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는 폭포 절벽 위에 살았다. 관점에 따라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장소였지만 사실 바이의 보금자리만큼 살기 좋은 곳은 없었다. 바로 옆에서 폭포는 활기차게 흐르고, 아침이면 따스한 햇살을, 점심엔 시원한 그늘을, 저녁엔 부드러운 노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절벽은 언제나 최고의 경치를 제공하는 곳이다. 까마득한 높이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멋진 장소였기에 바이는 자신의 보금자리에 만족해했다.
바이는 포켓몬이었고 그 중에서도 세비퍼였다. 바이는 세비퍼답게 사나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친절한 성격이었다. 근처의 모든 포켓몬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포켓몬들은 가끔 물을 마시기 위해, 또는 절경을 구경하기 위해 바이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바이는 흔쾌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처음엔 세비퍼를 두려워하던 포켓몬들도 바이의 성품을 알게 된 이후 그들의 선입견을 금세 날려버렸다. 흉악한 송곳니와 날카로운 독침 같은 건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바이는 작고 어린 포켓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바이의 굵고 매끈한 몸통은 때로 작은 포켓몬들에겐 훌륭한 놀이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바이도 귀여운 포켓몬을 좋아했기 때문에 작은 아이들과 자주 놀아줬다. 비록 모르는 이가 보면 세비퍼가 먹이를 먹기 전에 가지고 노는 모습처럼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평화롭고 즐거운 광경이었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바이는 폭포 주변 포켓몬들에겐 일종의,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폭포 주변의 포켓몬들은 바이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자신들의 모습에 때론 당황하기도 했다. 사납고 난폭하기로 유명한 세비퍼가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이라고? 작은 포켓몬을 꿀꺽 삼켜버리는 세비퍼가 아이들의 놀이 상대라고? 하지만 그런 관념과 현실의 차이는 오히려 바이를 매력적인 이웃으로 만들어버렸다. 포켓몬들은 바이를 좋아했고, 바이는 그런 자신을 좋아했다.
'그러니까 참아야 해.'
친절한 이웃이라는 꼬리표는 바이에겐 자랑스러운 트로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이는 그 꼬리표가 자신을 괴롭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바이를 숨 쉬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 평판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음, 맞아, 인사를 해야지?'
바이는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꼬마야? 이름이 뭐니?"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고 '뭐니'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했다. 바이는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인사를 받은 작은 포켓몬은 아랑곳 않고 앞발을 치켜들고 명랑하게 외쳤다.
"번개야! 봐! 내 흉터가 번개 모양이라서 그래!"
번개는 자랑스럽게 배를 쭉 내밀었다. 바이는 번개의 파란 흉터를 내려보았다. 흉터는 번개의 작은 몸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컸다. 파란 열매즙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틀림없는 흉터다. 그 사실이 바이를 뒤흔들고 있었다.
참아야 해. 바이는 그 말을 끊임없이 되뇌야 했다.
"그래, 참 재밌는 이름이구나. 이 근처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왔니?"
바이는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 매우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만약 제 3자가 바이의 표정을 본다면 사나운 세비퍼가 당장이라도 꼬마 포켓몬을 먹어치우려고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번개는 여전히 그런 부분은 신경쓰지 않았고 밝은 표정으로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어~기서 왔어.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는 새로 살 곳을 찾아야 된대. 그래서 막 돌아다녔어."
번개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 떠들었다. 그러나 바이의 귀에 들어가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바이가 본성을 억누르느라 바빠서였다. 바이의 본성은 당장 눈앞에 조잘대고 있는 꼬마의 입에 독침을 꽃아넣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반대로 이성은 자신의 훌륭한 보금자리와 이웃 포켓몬들을 기억하라고 종용했다. 본능과 이성의 불꽃 튀는 싸움에 바이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번개가 새로이 꺼낸 단어 때문이었다.
'엄마?'
속으로 그 단어를 몇 번 반복하던 바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이는 새된 목소리로 달려들 듯 물었다.
"엄마가 여기 있어?"
그 대답은 반대쪽 풀숲에서 들려왔다. 약간 높은 목소리였다.
"아들 어딨어! 아들! 아......"
바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았다. 그 행동이 완수되기 전에 '아차, 돌아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은 동작보다 느렸다. 세비퍼와 쟝고의 눈이 마주쳤다.
"엄마!"
그 순간 바이는 더 이상 이성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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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우왓! 댓글이다!
쟝고와 세비퍼에 대한 이야기였군요! 묘사력이 좋으십니다~ 다음편이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