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만드는 계기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뭔가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서, 저렴하게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 다른 지역이나 나라의 문화와 분위기를 느끼려고, 아니면 요리 대회에 출품하기 위해서.
요리 대회라고 하니 왠지 거창해 보이지만, 요즘들어 음식 문화가 일상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요리 이벤트도 많습니다.
블로그 열자마자 "맛남의 광장 챌린지"라며 특정 재료를 활용해서 요리를 해 보라는 광고가 떴으니, 선정되고 안되고를 떠나 한 번 응모 해 보는게 인지상정.
이번 이벤트의 재료는 시래기 혹은 애호박. 애호박이라는 재료를 보자마자 머리에 떠오르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미국 전통 음식인 서코태쉬(Succotash)입니다. 직접 먹어보기는 커녕 그 이름조차도 생소한 음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여름 채소로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일단 재료부터 준비합니다.
양파 한 개, 옥수수 2~3개, 가지 한 개, 색과 맛을 더하기 위한 피망 두 개, 단호박 한 개, 병아리콩 한 컵, 그리고 미션 재료인 애호박도 한 개 준비합니다. 얼핏 보면 재료가 엄청 많아 보이는데 소박한 가정식답게 옥수수와 애호박을 제외하면 나머지 재료는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병아리콩을 강낭콩이나 완두콩으로 바꾼다거나 빨간 피망 대신 방울토마토를 넣는다거나 단호박은 생략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다만 옥수수, 애호박, 그리고 종류를 불문하고 콩 한 종류는 반드시 들어갑니다.
미국 원주민들은 이 세 가지 작물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함께 길렀고, 오늘날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 음식의 세 자매 (Three sisters)라고 불릴 정도로 필수 요소 취급을 받기 때문이지요.
옥수수의 알을 분리합니다. 깔끔하게 한 알씩 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미국식으로 옥수수를 세워서 칼로 알맹이만 썰어냅니다.
노력과 시간은 절약되지만 옥수수는 꽤나 낭비되는 방법이지요.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옥수수를 생산해내는 미국답게 옥수수 가격이 굉장히 저렴한지라 이 정도 낭비되는 건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듯 합니다.
예전에 일리노이주에 살 무렵에는 동네 식료품점에서 싱싱한 옥수수 10개 가격이 단돈 $2에 불과할 정도였으니까요.
원래 레시피대로라면 달달한 맛이 도는 노란색 옥수수를 사용해야 하지만 마트에 갓 들어온 건 국산 찰옥수수.
옥수수 통조림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맛이 좀 달라지더라도 싱싱한 옥수수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겠지요.
원래 서코태쉬에 사용하는 애호박은 주키니(Zucchini)라고 불리는, 한국에서 흔히 보는 애호박과는 약간 다른 채소입니다. 껍질의 색깔이 좀 더 짙고 속이 더 단단하지요.
하지만 스위트콘 대신 강원도 찰옥수수를 썼듯이, 구하기 힘든 미국식 주키니 대신 국산 애호박을 사용합니다. 먼 곳의 명물보다 지척의 평범한 재료가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주키니나 애호박이나 둘 다 여름이 제철인 채소라는 사실이지요.
애호박과 가지는 껍질 부분 위주로 채를 썰어줍니다. 칼로 잘라서 얇게 채썰어도 되지만 도구의 힘을 빌리면 훨씬 편합니다.
채칼이나 만돌린으로 슥슥 밀어주면 금방이지요. 다만 만돌린은 예전에 신나게 슥슥 밀다가 손가락 끝부분도 함께 썰어 본 뒤로는 항상 조심해서 사용합니다.
애호박의 녹색과 가지의 짙은 보라색을 살려서 채를 썰고 소금을 살짝 뿌려 따로 보관합니다.
채를 썰고 나면 가운데 부분이 네모난 블럭처럼 덩그라니 남게 되는데, 옥수수 알갱이와 비슷한 크기 정도로 썰어줍니다.
절반은 서코태쉬 만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보관했다가 라따뚜이(https://blog.naver.com/40075km/220903101506) 만드는 데 활용하면 좋습니다. 아니면 그냥 좀 독특한 된장국으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겠지요.
서코태쉬를 정식으로 처음 접한 것은 미국 유학 당시 학생식당에서 추수감사절 요리 메뉴로 올라온 것을 봤을 때였습니다.
굳이 "정식으로"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 전에도 여러 번 먹었지만 항상 곁들이 메뉴로만 나왔기 때문에 그 이름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생선이나 고기 요리 옆에 소복하게 쌓여 나오는 옥수수와 콩 요리를 볼 때마다 '콘샐러드의 변형 메뉴인가' 정도로만 생각했지 따로 이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러다가 추수감사절 메뉴로 서코태쉬를 처음 보고, 호기심에 주문하면서 제대로 한 번 먹어보게 되었습니다.
