선들에 의해 부서지는 파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큰 바다는 처음 봐요."
아렐은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에라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죠? 아이오니아는 어떤 곳인가요?"
아렐은 뜸을 들였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둘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땅이지. 죽음의 땅이기도 하고."
"아이오니아는 머리가 달아난 거대한 칼날부리나 마찬가지지." 뒤에서 나타난 마리트가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 우리가 머리를 잘랐거든. 지금은 죽은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을 뿐이야."
"나도 칼날부리를 사냥해 봤어. 그것들은 머리가 없어도 위험해."
"그럼 아이오니아와 또 전쟁인가요?" 에라스가 물었다.
마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알겠어? 다만 대장군이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저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무리하도록 내버려 뒀으면 좋겠네."
아렐이 자리를 뜨자, 에라스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망망대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바다의 이름은 뭔가요?"
"이름이 뭐든 무슨 상관이야?" 마리트가 멀어지면서 말했다. "어차피 우리 건데."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에라스는 무척이나 기뻤다.
파엘로어의 요새가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토니아드호는 빨랐지만, 에라스는 항해가 괴롭기 그지없었다.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멀미가 나서 수도 없이 먹은 것을 게워 내야 했다. 옷은 흠뻑 젖었고, 피부는 소금기 때문에 따가웠다.
그는 대부분 선창에서 시간을 보냈다. 짐승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탈츠는 괜찮은 듯 보였다. 먹이를 줄 때만 빼고 우리 안에서 잠만 잤다. 하지만 레이디 헨리에타는 까다로웠다. 날렵하고 힘이 넘치는 탓에 갇혀 지내는 생활을 불편해했다. 그래서 에라스는 더욱 신경 써서 보살폈다. 자칫 잘못하면 잡아먹힐 수 있었으니까. 그저 빨리 도착해서 헨리에타가 맘껏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랐다.
뱃머리의 파수꾼이 육지를 발견하자 에라스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상부 갑판은 구경하려는 녹서스인들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작은 점처럼 보이던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고 선명해졌다. 그리고 안개처럼 보이는 뭔가가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안개의 색은 갈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파엘로어를 둘러싼 녹서스 함선들이었다.
함선들은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룬 채, 쉬지 않고 섬 주변을 돌았다. 최외곽을 순찰하던 호위선 두 척이 접근해 아토니아드호를 세웠다. 그리고 승선용 갈고리를 걸더니 해군 병사들이 건너왔다.
해군 병사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수송선을 검사했다. 선장의 명령서와 화물 목록을 확인하면서도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갑판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예복을 입은 혈마법사 셋이 승선한 병사들을 심문했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주문을 외웠다.
"왜 저러는 거죠, 마님?" 에라스가 티팔렌지에게 물었다.
"속임수를 밝혀내는 과정이다. 자연의 마법 말이야."
에라스는 의아했다. "전부 제국 함선을 타고 온 녹서스 병사들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
"파엘로어에 상륙하면 너도 이해할 거다."
배를 샅샅이 뒤진 병사들은 일부만 제외하고 호위선으로 돌아갔고, 아토니아드호는 다음 봉쇄선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봉쇄선을 지날 때마다 검문과 수색이 진행됐고, 배에 승선한 위병들이 교대되었다. 에라스는 워낙 많이 심문받은 탓에 마침내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들이 과연 자신을 아군으로 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파엘로어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고 나니,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요새는 처참하게 파괴돼 있었다. 중심부의 거대했던 성곽은 흔적만 남았고, 난공불락의 요새는 부러진 이빨처럼 허물어졌다. 망가진 것은 성벽과 망루뿐만이 아니었다. 땅조차도 갈라져서 끔찍한 자연재해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토니아드호가 정박하자 녹서스인들은 선상과 부두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술공들은 지정된 초소로 배치되었고 원자재와 보급품은 육지로 운반되었다. 에라스는 선창으로 내려가 탈츠와 헨리에타를 내리는 데에 집중하려고 했다. 섬의 충격적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선창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넓은 건널판을 통해 탈츠와 헨리에타를 끌고 갔다. 가축을 비롯한 평범한 동물들 사이에서 그 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파엘로어에 상륙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파괴된 군함을 향해 내려가는 선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마치 개미 떼처럼 맹렬히 움직였다.
