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미국 유학 당시 '미국에서 마지막 여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떠났던 여행입니다.
무려 1월 한겨울에 알래스카로, 그것도 앵커리지보다 훨씬 더 북쪽인 페어뱅크스까지 날아갔었죠.
여행을 떠나며 몇가지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하고싶었던 것은 북극점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진짜 북극점은 아니고, 도시 이름이 북극점(North Pole)입니다.
"내가 북극점을 가봤다"라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이지요.
그리고 북극에는 당연히 산타클로스도 삽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산타클로스 조각상. 세계에서 가장 큰 산타클로스 조각상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얼굴 표정이 "허허허~ 너는 나쁜 아이 목록에 있구나?"라며 노려보는 듯 합니다.
완전 무서웠네요.
그래도 이걸로 거짓말 탐지기에 당당하게 "나는 북극점에서 산타클로스를 만났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타클로스만 휑뎅그레 서있는 것은 아니고, '산타클로스의 집'이라는 기념품 가게가 커다랗게 있습니다.
워낙 북쪽이라 해가 너무 늦게 뜹니다. 아침 10시가 지나도 여전히 새벽같네요.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산타클로스가 새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는 거.
이제 차를 돌려 온천이 있는 숙소까지 달려갑니다.
자동차로 대략 한시간 반 거리.
일리노이에 살 때도 운전하면서 끝없는 옥수수밭에 놀라곤 했는데, 여기는 끝없는 눈덮인 숲의 연속입니다.
곳곳에 야영장이 있는게, 여름에 와도 좋겠다 싶었네요.
목적지인 치나 온천 (Chena Hot Springs)에 도착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뜬금없이 비행기가 반겨주네요.
진짜 비행기인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 저렇게 매달아 놨을까요.
어차피 혼자 자는거라 큰 숙소도 필요없고, 하룻밤만 묵을 생각이라 그냥 저렴하게 롯지(오두막)을 예약했습니다.
커다란 건물에서 자는 것보다 이게 왠지 알래스카 분위기가 나는 듯해서 더 끌리더군요.
내부는 크게 특별한 건 없습니다. 벽난로 대신 전열기구로 난방을 하는게 좀 아쉽기는 했지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 없다는 거.
외부 화장실이 있긴 한데, 1월에 알래스카에서 외부 화장실을 쓰러 가면서 '3분만에 얼어죽을수도 있겠구나'싶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도 씻는 건 온천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숙소에 짐을 풀었으니 두번째 버킷리스트를 체크하러 나서 봅니다.
같은 리조트 내에 위치한 노천온천이라 50미터 정도만 걸어가면 되지만 혹독한 알래스카 겨울 날씨는 집밖에서 10미터만 걸어갈 일이 생겨도 옷을 든든하게 입고 가야 합니다.
리조트 부설 건물들이 많지만 온천을 못 찾고 길을 헤멜 일은 없습니다.
하얀 증기가 뭉게뭉게 올라오는 것이 멀리서도 보이니까요.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샤워장을 거쳐 나오다보면 조그만 실내수영장도 보입니다.
추운 게 싫거나 유황 냄새가 싫은 사람들 (주로 아이들)이 여기서 아쉬운대로 수영을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눈밭에서 유황온천 즐기러 온 것이니 한눈팔지 않고 야외 노천탕 출입구로 직진합니다.
진짜배기 노천 유황온천.
언젠가 기회가 되면 겨울에 일본 여행가서 눈 덮힌 풍경을 보며 노천 온천을 즐겨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미국 알래스카에서 그 꿈을 이루다니 세상사 모를 일입니다.
몸은 뜨끈뜨끈하고, 공기는 차갑고, 희미한 유황 냄새까지 즐겁습니다.
다만 좀 오래 있다보면 수증기 때문에 머리에 물방울이 맺히는데, 이게 바로 얼어붙으며 하얗게 변합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면 콧수염과 머리카락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지요.
춥다가 뜨거운 물을 머리에 끼얹으면 또 다시 금방 얼어버립니다.
저는 그래서 수건으로 찜질방 양머리 하나 쓰고 다녔더니 무수한 관심의 시선이!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질때까지 실컷 온천욕을 하고 뽀송뽀송해져서 나왔습니다.
숙소에서 간식으로 컵라면 하나 끓여먹고 아이스 뮤지엄 투어를 돌기로 합니다.
리조트 홈페이지에서 얼핏 봤을 때는 얼음으로 만든 커다란 건물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프린트 벽지로 인쇄해서 붙여놨습니다.
속았다!
속았다!...라며 들어갔는데 문 열자마자 진짜 얼음으로 만든 벽이 등장합니다.
속았다고 생각하게 만들도록 속았다!
뭐, 진지하게 생각하자면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얼음을 유지시키려면 당연한 구조겠지만요.
실제로 이 강추위에도 거대한 얼음벽의 위쪽은 조금 녹아내린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즘조각 작업실. 여러가지 얼음 조각들을 만드는 곳입니다.
다른 것 보다도 눈벽에 구멍 파서 각종 연장들을 그냥 끼워놓은 게 인상깊었네요.