항상 조연 역할만 하다가 호박 무대 위에서 버섯 소스를 배경으로 당당하게 주역으로 등장한 모듬 콩 요리.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다들 칠면조만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인디언들이 자주 먹던 서코태쉬 역시 빠지지 않았을거라는 말도 있지요.
일반적으로 서코태쉬는 그 자체로 먹거나 사이드 디쉬로 활용하는 게 보통입니다만,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단호박을 잘라서 접시를 만들어 줍니다.
전자레인지에 4~5분 정도 돌리거나 오븐에 구워서 말랑하게 만든 다음, 썰어서 씨를 파내면 준비 완료.
시간과 에너지가 남는다면 단호박을 갈고 크림을 섞어 끓여서 퓨레나 소스를 만들어 곁들여도 좋습니다.
병아리콩은 물에 서너시간 정도 불려서 준비하고.
애호박과 가지는 채를 쳐서 국수로 만들고, 남는 부분은 네모낳게 썰고.
단호박은 찌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슬라이스 한 다음 속을 파내고.
옥수수는 알을 잘라내고, 피망과 양파도 비슷한 크기로 썰어내면 재료 손질이 끝났습니다.
가정식답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메뉴가 아니기 때문에 재료 손질 끝나면 요리도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됩니다.
조그만 냄비에 불린 콩을 넣고 80%정도 삶아줍니다. 완전히 익히면 서코태쉬에 넣고 마지막으로 볶을 때 부스러지기 때문이지요.
채 썬 애호박과 가지는 팬에 버터 살짝 두르고 볶아서 채소 국수를 만들어 줍니다.
가장 중요한 서코태쉬는 무쇠팬에 올리브유와 버터를 넣고 단단한 채소부터 부드러운 채소 순으로 넣으며 볶아줍니다.
무쇠팬 말고 다른 팬을 써도 되긴 하지만 "미국 전통요리! 와일드하고 러스틱한 맛!"이라는 느낌을 내려면 무쇠팬만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기름기가 꽤 있기 때문에 뜨거울 때 먹어야 맛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열을 보존해주는 무쇠팬이 적합하지요.
버터는 금방 타기 때문에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둘러 요리 기름으로 사용하고, 버터는 한 큰술 녹여서 향만 더합니다.
아니면 버터를 약한 불에 끓여서 위에 뜨는 거품을 걷어내고 중간 부분의 맑은 유지방만 따로 모아 정제 버터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서양 요리, 특히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프랑스 요리에는 거의 필수품이지요.
올리브유와 버터를 넣고 어느 정도 뜨거워지면 양파와 옥수수를 투하합니다. 그 뒤로 피망과 콩, 마지막에 네모낳게 자른 애호박과 가지를 넣습니다.
중간중간 맛을 봐가면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타임과 파슬리를 뿌려 향을 더합니다.
단호박에 채소 국수를 채워 넣고, 옆에는 서코태쉬를 듬뿍 올리고 마지막으로 새싹채소로 장식하면 여름 서코태쉬 완성입니다.
말린 콩과 옥수수 등 저장 식품으로 만드는 겨울 서코태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싱싱한 제철 요리입니다.
나라간셋(Narragansett) 인디언 말로 "끓인 옥수수 (혹은 곡물 알갱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서코태쉬.
추수감사절에도 먹었을 뿐 아니라 콩과 옥수수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제 대공황 시절에는 바나나빵이나 미트로프 못지 않게 많은 사랑을 받은 메뉴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류의 채소를 넣느냐에 따라 집집마다 저마다의 전통 레시피가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처치 곤란한 말린 콩이나 옥수수를 한 번에 먹어치우기 좋기 때문에 엄청나게 다양한 요리가 서코태쉬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합니다.
심지어는 지역별로도 서코태쉬 레시피가 달라서, 동부에서는 콩과 옥수수를 우유에 끓인 소박한 버전을 주로 먹는 반면 남부의 서코태쉬는 돼지고기와 오크라가 함께 들어가는게 일반적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찰옥수수와 애호박을 넣은 이 요리도 "코리안 서코태쉬"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겠네요.
신선한 제철 재료를 듬뿍 넣은데다가 버터, 소금, 후추의 조합이 힘을 보태니 맛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일품요리의 복잡한 맛이 아니라 소박하고 시골풍의 풍미가 느껴지는 요리입니다.