거대한 윈치와 쇠사슬이 잔해를 하나씩 건져 올렸다. 선원들은 창백하게 변해 버린 시체를 수습했다. 아토니아드호보다 두 배나 큰 군함이었지만, 무릎으로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듯 선체는 둘로 갈라져 있었다.
'대체 어떤 힘에 당했기에 이 지경이 됐을까?'
에라스는 불멸의 요새 아래에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보며 누구도 제국의 힘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파엘로어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마음속에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에라스는 건널판 끝에 도달해 갈라진 바위 위로 건너갔다. 습하고 탁한 공기에서 알 수 없는 향신료 냄새가 났다. 그제야 그는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오니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헨리에타의 고삐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줄도 모른 채, 에라스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헨리에타는 야영지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 에라스는 그대로 뛰쳐나가려다 말고 탈츠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그는 단검으로 탈츠의 고삐를 땅에 고정하고 헨리에타를 쫓아갔다.
"멈춰!" 헨리에타는 천막 사이를 뛰어가다가 멈춰 서서, 긴 목을 돌려 에라스를 바라봤다. 번쩍이는 면갑 사이로 쉬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트가 '헨리에타의 보석'으로 부르는 그 면갑은 얼굴과 머리를 보호하는 방어구이자 쇠로 된 칼날로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한층 더 위력적으로 만드는 무기였다.
"착하지, 가만히 있어." 에라스는 양팔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리 안 치워?" 근처에 있던 한 병사가 소리치자 헨리에타와 에라스가 동시에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배 안에 갇혀 지내서 그래요." 에라스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헨리에타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고삐를 낚아채고 앞다리를 가죽으로 감쌌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인데 혼나고 싶지 않으면 비켜요!"
에라스의 말에 병사들이 물러났다. 잠시 후, 티팔렌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탈츠와 헨리에타를 데리고 티팔렌지와 아렐, 마리트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세 사람 사이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느껴졌다.
"빨리도 오네." 마리트가 헨리에타의 고삐를 낚아채며 비아냥거렸다. 용 사냥개에 둘러싸인 아렐은 쪼그려 앉아 바닥의 돌무더기를 만지작거렸다.
"고대 마법이야." 아렐이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력이 깨어났어."
"마력을 감지하는 건 어디서 배웠대?" 마리트가 의심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기서."
"기가 막히네." 마리트는 티팔렌지를 보며 물었다. "다음 계획은?"
"이곳 파엘로어에서 마지막 동료를 찾아야 해."
"결투장으로 가면 되겠군. 피 냄새라면 환장하니까." 아렐이 말했다.
한 마디씩 주워들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익숙해진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그분도 맹수를 기르시나요?"
"말도 마." 마리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테네프, 그 여자가 바로 맹수니까."
아렐이 말한 대로였다. 파엘로어는 복원이 한창이었지만, 여전히 녹서스군의 주둔지로 쓰였다. 대장간의 망치보다 더 날카로운 쇳소리를 따라가자 병사들의 훈련장이 나왔다.
줄지어 있는 임시 숙소를 지나자 얕은 구덩이가 여럿 보였다. 각 구덩이 안에는 병사들이 두 명씩 들어가 대결을 펼쳤다. 그들은 무딘 검이나 나무 지팡이, 맨손으로 실력을 겨루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구경꾼이 많은 구덩이가 있었다. 일행은 구경하는 병사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구덩이 안에는 판금 갑옷을 입은 녹서스 남녀가 서로 경계하며 빙빙 돌고 있었다. 남자는 연습용 검과 원형 방패로, 여자는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로 무장했다. 두 사람이 거리를 재며 속임 동작을 취할 때마다 구경꾼들은 환호했다.
순간 남자가 빈틈을 발견하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방패로 상대의 얼굴을 노리며 검을 낮게 휘둘렀다. 그러자 여자는 검을 피하며 갈고리를 던져 남자의 방패에 걸었다. 그런 다음 강하게 당기자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다. 진흙탕에 처박힌 남자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피야. 내가 이겼어." 여자가 소리치자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치사하군, 테네프." 남자가 얼굴을 닦더니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번 피를 보는 쪽이 이기는 거로 하자고. 난 아직 안 끝났어."
