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남긴 글입니다.
'어릴 시절, 주변 어른들을 통해 막걸리 한 모금씩 얻어먹으며 주도를 배웠다,' 라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런 경험은 없다. 부모님은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양가 친척을 통틀어 보아도 고된 삶에 소주를 많이 드시던 외삼촌 외엔 특별히 애주가로 기억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마신 술은 고등학생 시절 부모님과 함께한 누군가가 선물해준 와인 한 병이었다. 와인잔이 없어 '크리스탈'이란 이미지가 떠오르는 양주잔에 레드 와인을 따라 마셨는데, 엄마는 한 모금 먹고 잔을 내려놓았고, 아빠는 한 잔을 마셨다. 나는 한 잔을 먹고 더 달라고 했더니 아빠가 왠지 기특해했다. 그러나 한 잔 더 달라고 하니 저지당했다.
아빠는 술을 먹지 않음에도 제법 커다란 유리장에 양주를 모았다. 성인이 되고 가끔 한국에 들어가 부모님 집에 가면 하나, 둘씩 따서 마셔보는 재미가 있었다. 양주는 비싸서 먹을 일이 없으니 잘은 모르지만, 집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했던 나폴레옹 뭐 코냑 미니어처 병을 까서 크리스탈 잔에 따라 마셨을 때 느꼈던 그 독함과 엄청난 풍미가 기억이 난다.
스무 살이 되고 여자 친구를 만나선 둘이 그렇게나 맥주를 마시고 다녔다. 소주도 먹긴 했으나 조금만 마셔도 머리가 아팠고, 무엇보다 그 미묘한 단 맛이 영 별로였다. 그에 비해 맥주는 끝도 없이 마실 수 있었다. 어떤 날엔 해가 지기도 전에 맥주 마시기 시작해,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피쳐를 쌓다 보니 둘이서 10,000cc를 끝냈다는 사실을 알고 한참 웃었다. 여자 친구가 열심히 돈을 벌어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엔 맥주를 '한 잔 더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만,' 하고 말할 때까지 자동으로 맥주를 계속 가져다주던 체코가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내가 결혼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절, 자신과 신나게 맥주를 마셔주던 파트너와 결혼한 일은 아주 괜찮은 일이었다고 은사님 한 분이 말씀해주셨다. 그는 얼마 전 은퇴하였는데,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남편과 같이 오전 열 시 맥주 한 캔 깔 수 있는 일상이 제법 즐겁다고 소식을 전해 주셨다.
맥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술이지만, 그와 우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막걸리이다. 그런 것 치고 그리 자주 먹는 것은 아니나 그 특유의 맛, 감성, 그리고 특히나 한식과의 조합이 굉장히 소중하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셔보게 된 것은 여자 친구, 그리고 그의 엄마와 같이 <보릿고개>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을 때였다. 칼칼하고 얼큰한 순두부찌개, 그리고 기억으로는 고등어구이의 조합이 훌륭했는데, 여기에 더해지는 막걸리의 뽀얀 빛깔, 달달하고 상큼한 맛이 저절로 '크으,' 하고 얼굴을 신나게 찌푸리게 했다. 어쩌다 여태 막걸리를 마셔보지 않았는지. 우리가 연애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라 여자 친구가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자리를 뜨기에 초조해 보였다. 결국 화장실에 가면서 나와 자신의 엄마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노심초사하는 눈초리로 창 밖으로 나를 자꾸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이야기를 나눴다. 뭔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 치고 편하게 이야기를 했던 기억만 난다. 여자 친구는 부리나케도 돌아왔다.
어떤 더운 여름날, 우리는 북한산 둘레길 한 구간을 걸었다. 길지 않은 거리에 비해 반나절이 금방 지나간 것은 도중 이파리 하늘거리는 나무 아래 평상에 자리 잡아 점심을 먹고 이따금 찾아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잔 터였다. 한적하고 초록이 가득했던 둘레길은 해가 주황색으로 빛나기 시작할 무렵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끝이 났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우니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고, 역시 '등산' 이후엔 전과 막걸리지, 하고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 연신내역 근처 <호박>이란 민속주점에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가 두 번째 손님이었다. 싼 가격은 아니었으나, 초록색 플라스틱 병이 아닌 조그마한 항아리에 표주박 반 쪽과 함께 담긴 막걸리는 아주 그럴싸해 보였다.