왠지 옛날에 이글루 만들고 벽에 구멍 파서 촛불 끼워놓았던 게 생각나기도 하고...
실물 크기의 얼음 말과 기사들.
뭐, 전체적으로 조각품의 수준이나 크기가 엄청난 것은 아닙니다만, 비는 시간에 눈요기삼아 한 번 둘러보기 좋은 수준은 됩니다.
얼음으로 만든 방에 놓여있는 얼음 의자나 침대에 누워보기도 하구요.
꽃나무를 통채로 얼려 만든 장식품.
일년 내내 추운 지역에서는 이런 식으로 얼려서 정원을 꾸미는 것도 괜찮겠다 싶네요.
뮤지엄 내부에는 바가 있어서 칵테일 등을 주문해서 마실 수도 있습니다.
워낙 추우니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서라도 좀 훈훈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요.
하지만 지금은 꾹 참기로 합니다.
숙소에 돌아가 눈 좀 붙였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오로라 구경을 하러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스 뮤지엄 투어를 끝내고 숙소에서 쉬다가 밤이 깊어가는 시각에 다시 나옵니다.
오로라 투어를 예약했기 때문이지요.
광공해가 없고 전망이 탁 트인 높은 언덕이 오로라를 보기 좋은 지역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쌓였으니 평범한 자동차나 버스로는 엄두도 낼 수 없고, 캐터필러가 달린 설상차를 동원해서 이동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눈 앞에 등장한 오로라!
삼각대를 가져가긴 했는데, 오로라가 그렇게까지 밝지 않은데다가 카메라도 십 년 동안 써온 고물 똑딱이 기종인지라 야간 촬영했더니 노이즈가 많이 끼네요.
옆의 아저씨가 커다란 사진기로 찍은 건 굉장히 화려하게 나오던데 말이죠.
알래스카의 독특한 건물인 유트(Yurt).
시야가 탁 트인 대신에 지대가 높고 바람을 막아줄 나무도 없기 때문에 안그래도 기온이 영하 37도까지 떨어지는데 체감온도는 그야말로 미칠듯이 춥습니다.
이런 곳에서 몇 시간씩 버티며 오로라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투어에는 장작 난로가 설치된 유트와 각종 음료, 간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와서 사진 찍다가, 들어와서 뜨거운 커피나 컵라면으로 몸을 녹이고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밖에 나와봐요! 오로라 멋있는 거 떴어!"하면 우르르 나가고 잠깐 감탄하다가 너무 추워서 또 우르르 돌아오고.
6시간짜리 투어인데 나중에는 다들 지쳐서 유트 안에서 조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래도 중간중간에 이렇게 멋있는 오로라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완전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먹구름 낀 날씨도 아닌 덕에 이렇게 구름에 가린 오로라도 보입니다.
오로라를 보면 '와, 아름답다. 멋있다.' 이런 생각이 든다던데 이 오로라는 구름에 가려서 모습이 이상하게 나왔네요.
왠지 지구 멸망급 소행성이 떨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이 날은 오로라를 보기에 최적의 날은 아니었습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크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거든요.
1. 주변에 광공해가 없는 (=도심지에서 떨어진) 위치
2. 구름이 없는 맑은 날씨
3. 태양풍이 강해서 오로라 활동이 활발한 날.
이 중에서 1번과 2번은 대충 충족했는데 3번이 약했습니다.
오로라 활동 강도를 KP index라고 하는데 이 날은 KPI가 2에 불과했거든요.
0부터 9까지 관측되는 KPI인데 2면 '낮은 활동량'에 속합니다.
적어도 4나 5정도였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참고로 약 한달간의 오로라 기상예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여행을 계획하는 분이라면 미리 확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https://www.gi.alaska.edu/monitors/aurora-forecast)
그렇다고 8이나 9정도의 미칠듯한 자기장 폭풍을 노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로라 반경이 너무 넓어져서 페어뱅크스를 아예 지나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뱀이 꼬물꼬물 움직이듯이 길이가 바뀌는 오로라.
밝기나 활동량에서는 아쉬워도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오로라를 볼 수 있어서 좋았네요.
그런데 밖에서 계속 관측하기에는 너무나도 추운 날씨.
이번에는 딱 이때밖에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데다 알래스카에서 해보고 싶은 일들 대다수가 겨울철 활동인지라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에 또 오로라 투어를 할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선선하게 밤새워가며 누워서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로라의 활동량은 날짜별로 다르기도 하지만 시간대별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투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활발해지는 오로라.
이거 작별인사인가? 싶기도 합니다.
바로 머리 위로 장막이 드리우듯 펼쳐지는 오로라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다시 숙소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해서 평생에 한 번은 보고 싶었던 오로라를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네요.
나중에 은퇴하고 여유가 있으면 알래스카 같은 곳에서 한 달 정도 살아도 좋겠다 싶더군요.
아무도 없는 외딴 산장에서 눈 내리는 소리만 들으며 조용하게 지내다가 밤이면 오로라 구경하고...