"한 번으로 약속했잖아." 테네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투에 안 나갈 거야, 세스투스?"
그러자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구덩이 밖으로 나갔다. 테네프는 사슬을 팔뚝에 감으면서, 에라스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리트? 아렐?"
마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사납네, 테네프."
"언제는 안 그랬나?" 테네프는 바닥에 침을 뱉더니, 웃으며 아렐이 내민 손을 잡았다.
에라스는 그녀가 올라올 수 있게 물러섰다. 테네프는 적과 근접했을 때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방패 파괴병이었다. 가죽옷과 철갑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피부는 흉터로 가득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면서 새긴 피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아이오니아에서 얻은 흉터는 얼마나 되는지 에라스는 문득 궁금했다.
테네프가 말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우리는—"
"다 여기 있었지." 마리트가 끼어들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에라스는 세 사람 사이의 유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공허함 역시 존재했다. 말로 할 수 없는, 사라진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군인들과 오래 지낸 덕에 눈치가 빨랐던 그는 그게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아무튼." 테네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발로란에서 오느라 제대로 못 먹었지? 여기 요리도 자랑할 수준은 못 되지만, 배에서 먹은 음식보다는 나을 거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황금색과 주황색, 진홍색, 남색 띠가 하늘을 수놓았다. 일행은 취사장으로 이동해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았다. 밤이 되자 공기가 차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전우들이 서로의 근황과 전장에서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 에라스는 말없이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봐, 꼬마." 테네프가 에라스에게 물었다. "전쟁에 나간 적 있어?"
"네, 있어요."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디서?"
"달라모르 평원 서쪽 국경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였어요. 금방 끝났죠."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며, 에라스는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단순히 전쟁에 호기심을 느낀 민간인이 아닌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언젠가 그를 데리고 싸울 날이 올지도 몰랐기에 전투 경험과 실력을 파악해야 했다.
"비옥한 골짜기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어요. 상대는 몸집이 컸지만, 농사만 지을 줄 알았지 전투에는 서툴렀죠. 빠르게 접근해서 우측면으로 돌격하자 금세 끝났어요."
"땅을 일굴 사람은 남겼나?" 아렐이 물었다.
"그러려고 했지만, 항복한 건 노인들뿐이었어요. 결국 일꾼들을 데리고 와야 했죠.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되니까요."
마리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너는 몇 명이나 죽였지?"
"그만둬." 티팔렌지가 끼어들었다.
"저는 후방 부대에 있었어요. 전방으로 배치될 때쯤에는 이미 싸움이 끝난 상태였죠. 심하게 다친 적들을 마무리하거나 무덤을 파는 게 다였어요."
갑자기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무너진 방어벽 위를 걸어가는데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내려다보니 창에 맞은 남자가 꺽꺽거리고 있었다.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에라스는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창을 뽑아서 목에 겨누자, 남자는 턱을 들어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게 언제지?" 테네프가 물었다.
"지난 봄이었죠."
"풋내기 같으니!" 마리트가 소리쳤다.
"그만두라니까. 어차피 짐승들만 돌보러 온 거야."
마리트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테네프는 티팔렌지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디서 싸웠지, 룬 세공사?"
"여기서 먼 곳." 그녀의 눈빛을 보니 과거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듯했다.
병사에게 잠은 귀했다. 배불리 먹는 식사나 튼튼한 군화만큼이나 휴식은 중요했다. 에라스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아토니아드호에서 눈을 붙이려고 해 봤지만, 깊이 잠들 수 없었다. 그래서 육지에 올라온 지금, 제대로 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뻤다. 그는 일을 다 마치고, 우리 옆 풀밭에 망토를 깔고 누웠다. 짐승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전까지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에 에라스는 잠에서 깼다. 목에서는 차갑고 날카로운 단검의 칼날이 느껴졌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 목이 달아나기 싫으면."
