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류지수 지음, 『오늘은 홈술』, 청림, 2019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면 아마 “대학교만 가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 아닐까 싶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부터 TV 연속극 대사까지도 “대학교 합격만 하면 된다”라며 달래던 시절.
하지만 막상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보니 그 자유랄게 그다지 대단한 것도 없었는데,
십여 년간 ‘대학만 가면’이라고 되뇌며 공부하던 놈이 학생증 하나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유흥의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작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학생증이 아니라 주민등록증이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술과 관련된 제약 하나는 확실히 풀어주었던 탓이다.
알코올을 마신다는 행위 자체에는 큰 흥미를 못 느꼈지만, 만화책에서 등장했던 칵테일 이야기에 심취해서
커피술을 됫병으로 사다 놓고 주야장천 우유와 얼음을 타서 ‘깔루아 밀크’라는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메뉴 선택이었던 것이, 학창 시절에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과도기를 장식하기에 깔루아 밀크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커피 우유를 연상시키면서도
알코올 도수 20도의 강렬한 존재감은 이제 세상의 쓴맛도 슬슬 익숙해져야 하는 그 당시의 상징과도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만화책 "카페, 알파"에는 동물성 단백질을 못 먹는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유 정도는 마셔보려고 노력하던 끝에 커피술을 타서 시도해보는 알파.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그 맛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마시지만 결국 길거리에서 신문지 덮고 자다 깨는 술주정으로 결말이 난다. 깔루아밀크는 이렇듯 마실 때는 달달하니 술술 들어가지만 일어날 때는 그 여파가 한 번에 몰아치는 무서운 칵테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라 십 수년간 다른 술은 없어도 깔루아만큼은 반드시 집 어딘가에 한 병씩 비치해 둔다. 내 영혼을 위한 비상식량이랄까.>
칵테일의 상징성은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오죽하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는 “칵테일로 시작해서 와인과 함께 즐기며 커피로 끝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이라면 식사 메뉴를 선택하기 전에 칵테일 메뉴부터 먼저 보여주며 주문을 받는다.
예쁜 유리잔에 담긴 알록달록한 식전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천천히 메뉴판을 보며 음식과 와인을 주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칵테일의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술이 센 사람이나 약한 사람 모두가 각자 취향에 맞게 마실 수 있고, 상쾌한 맛과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수많은 제조법 못지않게 그에 얽힌 상황과 뒷이야기도 다양하다는 데 있다.
모임이나 기념일의 성격에 맞는, 메시지가 담긴 특색있는 칵테일을 주문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점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홈술, 혼술을 할 때도 빛을 발한다.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고서야 술 마실 때마다 원하는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데는 아무래도 깡소주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탄생 비화나 추억이 담긴 칵테일이 제격이다.
어렵게 공부해야 하는 위스키나 와인에 비하면 즐기기도 쉽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으니 편의점이나 동네 마트에서 파는 재료로 칵테일 한 잔 만들어 가볍게 마시는 게 유행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칵테일 초보자들이 홈술을 시작하는 데 참고하기 좋은 자료다.
쉐이커(술을 흔들어 섞는 도구)나 지거(칵테일용 계량컵), 바 스푼의 번쩍이는 광택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편의점에서 파는 상품을 대충 섞어도 맛있는 칵테일 레시피’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준 벅June bug이라는 칵테일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별로 쓸 일도 없는 멜론 술이며 바나나 술을 남대문 시장까지 가서 한 병씩 사 왔던 입장에서는
아예 상표명까지 콕 집어가며 “썬키스트 멜론 소다와 순하리 소다톡 바나나맛을 사용하세요”라는 레시피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지름길이 있었구나’ 싶어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말리부는 코코넛 특유의 향이 살아있는 캐리비안 럼이라서 특징이 강한 편이다. 칵테일 별로 안 마셔본 사람이라도 '여기엔 말리부가 들어갔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이렇게 자기 주장이 강하다보니 휴양지 해변가에서 마실 법한 칵테일이 아니고서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술이 취향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큰 병을 사서 썩히느니 미니어쳐 한두병 사놓고 꼭 필요할 때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제품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약간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명 크리에이터들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특정 상품을 언급하면서 마치 자기가 평소에 좋아서 이용한 것처럼 선전했던, 이른바 “뒷광고” 논란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브랜드는 단순히 구하기 쉽다는 장점 외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며 심리적인 장벽을 허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말리부 오렌지Malibu orange라는 칵테일은 말리부라는 코코넛 술과 오렌지 주스를 섞어 만드는 간단한 칵테일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오렌지 주스 대신 쌕쌕 아이스바와 쌕쌕 주스를 사용한 말리부 쌕쌕을 소개한다.
재료가 더 많이 필요하고 손이 더 가는데도 불구하고 익숙한 상표 덕에 왠지 오리지널 레시피보다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커피 애호가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홈바의 위상 역시 수직상승했다. 선반을 가득 채운 술병과 유리잔은 확실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매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홈바는 돈도 많이 들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데 결국 별로 쓸 일이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역시 입맛 닿는대로, 흥미가 이는 대로 하나씩 구입해서 쓰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 새 멋진 홈바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식 교육을 받은 바텐더가 아닌 이상, 아마추어인 저자가 갖는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술과 부재료의 특징을 훤히 꿰고 있는 전문가만이 만들 수 있는 술은 따로 있으니까.
유서 깊은 칵테일바를 돌아다니며 얼음 상태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칵테일 고수라면 얼음과자를 갈아 넣는 레시피를 보며 “이런 건 진짜 칵테일이 아니야!”라고 외칠 법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야매’ 레시피로 홈술의 매력을 맛보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책 곳곳에서 “더 맛있게, 재미있게, 예쁘게!”를 마치 올림픽 슬로건–더 빨리, 높이, 힘차게-처럼 외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유리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붓게 된다.
칵테일이라고는 소맥만 말아먹던 사람이라면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술 한 병씩 사 모으다 보면 어느새 홈바를 차려놓을 정도로 푹 빠진, 훌륭한 칵테일 마니아 한 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ps. 다른 칼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 (https://www.nslib.or.kr/info/dataroom2.asp?mode=view&number=64&gubun=)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와 준벅때매 바나나리큐르 사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저거 함 해봐야겠네요
야매 레시피이긴 한데 뭐랄까 오리지널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름대로의 맛이 또 있습니다 ㅎㅎ
언제나 맛깔난 글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집에서 만드는 음식만의 매력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