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조경남 『난중잡록 정묘년』
우리 수군 다섯이 왜나라 소년 검사 한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순신 『난중일기』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조총)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조익 『포저집』
이번에 귀순한 왜인(항왜)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4년 7월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 나라는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신의 아랫사람(김체건)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왜의 달인인 아이스 히사타다(愛洲移香)의 검술을 카게류(陰流)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검이라는 검술이다.
-『병학지남연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명의 이여송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노다치로 추정)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유성룡 『징비록』 벽제관 전투 (명나라 기병대가 칼든 왜군 보병들의 기습에 대패함)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에서의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성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을 만들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백광언 등은 적(왜군)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임진년 상』
항왜(투항한 왜군)들이 칼을 잘 써서 우리 나라 살수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이들은 칼과 총을 주조하는 법을 안다 하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이들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지 아니 하는가?
-『선조실록』 1594년 8월 2일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훈련도감에 이르러 배우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전세가 위급한 창졸들간에 단병으로 접전하는 데 있어서는 검술만한 것이 없다.
앞으로는 모든 군사들로 하여금 검술을 익히게 하고,
시재할 때에도 검사를 충분히 뽑도록 해야한다."
-『선조실록』 1596년 12월 5일
그들(왜군)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은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신유한 『해유록』
왜군이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의검법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 입니다.
근접 무기가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홍병구가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유성룡은 제찰사가 되어 오랫동안 절강병법(북방 유목민족의 기마병 보다, 남부 왜구를 상대하는데 적합한 척계광의 병법)의 진중으로 있으면서 육박전을 벌일 때
검술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검술을 긴요하게 사용하는 계첵을 선조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조께서 매우 옳게 여기시어 금위 하는 장사들에게 모두 검술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1629년 4월 14일
병조가 아뢰기를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술을 알고 있습니다.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창, 활, 총, 기마술)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왜군들은 전투시에 멀리 있으면 총을 쏘아 맞히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뽑아 돌진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 그 칼끝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척계광 장군이 왜를 방어함에 있어
총으로 총을 대적하고 검으로 검을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왜적의 검술을 대적 하기에는 부족하여
반드시 낭선과 창으로 방패와 칼을 옹호 하도록 하였다.
-최기남 『무예제보번역속집』
명나라 군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모두 갑옷을 입는다.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을 익혔다.
-『무비지』
왜이(倭夷)는 보통 호접진(蝴蝶陣)을 치는데,
전투시에는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호령을 삼는다.
한 사람이 부채를 휘두르면 무리들 모두가 칼을 춤추며
일어나 공중으로 칼날을 번뜩이며 재빨리 휘두른다.
우리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한 칼에 베여 버린다.
칼은 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막기가 어렵다.
표창과 단도는 자루를 드러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던지는 까닭에 예측할 수 없다.
-『주해도편』 왜국사략
왜나라가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검술은 좌우로 도약 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공격 의도를 숨기니 눈으로 헤아릴 수 없다.
-『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권총을 소지해야 했다. 하지만 권총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칼을 든 일본인에게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말하자면 콜트 리볼버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 중 최악의 무기다. ... 베기 성능의 중대한 결함 때문에, 우리의 칼은 직전에 미리 공들여 칼날을 갈아놓지 않으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공격에 실패한다."
'on Military Equipment,'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1879
"그들은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리에서 칼을 맞게 된다."
Rev. J. G. Wood, 『The Natural History of Man』, 1870
"숙련된 일본 검사는 칼을 뽑는 순간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다. 공격자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방어할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내가 들은바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난도질당한 어떤 수병은 한번 베일 때마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갔다고 한다."
Alexander Michie, 『The Englishman in China』, 1900
참고로 검술은 익히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거야 일대일 결투 상황을 전제로 배우는 고위 무사들에게나 그런 것이고, 일반 병사들에게는 군사용으로 중요한 부분만 추려서 교육하거나 아예 시현류/자현류같이 충격보병들을 위한 검술 유파가 따로 있을 정도임
또한 장창이 등장한다 해도 군도의 중요성이 전장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님(사실 조선군은 장창을 안 썼다만)
혼전 상황이나 육박전에서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이 검의 중요성이 일순위였고, 대기병전에서도 노다치나 클레이모어, 츠바이헨더 같은 양손 장검이 중기병 카운터를 위해서 투입될 정도였음
상대방의 진영 해체를 위한 충격보병들에게도 검 만한 것이 없었고
검술이란게 '모르면 맞아야죠' 스러운 부분이 많다보니 훈련 잘 안되면 당해내기 어렵겠지
그조차 이겨내신 우리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근접하기 전에 화포로 쏴죽이라고"
저렇게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해동검도 쵝오, 조선검술 세계최고라며 사기를 치는 것들이 많음..