어둠이 드리울 무렵, 어쩌다 보니 여자 친구의 엄마, 친해질 대로 친해져 '호미'라고 부르던 그가 찾아오기로 했다. 나도 그렇지만 나보다도 더 길치인 여자 친구를 대신해 연신내 역으로 마중을 갔다. 역에서 그를 만나 다시 <호박>으로 걸어오는 길,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다시 막걸리를 먹을 생각에 반가웠다. 벌레 소리가 나고, 공기가 시원해지고, 모기 때문에 내 팔뚝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나는 나의 여자 친구와, 호미와 함께 삶과 쓰잘데기 없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다 낄낄거리며 모듬전과 탕에 막걸리를 마셨다. 다들 제법 취기가 올라 돌아오는 길, 왼쪽에는 여자 친구, 오른쪽에는 호미의 팔짱을 끼고 비틀비틀 걸으려니 왠지 뭉클했다. 지금 바닥에 아가 고양이 넷을 안고 누워있는 아내는 눈 앞에 지켜보고 있어도 보고 싶지만, 그의 엄마, 호미는 더더욱 보고 싶다.
그 이후 미국에서는 막걸리를 사 먹을 일이 없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긴 싫어 빠듯하나 커다란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금을 안게 되고는 한 팩에 99센트이던 요거트가 79센트로 할인할 때, 그리고 돼지나 소고기는 꿈도 못 꾸고 닭가슴살만 할인할 때 그제야 쟁여두던 시절이었다. 정말, 달러도 아니고 센트 단위로 재정을 꾸리곤 했었다. 그러다 어쩌다 학교 체육관에서 파트 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 대가로 학업의 성취는 조금 포기해야 했지만, 나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어느 하루, 막걸리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차도 없던 시절,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십오 분, 이상하게도 갈 때도 언덕, 올 때도 언덕인 길을 타고 처음으로 한인 마트에 갔다. <국순당>의 바나나, 복숭아, 망고, 그리고 생막걸리를 각 두 병씩, 총 8병을 짊어지고 돌아오다가 돌아버릴 뻔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동실에 넣어두고, 샤워를 하고, 남은 할 일을 마친 뒤 마신 복숭아 막걸리 큰 한 모금, 옅게 낀 살얼음이 목구멍에서 아삭아삭하게 바스러지며 내 온몸을 짜릿하게 했다.
여자 친구가 아내가 되어 미국에 온 이후 삶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는 차를 타고 한인 마트에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닭고기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도 소고기도 사고, <국순당> 생막걸리를 종종 $2.49에 사 오곤 했다. 그러던 어떤 날, 한인 마트에서 쌀가루와 누룩가루를 혼합해 둔 막걸리 키트의 판촉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한 번 먹어볼 수 있을까 물었더니, 주변 어르신들이 하도 달라 그래서 시음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나 아쉬워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계속 서성였더니 조용히 먹으라며 한 모금 건네주었다. '아, 안 되는 건데, 한 번 드셔보세요,' 하고. 내가 여태 먹었던 막걸리에 비해 풍미가 풍부하고, 불쾌한 단 맛은 적었다. 그대로 키트를 구매해 두어 번 막걸리를 해 보았는데, 물에 가루만 타면 되는 간단한 과정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너무나 맛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안타깝게도 키트는 더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에는 배상면주가, 느린 마을, 금정산성 등등 훌륭한 막걸리가 많이 있지만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미국에서는 국순당이 최상의 선택이다. 그러다 아내가 한국에 들렀을 때 시장에서 누룩을 사다 주었다. 아내가 만두를 빚겠다고 선언한 날, 그렇다면 나는 막걸리를 빚어보기로 했다.
막걸리 빚기
찹쌀 1kg, 물에 열심히 씻는다. '왼쪽으로 백번, 오른쪽으로 백번, 쌀뜨물이 맑아질 때까지'라고 하는데, 사실 모르겠다. 매번 스무 번 정도씩은 하는 것 같기는 하나, 그보다 더 씻는다고 물이 더 맑아지지도 않고 팔은 아프고 무엇보다 지겨워 그 정도에서 멈춘다. 이 정도로도 내 입엔 충분히 맛있는 막걸리를 여러 번 만들어 내었으니 괜찮겠거니 싶다.
