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차 대전의 전승을 거둔 연합군은 자신들의 해군 전력을 증강하는 계획을 통해 군사력을 키워나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은 군비 예산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에 큰 위험 리스크 가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승전국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신들의 군비 예산을 1/3 정도만 쓰는 조약을 채결을 하기 위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모여
2년여간 걸쳐 회의와 문제의 해결을 논의한 결과 끝에 승전국들은 군비를 제한하는 바 동시 전함들의배수량 및 함포크기에 대한 문제를 결정짓게 되니 이것이 바로
1921~ 1922년에 있었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축조약을 제안한 사람은 미국 29대 대통령 워렌 G 하딩 이 제안하게 되었습니다.그는 당시 군비경쟁으로인하여 경제적인 위험성을 느꼈고 그렇기에 군비를 제한하여
국가예산의 손실을 줄이고자 조약을 제안하였고 그결과 각국들은 아래와 같은 답을 내림으로서 조약은 성공적으로 마치게되었습니다.
이렇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어느덧 평화를 누리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얻은 것 없이 잃은 패배한 외교라면서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당시 해군에 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는 오히려 조약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전 함경 쟁의 전략 차이가 1 : 10 정도로 벌어질 것이라 예측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결과가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을 두고 이후 채결된 런던해군 조약과 함께 군부 내에서는 군축조약을 반대하는 전함파 와 조약을 준수하자는 조약파 로 나뉘어 싸우게 되다 함대파의 영향이 커지면서 1931년 워싱턴 해군 조약을 파기합니다. 조약이 파기된 이후부터 각 나라들은 지정한 조약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조약은 휴지조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손해를 봤다면 반대로 미국과 영국은 오히려 이득을 보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하여 미국의 식민지 들에 요새화 공사를 중단시켜 예산의 적자를 해결했으며 일본보다 해군의 제약이 적었기에 대규모 함선 건조를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에게 불리인 영국과 일본과의 영. 일 동맹을 파기시킴으로서 영국 역시 해군 군비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승리자는 미국과 영국이었으며 패배자는 일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조약 이후 속여왔던 배수량과 함포의 크기를 더욱 키워 나아갔고 힘을 키우면서 동남아시아의 해외 식민지에 눈을 돌리고 차츰 탐욕스럽게 확장해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대해 요약해봤습니다.
많은 내용을 다 설명드리기 보다는 알기쉽게 대략적인 내용들만 작성해봤네요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으시다면 위키를 통해 워싱턴 군축조약에 대해 알아보셨음 합니다.
사실 이 군축조약에 대한 내용을 쓰고싶었던 이유는 이 조약때문에 여러모로 많은 해군의 함대들에 제약이 생겼고
이와중에 아마기 와 아카기 카가 등이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게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함대들의 이야기를 설명할때 이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 대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작성해봤습니다. 여기에 자유 아이리스 공국에 잠수함 쉬르쿠프가 탄생하게된 조약이기도했으니까요
아마기랑 전함 카가 나올때 스토리에서도 한번 나왔었죠 '그 조약'이었나? 그런식으로 대충 뭉뚱그려서 나왔던것 같은데
네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으로 당시 88계획으로 건조된 아마기 아카기 등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장계획을 하게되었는데 관동대지진으로 아마기의 용골이 파손되어 복구할수없게되는 바람에 폐기될뻔한 카가를 이용 아마기의 부품을 이식해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게되었습니다.
군축조약으로 없어진 함선이 많았져.. 벽람에서도 키이급이나 토사급이 그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