전쟁이 칼과 무술로만 하는건 아니지 다른 방면으로 지혜를 잘 모으면 충분히 이길수 있음
현실은 개나 소나 총을 얻으려고 난리였고
사무라이식 기습공격에 당했나벼
현실은 개나 소나 총을 얻으려고 난리였고
그조차 이겨내신 우리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전쟁이 칼과 무술로만 하는건 아니지 다른 방면으로 지혜를 잘 모으면 충분히 이길수 있음
이순신: 우리 수군 다섯이 왜나라 소년 검사 한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토도 다카토라: 우리 함선 133척이 이순신의 배 한척을 돌파하지 못한다.
사무라이식 기습공격에 당했나벼
병사훈련을 시킨다곤 해도 근 100년이상을 내전으로 칼질하던 애들이랑 1대1다이뜨기엔 기술차이는 어쩔수없겠지
저렇게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해동검도 쵝오, 조선검술 세계최고라며 사기를 치는 것들이 많음..
원래 멍청이들이 제일 시끄러운 법이지
솔직히 검술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 최강자가 하면 어떤 거든 최강이 될 수밖에 없긴 하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당대 일본은 잇따른 내전으로 병사들의 숙련도와 실전 경험이 존나 절호조였고 그걸 보고 무예를 가르치는 서적에 일본 검술도 가르치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 최강자가 하면 어떤 거든 최강이 될 수밖에 없긴 하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당대 일본은 잇따른 내전으로 병사들의 숙련도와 실전 경험이 존나 절호조였고 그걸 보고 무예를 가르치는 무예도보통지에서 왜검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계기 또한 되었지.
나한일 시스베시
전문가는 조선검술은 훈련용검술밖에 없었다고함 실전을 위해 단련하는게 아닌 훈련할때 쓰는것 총검술같은걸까나. 총검술대련같은게 없는것만봐도...
검술이란게 '모르면 맞아야죠' 스러운 부분이 많다보니 훈련 잘 안되면 당해내기 어렵겠지
모르면 맞아야지 (죽음)
"그러니까 근접하기 전에 화포로 쏴죽이라고"
굉장히 긴 공방을 상정한 기술도 있다던가 되게 재밌는거 많긴 하더라구요 야규신카게류나 가토리신토류쪽만 본거지만..
갑옷 장착시 전투법은 아예 트리가 다르대
??? : 검술이 좋은거지 일본도는 구림!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6월 1일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성종실록』 1482년 9월 24일 왜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관직을 주고 기술을 전습받자는내용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未便)합니다" 『성종실록』 1487년 5월 15일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1725) 9월 24일 전 만호 이태배의 상소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무예도보통지』 왜검
무와 무관을 천시했던 자연스러운 댓가겠지 일본은 몇십백년을 칼질의 세상에서 살았고 조선이 무관이나 무예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 차이나는게 정상이긴함 뭐든지 신경을 써야지 발전하지
맨날 내전 터지는거 아니면 그게 불가능하지 거기에 더해서 좀만 군사훈련해도 이놈하고 눈치주는 명나라도 있고
근데 북방에서 유목민을 꾸준히 상대해온 거 생각하면 조선도 그렇게 무력이 딸리는 게 아니었음. 그냥 일본이 오랜 내전으로 과하게 강했던 거.
천시가 심했다는건 동감 하는데, 중시 하려면 중시할 이유가 필요하기도 하니까;;;
결국은 그 명나라 도움받아서 살아났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을지도? 지금 한국도 사실상 미국의 비호 아래 무력적으로 미국이 하라는 것만하고 하지말라는 것 안하면서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무력적 발전과 별개로 무력을 키우는게 평화를 위해서라면 결과만 좋으면 맞긴하지
조선 경제구조 생각하면 필요 최저한의 군사력만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라 다른 나라랑 다르게 왕실이 너무 가난하긴 했음
그 총명하다는 유성룡이 반대했으니 뭔가 이유는 있었겠지 이유가 있어서 한 판단이라고 항상 맞지 않는다는게 문제지...
1차 이유는 돈 먹는 하마라서 아닐까.