누룩 200g은 햇빛에 잘 말려 법제한다. 누룩에 들어있는 잡균들을 죽이는 일이다.
끓는 물로 막걸리를 담을 소독을 하고, 생수에 갈아둔 누룩을 넣어 물 누룩을 만든다. 발효를 시켜주는 미생물들을 활성화하는 과정이다. 막걸리에 닿는 모든 것들 -- 병, 국자, 주걱, 체, 보울 등등 -- 은 잘 소독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잡균이 과하게 번식하여 시큼하고 이상한 맛이 나는 막걸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수들을 통해 배웠다.
씻어낸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식힌다.
밥알 사이사이 누룩 물이 잘 배도록 꾹꾹 눌러 으깨준다. 반나절 정도만 지났을 뿐인데, 이미 효모들이 열심히 당분들을 분해하면서 나오는 탄산에 쌀알이 한가득 떠올랐다. 병 입구에 귀를 대면 뽀글뽀글, 톡톡 소리에 신이 난다. 정말 이 녀석들 살아있구나. 한껏 숨을 들이마시면 이미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난다. 서서히 알코올이 형성되고 있다.
발효한 지 하루, 아내가 저녁에 돼지갈비를 굽는다고 했다. 아직 거를 수는 없으나 돼지갈비와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아 윗부분만 떠 내기로 했다. 굳이 따지면 막걸리가 아닌 동동주이다. 아직 발효가 많이 진행되지 않아 느껴지는 쌀의 달달함, 그러나 느껴지기 시작하는 알코올의 은은한 화끈함과 상큼함, 그리고 거르지 않아 섞여 있는 누룩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씁쓸함이 달콤한 돼지갈비, 구수하고 매콤한 청국장, 상큼한 양파 장아찌와 부추무침과 함께 아주 훌륭한 마리아주를 보여주었다. 바깥, 아파트 단지의 풀들 사이로 스프링클러가 치익, 하고 켜진다. 여름의 젖은 냄새가 난다. 내가 어릴 적, 특별한 날 돼지 갈비를 먹던 밀양 근처의 '가든'이 있었다. 넓은 호수 부지에 자리를 잡아, 물 위로 작은 정자들이 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빛, 돼지갈비는 지글지글 구워지고, 호수 위로 연잎이 떠다녔다. 물의 냄새가 났다. 스프링클러가 식힌 이 더웠던 날의 저녁은 우리 집을 엘에이의 '팜팜가든'으로 데려다 주었다.
삼일차, 발효실을 겸하는 옷방에 술 냄새가 가득해 2/3 정도를 거르기로 했다. 체에 1차로 거르고, 면보에 2차로 걸러낸다. 거르고 남은 지게미는 한 번 씻어내어 아내의 정원 한 켠 흙더미에서 살고 있는 '렁렁이'의 맘마로 준다. 이 지렁이들은 영양분 가득한 흙을 계속 만들어 줄 것이다.
곱게 발효된 막걸리 원액, 즉 탁주. 예전엔 탄산수로 희석하여 설탕을 조금 넣어 달달하게 먹기도 했는데, 막걸리를 빚으면 빚을수록 탁주 자체의 구수하고 은은하게 달콤한 맛, 쌀에서 나오는 진한 질감을 점점 더 추구하게 되었다. 이번 막걸리는 10% 안팎으로 느껴지는 알코올 도수와 적당하게 남은 쌀 당분의 단 맛의 밸런스가 좋았다. 예전 <신의 물방울> 만화책을 읽으며 뭔 포도로 빚은 와인에 뭔 꽃, 바닐라, 아몬드 등등의 향이 나다 못해 푸른 평원이 펼쳐지는지 어이가 없었는데, 직접 막걸리를 빚기 시작하니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식을 이용함에도 매번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엔 쌀의 은은한 달달함, 거기에 부드러운 상큼함이 더해져 살짝 포도와 크랜베리의 향이 났다.
나머지 1/3은 사흘 더 발효시켰다. 맑게 떠오른 윗술, 이만 여과시키면 청주가 될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막걸리가 더 좋으니 잘 섞어 더 숙성된 막걸리를 걸러내었다. 오른쪽엔 오늘도 자라고 있는 사워도우 천연 발효종. 집안이 발효 파티이다.