그는 눈을 떴다. 하늘에는 낫처럼 생긴 은빛 달이 걸려 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몇 시간 남은 듯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단검을 거두고 에라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최대한 천천히 야영지 밖으로 걸어갔다.
앞에 사람의 형체가 여럿 보였다. 가까이 가자 사냥개들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체의 주인은 아렐과 마리트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릎을 꿇은 티팔렌지가 있었다.
"꼬마, 아이오니아에는 무슨 볼일이지?" 잠을 깨웠던 여자가 에라스를 티팔렌지 옆에 꿇어앉히며 물었다. 바로 테네프였다.
"저는—"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 티팔렌지가 덤덤히 대답하자 테네프는 단검을 에라스의 목에서 거두어 그녀에게 들이댔다.
"그러는 너는 정체가 뭐지?" 옛 전우들을 돌아보며 테네프는 덧붙였다. "위임장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
"위임장은 진짜야." 그녀의 차분한 태도에 에라스는 등골이 오싹했다. "당신이 맞서려는 힘이 그렇듯이."
마리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우리가 쫓아야 할 사람, 이 녀석은 누군지 아나?"
"꼭 필요한 내용만 말해 줬어. 그 이상은 몰라."
"그럼 알려 줘야겠네." 테네프는 에라스를 보며 말했다. "네가 찾는 사람은 유령이야. 녹서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영웅이자 우리의 전우지." 그러더니 아렐과 마리트를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의 '자매'라고!"
"죽지 않았어."
"거짓말!" 테네프가 날뛰었다. "왜 네 말을 믿어야 하지? 그냥 죽여 버리면 끝인데."
"내가 섬기는 분들은 틀리는 법이 없어. 그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면 살아 있는 거야. 당신들 모두 그 여자와 함께 제국을 위해 싸웠어. 이제 그 여자를 다시 찾아오라는 게 제국의 명령이야. 내 권한은 이곳 주둔군보다 강력해. 우리 임무가 무엇인지 알릴 필요도 없지."
"증거는?" 마리트가 따졌다.
"그 여자의 검." 티팔렌지의 말에 세 사람은 움찔했다.
"검이라니?" 테네프가 물었다.
"그 여자는 검을 부수려고 했어." 티팔렌지가 심호흡을 하자 눈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결국 실패했지만, 내가 섬기는 분들은 그 순간 검에 주입된 마력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지. 그분들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셨어. 그게 증거야."
"만약 살아 있다고 해도 탈영병일 뿐이야. 널 따라가면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탈영은 곧 사형이야."
티팔렌지는 테네프의 노여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녹서스의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날 돕는다면 어떠한 처벌도 없을 거야. 잘 생각해. 그 여자가 배신하면서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당신들도 정의를 원하잖아.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해명을 듣고 싶잖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테네프와 마리트, 아렐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에라스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 파엘로어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이 가겠다."
처음으로 입을 연 아렐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마리트가 쏘아붙였다. "네가 결정하면 따라야 하나?"
"그래." 아렐은 딱 잘라 대답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에라스는 그 소리가 괴롭게 들렸다. "우리는 군인이야.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해. 무엇보다 우리는 자매로서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어."
마리트가 검은 눈동자를 돌려 아렐을 노려보다가 결국 수긍했다. "해명이라."
테네프는 이를 악물더니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마리트와 아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티팔렌지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풀어 주지는 않았다. "거짓말이다 싶으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 마녀."
"난 진실만 말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당장 최초의 땅 중심부로 떠나야 해."
티팔렌지는 처음으로 에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에게 한 약속은 네게도 해당된다. 임무를 완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면 보상이 있을 거야."
"저는 녹서스에 충성하는 전사예요. 그런 약속이나 위협이 없더라도 임무를 다할 거예요. 제국의 명령이니까요.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찾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요?"
티팔렌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최초의 땅에서는 다른 이름을 쓸지도 몰라."
에라스의 눈앞에서 검에 새겨졌던 룬 문자가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길게 이어졌다. 마치 그들 앞에 펼쳐진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길처럼.
"하지만 녹서스에서는 리븐으로 불렸지."