수백년동안 칼질만 하던 애들이라
검술이 뛰어났다는 부분은 팩트로 인정해야겠군 ㄷㄷㄷ
교차검증 자료가 끝도 없이 나오는 걸 보니 진짜 검술쪽으로는 대단했구나..ㄷㄷ
일본 전국시대때 섬나라에서 지들기리 100년 넘게 검, 총으로 ㅈㄹ나게 싸웠던 애들인데 경험치가 남달랐을듯
맞아본 사람들이 일본도 개↗사기 무기라는데, 안맞아본놈들이 일본도 구리다 어쩌구 ㅋㅋ
쟤들이 뭐 전국시대를 괜히 건너온것도 아니고 전국시대가 막 지났으니 말그대로 실전검술만 남아있는 상태라 봐야지
??? : 활은 어떠냐고? 버려
적들을 상대하려면 저렇게 배우려고 하는 게 맞지.
근데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왔던 애들이 전국시대 승리한 베테랑 최정예병이기도 했음. 반대로 우리쪽 최정예는 북쪽 국경 지킨다고 못 움직여서 거진 2선급 부대로만 싸웠고 그나마 정예병 있던건 탄금대에서 초전에 꼴박해서...
저 검술이 오랜 전쟁동안 이걸로 안죽었음 하는 애들만 모아온거라 실전성 완벽하게 증명된것들이라.
한반도는 고려때 무신정변으로 좀 크게 데여서 그런가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무과 대우가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는데 일본애들은 못해도 조선이 건국되고 임진왜란 하기 전까지도 거의 계속 전쟁전쟁 했었으니 당연히 딸리는게 맞음 아마 도요토미도 이런거를 나름 상정해서 전쟁 건게 아닐까 싶긴 한데 아니 하필이면 그때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의 SSS+급 무장이 나타나가지고...
미친무장+미친국민성. 아니 왜 대가리가 도망갔는데 백성들이 죽창들고 뛰어오는거야!!
대한해협 너머로 병력을 드랍해서 약탈하는거항 점령해고 유지한다는건 전혀 다른 이야기란건 생각하지 못함. 내전으로 다져진 경험이 문제가되서 다른동네 굴러가는걸 생각 못하게됨. 세금 쥐어짜서 일단 이기면 내땅 같은게 바깥에선 안통한거지.
츠지기리(辻斬り, 묻지마살인)같은게 따로 용어가 있을 정도로 일상적으로 사람 썰어대던 나라인데 약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
이미지랑 다르게 제법 쎄게 금지했다고는 하는데, 그래봤자 용어가 남을 정도면 뭐.......
평화에 찌들어 기열찐빠된 조선군 vs 서로 죽고 죽이는 전국시대를 겪어 정예화된 일본 정예군 근접전으로 쳐 발리는건 어쩔수 없긴했어, 근데 저 일본 정예군 애들도 평화에 찌드니까 100년도 안되서 기열찐빠되었다고 기록에 남아있더만 ㅋㅋ
한국도 기열찐빠라기보다는 북쪽에 집중이 되어있었지
그래서 무슨 호흡이라고?
그래서 조선에서 일본검술을 어느정도 가저와서 써먹었다고는 듣었는데 맞나?
어째 한국이 운이 안 좋은건지 총력전보면 침략자들이 최정예들만 오는거 같네. 임진왜란때는 전국시대 일본애들이 호란때는 부족 통일한 만주족애들이 6.25때는 국공내전 중국애들이...
ㄷㄷ한검술 사랑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시합을 위한 민간 격투기도 아니고 죽고 죽이는 무기술이 발달했다는 건 그만큼 나라가 어지럽고 치안이 불안하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렇게 평가했겠지?
저때는 사람죽이기 제일 쉬운 도구니 그렇겠지. 총기 합법화 안되서 다행이다 랑 비슷한 말일듯
근데 우리 나라도 검 썼는데, 제대로 훈련된 사람이 적었나??
레이드 경험치가 없다는 기본 해석일걸.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무예만으로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싸움판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증명함
우리는 외침이 많았잖냐 지정학적으로 백병전 하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니까 애초에 백병전으로 붙는걸 최대한 피할 생각으로 전쟁한거겠지 북쪽에 저그떼가 수시로 내려오는데 거기에 칼 차고 물량전을 생각하는게 이상하지 그래서 검술보단 활이나 화포로 최대한 붙기전에 죽이거나 붙을때는 농성전으로 간거일거고 일본이 뭐 수나라 당나라한테 물량전 겪어봤겠냐 지들끼리 투각투각하고 끝인데 검술? 좋다 이거야 근데 백만기병 앞에서도 검술로 가오잡을수 있을까 난 아니올씨다라고 생각
아무래도 매일 같이 칼질 하던 짬밥이 어디 안갔나보네 전국시대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증건가
이런 애들 상대로 개돌해서 무쌍 찍은 황진, 한명련 같은 장수들도 참 대단한듯
일본도 ㅇ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