이제는 쌀의 당분이 거의 다 사용되어 단 맛이 거의 없다. 쌀의 구수함만이 남았다. 도수는 느끼기엔 13-14%쯤 되는 것 같았다. 작은 한 모금씩 복잡한 풍미를 즐기는 재미가 있었다.
막걸리는 보통 사람의 술이다. 청주나 소주에 비해 저렴하다는 부분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고됨을 달래주는, 흥을 돋워주는 존재인 다양한 종류의 술 중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맥주를 너무나 좋아하는 만큼 홈브루잉에 대해 공부를 하고, 수업을 듣기도 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필요한 물품과 할 일, 그리고 차지하는 공간이 많아, 지금 있는 집에선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막걸리는 정말 간단하다. 쌀과 물, 누룩이면 제 알아서 술이 된다. 게다가 누룩도 밀과 물로 반죽하여 잘 발효시키면 공기 중 떠다니는 곰팡이들이 알아서 자리를 잡아 만들어진다. 이는 빵과 비슷하다. 물과 밀가루, 그리고 효모. 마찬가지로 열심히 키우고 있는 천연 발효종은 물과 밀가루를 섞어놓았을 뿐인데 공기 중 효모들이 자리 잡아 빵을 부풀게 하고, 특유의 새콤한 풍미를 더해준다. 빵은 구울 때 뜨거운 열이라도 필요하지, 막걸리는 그조차도 필요가 없다. 막걸리처럼 쉽게 빚을 수 있는 술이 없는 것 같다.
처음 빚었던 막걸리. 뽀얀 우유 같은 빛깔, 달콤 새콤한 맛. 인공적인 달달함 없이 은은하면서 고소한 맛에 깜짝 놀랐다. 막걸리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흰 밥을 꼭꼭 씹다 보면 느껴지는 그 맛이었다. 이렇게 막걸리를 빚어 먹다가 친구가 국순당 생막걸리를 사 들고 온 적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인마트를 다녀오며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막걸리가 이젠 맹맹하면서 인공감미료의 맛이 가득한 술이 되어 버렸다.
막걸리는 한식을 대표하는 술이다. 미국에 살면서 한식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막걸리는 밥과 거의 같다. 밥과 먹는 음식이라면 거의 다 막걸리와의 마리아주, 우리 말로는 궁합이 좋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든든하다. 거기에 취기까지 돌게 해 주니 그만한 것이 있겠는가.
아내가 처음으로 만두를 빚고 나는 처음으로 막걸리를 빚었다. 이를 자축하며 아내는 지글지글 모듬전을 지져내고, 양파 장아찌를 곁들였다. 김치전, 녹두빈대떡, 동그랑땡, 깻잎전. 누가 뭐래도 만두와 전에는 막걸리이고, 막걸리에는 만두와 전이다. 기름지고 고소한 전, 보들보들하고 뜨거우면서 고기의 감칠맛이 한가득 담긴 만두에 더해지는 상큼하고 달달 구수 하면서 시원한 막걸리, 엘에이 댁 주모, 주부(?)를 자꾸 찾게 된다.
전날 마신 막걸리를 해장하며 다시 막걸리와 곁들인 뜨거운 만둣국, 남은 전들. 우리의 구수한 고기 국물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 막걸리이다.
미국에 살면서 긴 시간 동안 나는 한국의 식문화에 대해 자신을 가지지 않았다. 가져야 할 필요도 느끼지도 못했다. 자신을 가지지 않았다는 자각도 없었다. '불고기' 같이 대중적인 음식마저도 '간장 소스에 절인 얇은 소고기'라고 굳이 영어로 번역을 하여 설명했다. '감자탕' 같은 경우엔 '돼지 등뼈로 우려낸 육수에 매콤하게 간을 하여 감자와 여러 야채를 더한 수프'라고 설명했다. '만두'는 '덤플링', '빈대떡'은 '코리안 피자/팬케익', 그리고 '막걸리'는 '라이스 와인'.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로만.
그 사이에 일본 식문화와 식재료의 마케팅은 굉장히 성공했다. 한국에서조차 더 이상 '초밥'이라고 거의 불리지 않을 정도로 '스시'라는 단어는 '피자'처럼 자리 잡았다. '김'은 '노리'로, '김밥'은 '마키'로, '라이스 와인'이었던 것은 '사케'로, '군만두'는 '교자'로, '풋콩'은 '에다마메'로, '닭튀김'은 '카라아게'로, '튀김'은 '텐푸라'로.