알래스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굳이 이 추운 겨울에 알래스카 여행을 떠난 이유, 개썰매를 타러 출발합니다.
주차장에는 이렇게 전기 콘센트가 줄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시동이 안 걸릴 경우를 대비해서인데, 거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공항에서 빌린 렌트카 트렁크에도 엔진 시동용 연장선이 놓여있을 정도.
개썰매 투어하는 곳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이긴 합니다. 이 미칠듯한 추위만 아니라면 말이죠.
숙소 바로 코앞에 있는 야외화장실 갈 때도 얼어죽겠는데, 십 분 정도 걷는 것은 도저히 못할 노릇입니다.
차를 타고 도착하니 눈밭에 개집이 마치 주택 단지마냥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이, 자네 왔는가"라는 듯한 표정의 개가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강아지들 구경하며 몇 분 정도 기다리자 먼저 출발했던 팀이 돌아옵니다.
생각보다 제법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썰매개들의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습니다.
한 타임 돌았으니 개들을 교체할 줄 알았는데, 그냥 이 개들이 계속 썰매를 끌더군요.
너무 힘든 것 아닐까 걱정했는데, 썰매개들의 체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식후 운동 수준이라고.
하긴, 잠시 쉬면서 오줌도 싸고 숨 좀 고르더니 자기들끼리 묶여있는채로 치고받고 놀기 시작합니다.
썰매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무겁습니다.
직원이 조종하고 승객은 저 혼자 탈 줄 알았는데 네 명이 한 썰매에 함께 타네요 ㅎㄷㄷ
하긴, 남극점 탐험할 때 스콧은 설상차에 말까지 동원했지만 연료는 얼고 말도 얼어죽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던 만면 아문센은 개썰매로 스콧을 앞질렀으니 추운 지역에서 개썰매의 위력이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커플로 온 두 사람이 앞에 타고 제가 맨 뒤에 탔는데, 처음에는 알콩달콩 커플놀이하면서 분위기 좋다가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맨 앞에서 칼바람 맞으며 그대로 얼음조각상이 되더군요.
리조트 경계를 따라 20여분 정도 달리는 짧은 투어인데, 제법 속도감이 있는데다가 개들이 달리면서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해프닝이 재밌습니다.
달리면서 목이 마른지 눈 먹는 개, 자꾸 장난치는 개, 열심히 자기 할일만 하는 개, 게으름 피우는 개 등 성격도 다양하네요.
개썰매 투어를 끝내고 다시 리조트로 돌아와 언 몸을 녹이고 배를 채웁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무스(알래스카 사슴) 뿔을 매달아 놓은 게 눈에 띕니다.
우선 속을 따뜻하게 풀기 위해 클램차우더를 주문했더니 표면장력 실험하듯 넘치기 직전까지 퍼주네요.
맛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도 뜨거워서 이 추운 날씨에는 더없이 고마운 음식입니다.
알래스카까지 왔으니 연어를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에 주문한 연어.
감자튀김과 채소 볶음을 곁들여 나옵니다.
막 엄청 맛있어! 이 세상 맛이 아니야! 수준은 아니고, 그냥 맛있다 수준입니다.
유통 기술이 워낙 발달한 요즘 세상엔 알래스카 연어가 뉴욕까지 오더라도 신선도가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 않으니까요.
알래스카 버킷 리스트에 남은, '알래스카에서 직접 낚시한 연어로 요리하기' 정도는 달성해야 진짜 맛있는 연어 맛을 볼 수 있겠지요.
이제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올때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 이어집니다.
눈이 워낙 많이 와서 도로의 절반은 눈에 덮혔네요.
가끔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눈이 휘날리며 하늘을 향해 거꾸로 날아가는 듯한 장관도 볼 수 있습니다.
도로 갓길에 잠시 세워놓고 찍은 사진 한 장.
"알래스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눈덮힌 숲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진으로 보면 거리 파악이 힘들어서 실감이 안나는데, 저 나무 한 그루 한그루가 엄청나게 큰 나무들입니다.
그야말로 미국식 스케일.
공항에 차를 반납하기 전, 마지막으로 페어뱅크스 시내에서 오로라 관측 스팟으로 알려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마지막으로 오로라를 기다려봅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구름이 더 낀데다가 광공해 때문에 하나도 볼 수 없었네요.
그래도 눈꽃이 피어난 나무들 모습은 감상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겠지요.
이렇게 사흘간의 짧은 알래스카 여행이 끝났습니다.
대자연과 함께 고독을 즐기기 좋은, 그런 동네 느낌이었네요. 나중에 여유 되면 한 달 정도 살아보는 것도 좋을 듯.
오래 살기엔 너무 춥더라구요...
p.s. 요리전문사서의 추천도서: 꿀벌과 벌꿀과 허니버터쿠키 편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https://www.nslib.or.kr/info/dataroom2.asp?mode=view&number=103&gubun=
드라마 파고 생각이 ㅎㄷㄷ
혼자가기 너무 아까울거같다
와 오로라 엑시즈같네요
잘 봤어요
멋진 광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