시간을 거슬러
by 마이클 이차오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out-of-time/
(펄스 건 5부작 중 3편;전체 내용은 위의 링크 참조)
응수
'난 급하게 숨을 쉬며 깨어났어.
온몸이 쑤셨지.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려진 것처럼 말이야.
누군가 내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더군. 시야에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어. 엄하고 단호한 표정이 순간 걱정으로 누그러졌지.'
"다행이야. 도약 과정에서 죽은 줄 알았어."
"대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코어의 전류가 왼쪽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좋지 않은데." 여자가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자'가 곧 도착할 거야. 시공간 침략자들도..."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루시안과 판테온은 먼저 출발했어. 케이틀린은 사격하기 좋은 자리를 찾으러 갔고."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말한 세 사람 중 둘은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시공간에서 의식을 차리자마자, 처음 보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듣자니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난 코어를 움켜쥐며 물었다. "지금이 '언제'지? 너는 누구고?"
여자를 살펴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영락없는 시공경관의 차림새였다. 시공 검을 옆에 차고 코어가 부착된 날렵한 형태의 펄스 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생김새로 봤을 때 미래형 모델 같았다. 한쪽 어깨에만 견갑이 달린 제복은 시공경관답게 촌스러웠다.
여자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우리 이즈리얼이 아니네."
"우리 이즈리얼이라니. 난 그냥 이즈리얼이야."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기이한 형태의 복도였다. 구조를 이루고 있는 하얀 금속은 크롬으로 장식돼 매끈했으며,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램프가 파란빛을 발산했다. 마치 펄스 건 수트 내부에 들어온 것 같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도 안 돼. 설마 여기는..."
"시공경관의 요새야. 네가 있어선 안 될 곳이지. 어느 시간대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네가 돌아오기... 아니 '또 다른' 네가 돌아오기 전에." 여자는 눈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안 돌아오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여기가 어딘지, 어느 시간대인지 나도 몰라." 난 캐논을 겨누며 최대한 위협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펄스 건 코어는 내가 가져가겠다."
그때 캐논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기 시스템 출력, 현재 10%" 펄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표정을 보아하니 이 여자도 들은 게 분명했다.
"과거에서 왔나 보네." 머리가 아파 오는지, 여자는 콧등을 어루만졌다. "네가 얼마나 비호감이었는지 잊고 있었어."
나는 귀엽게 얼굴을 찌푸렸다. "비호감이라니. 이렇게 매력적인데?"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는 어느새 접근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 알겠네. 내가 세 번이나 네 목숨을 구할 거라고 했었지."
"이봐,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내 흉갑을 잡아당기더니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작동시키자 코어가 열리며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는 장갑에서 진단 노드와 초소형 공구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혹시... 고치려고?"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코어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루시안이랑 한판 붙었구나? 그럼 그렇지. 그래도 용케 살았네. 루시안은 표적을 놓치는 법이 없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 꼭 들으라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시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에너지 코어가 노출된 상태에서 장난을 쳤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때 복도 반대편이 소란스럽더니, 익숙한 에너지포의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쓰며 소리가 난 쪽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자 그녀는 수트를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어."
푸른 불꽃이 튀고 연기가 솟아나더니, 그녀가 손을 풀었다. 코어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코어의 빛은 평소보다 어두웠지만, 더는 전기를 내뿜지 않았다.
"정말 고쳤네..."
"아마 마지막으로 '한 번'은 도약이 가능할 거야. 어서 가!"
그녀는 돌아서서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다음에 만나면 안 봐준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그걸 나한테 보여 줘."
그것은 장미와 얇은 검이 새겨진 동전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에너지포의 총성이 들렸다.
"이걸로 두 번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 번을 채우는 일은 없길 바라."
"그렇게 말하면 더 불안하거든?" 내 외침에도 그녀는 들은 체도 않고 모퉁이를 돌아서 가 버렸다.
나는 코어를 두드렸다. 마지막 도약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우쭐대는 표정을 보기 싫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또 그 녀석에게 빚을 지긴 싫었는데.
난 한숨을 쉬었다. "펄, 준비해." 캐논을 발사하자 또다시 차원문이 열렸다. "에코에게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