언제부턴가 왜 내가 한식에 대해 이건 떡갈비다, 나물이다, 곱창이다, 라고 호부호형하지 못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아마 나 자신이 한식을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왜 내가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음식을, 그 식문화를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만 표현해야 하는가. 딤섬, 브루기뇽, 미소, 티라미수, 커리, 나쉬고랭, 이러한 고유 식문화의 음식명들 사이에 '잡채'가 존재하는 것이 지당하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소기름의 맛이 한가득 우러져 나온 소 수육과 육수. 거기에 알싸함을 더해주는 부추. 마찬가지로 집에서 열심히 발효된 청국장으로 멸치 육수에 끓여낸 살짝 꾸리꾸리 하면서 구수하기 그지없는 찌개. 이것을 시원하고 상큼하고 달달하게 씻어주는 막걸리.
양지 고기로 우려낸 국물에 소면과 만두를 더해 끓여낸 만둣국, 그리고 그 영혼의 단짝, 막걸리.
어릴 적, 북엇국과 콩나물국, 육개장을 그렇게나 좋아해서 어른들은 내가 술을 많이 먹을 거라고 했다. 나아가 순대, 순댓국, 만둣국, 해장국, 술국, 국밥, 설렁탕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얘는 글렀다고 했다. 아내가 콩나물 오징어 국밥을 끓여주었다. 막걸리로 취하면서 해장을 했다.
짭짤하고 매콤한 부대찌개, 그리고 닭고기 김치찜에도 막걸리는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중국 마트에 갔다가 어쩌다 할인을 하길래 막창을 사 왔다. 아내가 열심히 손질해 그릴에서 바짝 구워내었다. 쫄깃하고 부드러우면서 바삭한 식감, 아내의 훌륭한 손질로 아주 적당하게 느껴지는 꾸리꾸리한 내장 특유의 향, 매콤한 고추 양념 소스, 구수한 콩가루, 뜨겁고 시원한 누룽지, 이 모든 것을 역시나 상큼하고 달달하게 씻어내주는 막걸리.
아내가 이틀을 꼬박 준비한 족발. 평소보다 향신료를 많이 쓰고 잘 삶아내 더욱더 풍미가 깊었다. 구수하고 쫄깃한 감자전, 도토리의 고소함이 느껴지는 아내가 쑤어낸 묵, 매콤 달콤하기 그지없는 막국수, 역시나 시원하게 해장해주는 콩나물국, 그리고 막걸리.
친구가 놀러 왔다. 아마 나 다음으로 아내의 음식을 맛있게, 많이 먹어주는 친구는 올 때마다 우리가 꿈도 못 꾸는 비싼 사케를 사 온다. 그의 엄마는 아내가 고구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항상 '코!-구마'를 구워다 주신다. 아내가 각을 잡고 힘을 썼다. 그러곤 나에게 말했다. '내가 한식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직접 채워낸 피순대. 직접 만든 두부, 그리고 언젠가 김장해두었던 김치의 볶음, 상추 절임, 소 수육, 돼지갈비, 고추전, 호박전, 녹두 빈대떡, 양파 장아찌, 콩나물국, 바싹 구운 황태채, 거기에 곁들인 막걸리.
최고의 주막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이젠 이렇게 얘기한다. '이건 '막걸리'라고 해, 쌀, 물, 누룩으로 발효시킨 한국의 전통술이야. 아, '누룩'은 곡식에 곰팡이를 앉게 한 발효원이야. 달달하고, 고소한 사람들의 술이야'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라는 프로그램에서 '빌레'가 종종 얘기했다. '막걸ㄹ리, 유세요!' 라고. 나는 나의 막걸리가 제법 자랑스럽다. 갖고 있는 누룩이 떨어지면 누룩도 만들어 보아야겠다. 내가 직접 빚은 막걸리를, 아내와 호미와 같이 마시고 싶다.
족발 색깔 너무 잘 나왔네요! 다른 재료는 알겠는데 색깔을 뭐로 내셨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항상 정성스러 음식사진과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막걸리~ 한 잔~
두 잔!
족발 색깔 너무 잘 나왔네요! 다른 재료는 알겠는데 색깔을 뭐로 내셨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항상 정성스러 음식사진과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아내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색깔은 간장과 굴소스가 크게 차지하고 질감은 갱엿으로 낸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참고 하겠습니다!