달콤한 애호박, 쫀득한 옥수수, 고소한 병아리콩이 기본적으로 깔리고 그 위에 피망과 양파가 단조로운 맛에 변화를 줍니다.
뜨거울 때 한 숟갈 푹 떠서 먹으면 세상 행복합니다. 보통은 산더미처럼 퍼 주는 음식인지라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한 느낌이거든요.
알갱이 씹는 맛에 질리면 애호박과 가지가 섞인 채소 국수를 후루룩 먹어봅니다. 그러다 질릴 것 같으면 달콤한 단호박을 한 조각 먹는 거지요.
그렇게 정신없이 먹다 보면 왠지 시간여행에 세계여행을 동시에 하는 것마냥 혼란이 오기도 합니다.
한국 재료로 만든 미국 전통요리를 먹다보니 미국에서 보낸 추수감사절의 추억 위에 한국에서 보내는 여름의 모습이 하나씩 덧씌워지기 때문일까요.
복동이형
집에 있는 재료 그까이꺼 대충 넣고 만들어도 맛있습니다. 한 번 시도해 보세요 ㅎㅎ
미국 음식인데도 뭔가 낮설지가 않네요 애호박 때문인가
재료가 전부 한국에서도 익숙한 재료들인지라 ㅎㅎ
익숙한 재료들인데 어떤 맛일지는 상상이 안 되네요! 재료들 보면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데 ㅎㅎ
뭐랄까, 왠지 예상이 되는 맛이면서도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그런 맛입니다 ㅎㅎ
콘샐러드가 떠오르는군요!
저도 처음엔 음식 이름이 따로 없는 줄 알았더랬죠. 그냥 콘샐러드 개량형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름이 따로 있더군요.
어느 버터를 쓰느냐가 확 보이는 음식일 것 같아요. 좋은 ghee 버터를 쓰면 딱이겠네요. 감칠맛 강박에 걸린 저는 치즈그라인더를 꺼낼 것이 눈에 선합니다 ㅋㅋ
치즈는 언제나 옳습니다.
미국 느낌 요리라고 하면 좀 더 고기고기한 걸 생각했는데 요런 것도 있군요... 조만간 팔라펠을 만들어 보려고 병아리콩을 살 예정이었는데 이것도 만들어볼까 싶네요
팔라펠 맛있죠 ㅎㅎ 요즘엔 튀김요리는 에어프라이어로 많이들 만드는데 아무래도 진짜 딥프라이어와는 다르더라구요 ㅠ_ㅠ
예전글이 미국에서 요리 배우셨던거로 기억하는데 최근에는 한국 돌아오셨나보네요 글 잘보고 갑니다
네, 한국 들어오자마자 코로나 크리티컬이 떠버렸습니다. 몇 주만 늦어졌어도 미국 학교 다 문닫았으니 졸업도 못할 뻔 했지요. ㅎㅎ
와 이거 한번 해봐야겠다
의외로 밥반찬으로도 괜찮습니다 ㅎㅎ
아 가끔 장을 보러가면 우리나라 시장에도 종종 주키니를 팔더라고요. 애호박보다 쌀때가 있어서 가끔먹곤 합니다 ㅎㅎ
'친숙한 재료로 만드는 낯선 음식' ?? 내가 만드는 음식은 다 그랬던 것 같은데...? 심지어 같은 재료, 같은 조리법, 같은 시간을 들였음에도 매번 다른 음식이...
원래 사람의 감각이 속기 쉽다고 하지요. 수십년동안 한 가지만 만들어 온 장인이 아니면 계량하고 맛 보는 건 필수라고 하더군요.
처음들어보는 음식이네요 서코태쉬... 뭔가 스코티쉬를 사투리로 발음한듯한 느낌? 스마트폰을 서마터폰으로 말하는것처럼요 ㅋㅋ
미국에서 처음 발음 들을 때는 거의 "사코탸슈"로 들리더군요. 그런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서코태쉬가 되는 듯 싶네요 ㅎㅎ
삭제된 댓글입니다.
아머까오
베이컨 넣어서 볶아도 괜춘합니다
중간에 "달콤한 애호박"
달콤한 단호박은 너무 뻔하잖아여 ㅎㅎ
오타인줄 알았네요 ^^;
미국요리맞나요 ㄷㄷ 고기고기하고 기름진게없는 채소채소한 미국요리라니 신기하네요
미국은 뭐랄까 여러 문화가 섞여있다보니 어딜 가도 채식주의자용 메뉴는 있더라구요. 꼭 채식주의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종교적 이유로 특정 고기 못 먹는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그래서 의외로 채소채소한 음식도 꽤나 발달되어있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