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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 (부- 빈집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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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읽을 사람




 얇고 가벼운 책이다. 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펴보지

않은 것처럼 빳빳한 녹색 표지에 제목만 얇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종이가 습자지처럼 얇아서 뒷장의 글씨가 연하게 비쳤다.

비트겐슈타인이 인용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표현할

어휘를 갖고 있다“라는 말이었다. 화자가 작가를 하나 발굴했다. 그

작가는 아직 살아 있지만 한 번도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은 자였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지 않은 자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냐는

질문을 그 친구가 던지고 있었는데, 아주 상투적이어서 오만하기까지 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읽었다. 치정, 음모, 기만 등 예상 가능한

진행을 피하고자 함인지, 그자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 청소부로 일하던

이의 작품을 가로챌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직 작품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열정에 관한 소설이나

 선량함에 대한 소설일지도 몰랐다. 세상 때가 타지 않은 대학원생은

그이가 거부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미 늙었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죽으면 끝인데”) 저자의 작품은 저자의 것이

아니며, 모든 저자는 죽은 거나 다름없으므로 작품을 내놓자고

설득했다. 작품을 썼다는 것은 이미 보여줄 마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달랬고 어떤 의미에서 노인은 이미 은퇴하여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오히려 잘됐다고도 구슬렸다. 대학원생은 결국 막묵내로 폐지로 묶어

내놓은 작가의 작품을 주워 모아 출판사로 보냈다. (교묘한 방식으로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설득 장면 이후로 나는 그 대학원생이

남자일 거라고 노인이 여자일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다.)

 “투명한 쓰레기봉투에 온전하고 아름다운 다섯 개의 빨간 사과가

담겨 있어서 왜 저걸 버렸을까 살펴보게 된다“는 추천사를 달고

팔렸다. 이후로 한 문장 한 문장 읽기를 방해받았다. 문장의 순서를

믿을 수 없었고, 챕터의 순서를 확신할 수 없었다. 몇 달간 도서관에

가서 다른 작업을 하려다가도 소설 섹션이 맞을지 르포 섹션이 맞을지

고민했고 어쩌면 철학이나 사회과학 쪽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가

의심도 했다, 그 책을 한 줄씩 혹은 반 페이지씩 읽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가서도 뽑아만 놓았다 다시 꽂은 날이 더 많았다. 와중에

노인이 죽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평범하게(“안전하게”) 죽었다.

노인은 평생 러시아어를 공부했는데 러시아에 가본 적은 없었다.

노인이 아직 노인이 아닐 때, 적어도 노인이 태어난 나라에서는

전쟁이 다 끝나가고, 살인이 용서받지 못할 시기부터 시작한 공부였다.

군부독재 시절 직전의 일이었다. 드디어 노인의 과거가 밝혀지는가

싶었는데, 페이지가 겨우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노인은 이름을

바꾸고 나이를 바꾸고 인종을 바꾸고 썼다. 모든 것은 작품 안에, 피부

밑에 있다고 믿어지는 핏줄처럼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가여운 박사 수료생 친구는 들은 바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 나기

전에, 몇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노인 자신이 쓰지

않았다.

 면지까지 넘기자 책이 끝나버렸다. 작가는 이 소설은 특정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독자들이(“지각 있는 독자들이여”)

노인의 살인 방식과 살인 동기에 대해 밝히지 않는 것을 관대하게

이해할 거라고 썼다. 살인이라니? 공격이라면 이상한 공격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들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정 알고 싶으면 적합한 청구 번호를 소개해놓았으니

판결문을 찾아보라고 했다. 완곡한 거절 역시 거절이다. 적당히 팔렸고

적당히 잊혔다. 전 세계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유명한 상을 받지도

않았다. 인세는 노인의 납골당을 관리하는 데 쓰였다. 번복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무섭도록 증오하고 슬퍼하고

용서를 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수일간,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부드럽게 상처받았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자신의 손만 열고 덮고 꽂고 뽑았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자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곤 하는데, 끝 챕터부터 역순으로 다시 읽어보았다.

우리가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푸른 저녁

 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발간 30주년 기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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