노추 한방이면 색깔 오지게 납니다. 써보시면 엌ㅋㅋ 싶으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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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켄.
말씀 고맙습니다!
감히 손댈수없는 술같아요 막걸리는..ㅠㅠ
술 중에선 제일 할만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국이었으면 사 먹었을 것 같지만요.
하나하나 다 먹어보고 싶습니다. 잘보고갑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입니다.
복동이형
아내 따라 뭐라도 만들어 봐야겠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와아~ 오늘도.. 힐링 하고 갑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행복해 졌으면 합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피곤하고 힘든 세상, 따뜻하고 즐거운 부분들을 많이 보려고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오늘은 막걸리로...
다 마셔서 또 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에 칠곡인가.. 어디 바나나향 나는 막걸리 먹어봤는데 좋더군요
자연스레 그런 맛이 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첨가제를 넣은건 아니고 발효과정에서 그런 향이 생긴다고 하더라구요.. 1박2일에도 나왔다던데, 첫 모금에 살짝 바나나향이 납니다.
책한권 내셔도 되겠어요. 필력도 필력이시지만 구수하게 풀어내시는 인생사가 참으로 따뜻하네요. 저도 한인 마트에서 떨이할때 몇번 사다가 담궈먹은 DIY키트 막걸리를 못잊어서 한번 담궈볼까 내심 생각만 있었는데 올려주신 글을 보고 한번 용기내볼까 합니다. 누룩만 어떻게 해결하면 해볼법 한데, 혹시 집에서 누룩을 직접 만드신건가요? 그렇다면 감히 살짝 노하우 공유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ㅎㅎ 미리 감사드립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지금 쓰는 누룩은 아내가 잠간 한국에 들렀을 때 사다준 것을 쓰고 있으나, 한인 마트 가면 누룩은 꼭 팔더군요. 꼭 시도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누룩을 다 쓰면 한 번 만들어 볼 계획입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막걸리 한잔 해야겠어요. 글도 좋고 사진도 좋고 오랜만에 재밌는 술이야기를 들은거 같아요 ㅎ
말씀 고맙습니다. 또 담고 싶네요.
저는 집에서 막걸리 담그는거 금지 시켰습니다. 냄새가 생각보다 집에 오래 남더라고요. 원주는 생각보다 독해서 물이랑 섞는걸로 알고있는데 그냥 드시나보네요?
저는 옷방에 두는데 그다지 냄새가 남지 않더군요. 아내는 탄산수에 섞어 마실 때도 있으나 저는 원액의 진함이 좋아 그냥 마시곤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지금은 이슈의 중심에 있는 모 대표와도 7~8년전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거 같네요. 암튼 과거에 가졌던 막걸리에 대한 열정? 애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거 같아 기쁘기도 한편으론 슬프기도 해집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앞으로 막걸리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열정이 지나간 자리엔 소중한 추억이 자리 잡았겠지요.
집에서 직접 잘 담근 막걸리 마셔보면 시중에 파는 막걸리 중엔 차는게 없어지죠. 그때문에 막걸리 배워서 직접 담가봐야지라고 계속 다짐은 해봅니다만 실행이 힘들었는데 다시 한번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담그기 시작하곤 일반 마트에서 파는 막걸리는 살 일이 없게 되더군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꼭 한 번 도전해 보시기를!
잘 쓴 글 특징 : 걸림이 없이 한번에 술술 읽힘. / 막걸리 마시고 싶어지는 글...
고맙습니다!
정성 추.....디오니소스가 좋아할 글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막걸리를 설명하는 글답게 술술 넘어가네요
고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kYIlHMitCA
타카피 진짜 오랜만이네요!
막걸리 칼럼 +_+
고맙습니다 :)
막걸리는 다 좋은데 트름하면 다음날까지 막걸리 냄새가...
정말 그렇죠, 거기에 고기랑 마늘까지 먹으면...
사진 글 내용 3박자 완벽하네요... 이번주는 느린마을 막걸리 다뒤졌다
고맙습니다! 느린마을 막걸리 정말 궁금합니다.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잼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분 글 올리시는거 보면 진짜 분위기 있어요.. 살빼야 하는데.. 배고파졌어요 ㅠ
고맙습니다! 다이어트는 왜 이리도 힘든건지...
순대에 이어 막걸리까지~ 솜씨가 아주 좋으십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을 만드셨네요
한국 음식이 그리우니 하나씩, 하나씩 만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경우 20대~30대중반까지 맥주를 달고 살았습니다. 소주경우 그특유의 목넘김?이나 쏘는맛? 그런게 이해가 안가더군요; 그래서 맥주를 마시다가 30대중반 뒤늦게 막걸리를 자주 마실기회가 생겼는데 맥주못지 않게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좋더군요. 기본적으로 장수막걸리가 단맛,탄산,가격까지 최고긴한데 갈수록 단맛나는것만 마시다보니 막걸리본연의 맛이 이게 맛나 싶더군요. 그런의미에서 송명섭 마셔봤을땐 여러모로 충격을 받.... 나중에 지금하는일이 끝나면 막걸리 주점을 창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생각만 하고 쉽지가 않네요 ㅎㅎ
예전보다 소주가 맛있는 부분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맥주나 막걸리가 가장 좋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좋은 막걸리를 먹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나 아쉽습니다. 너무나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미국 살고 요리에 관심 많은데 너무 정성스런 글과 사진 잘 봤습니다. 누룩은 어디서 구하셨는지..실례가 안 된다면 여쭐 수 있을까요? ^^
말씀 고맙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누룩은 아내가 한국에 들렀다 사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한인 마트 곡식 칸에 가면 엿기름과 같이 꼭 있더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도전해 봐야겠어요^^(현실은 주량이 반잔이지만 접대용으로~)
탁주 ,.;
언제부턴가 탄산에 달달한게 당연시 여기게된 술 원래는 담담하고 진한 목넘김있는 탁준데
오랜만에 시판 막걸리를 먹어 보니 정말 달고 묽게 느껴지더군요. 인기가 많아지면서 좀 더 깊은 막걸리가 시판되면 좋겠습니다.
막걸리는 굳이 술 장르를 가르자면 맥주가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하얀색 맥주인거죠, 쌀로 만든. 까만 맥주도 있는데 하얀 맥주는 없을이유 없다고 생각해요. 마시는 타입이나 넘어가는 느낌이나 탄산이 있는점도 딱 맥주임. 라이스 와인은 좀 많이 아닌것 같아요.
최근 막구 (Makku)라는 크래프트 캔 막걸리가 출시되었는데, '이것은 맥주도, 와인도, 사케도, 라이스 와인도 아닌, 막걸리이다', 라고 표방하면서, 굳이 따지자면 "rice beer"라고 해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와인과 맥주 둘 다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막걸리'로 자리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웬만하면 로그인 않하려했는데 글이면 글 막걸리 음식 와인등등 너무너무 좋네요 ^^ 한때는 담배는 3갑 술은 끝장날때까지 마셨지만 지금은 건강이 허락을 않하여 다 끊었는데 이렇게 이쁘게 행복하게 드시니 보기 좋습니다 ^^ 항상 지금처럼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좋은 글도 간간이 올려주세요~~~ 외국 생활 힘드시겠지만 항상 화이팅입니다.쌍따봉 날립니다 ^^
말씀 고맙습니다! 저도 예전만큼 실컷 먹고 마시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시나 건강이 최고지요. 부디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아내분 요리솜씨도 일반인 수준은 아니네요.
아내의 요리에 비하면 저는 소꿉장난도 안 됩니다.
옴메...안그래도 요근래 막걸리가 엄청 땡겼지만 다이어트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올리신 사진 보고 그 다짐이 무너 졌네요. 수제 막걸리면 좋겠지만, 동네 마트에서 파는 막걸리 사서 순대랑 한사발 해야겠네요~ 사진 잘 봤습니다 ^^
말씀 고맙습니다! 그래도 한국에는 맛있는 막걸리가 많이 판매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순대와 막걸리, 정말 좋지요. 다이어트는 자고로 내일부터라고 하지요.
입속에 침이 고였어요 다 먹고 싶은 음식이네요 ㅜㅜ
저도 또 먹고 싶습니다.
오늘 점심은 고등어 무한리필~! 저녁은 막걸리 무한리필...레고~! 전에 추천 누릅니다 ㅎㅎ
엄청나게 기대될 만한 식사들이네요!
막걸리 칼럼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