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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 (부- 고스트라이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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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속의 검은 잎

 ―고스트 라이터, 그리고 기형도 시인에게





 1

 한 사내가 유리벽을 친다.

 이내 주먹이 부풀고

 살점이 찢겨 나갔지만

 고통을 움켜쥔 손은 멈출 줄 모른다.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자

 유리벽에 비친 얼굴들이

 한 사내의 정신과 한 사내의 실연과

 한 사내의 으깨진 신념 따위를

 수런거린다.


 쿵쿵, 유리벽에 비친 얼굴들은 한 사내의 주먹에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애써 할 말의 너머를 바라본다.

 고요한 물잔 속

 잃어버린 통점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처음 주먹을 쥐었던

 투명한 자궁을 훔쳐본 것처럼.


 나는 기형도가 아니었지만,

 기형도의 무한함을 헤아리곤 한다.


 유리벽 너머엔 순순히 유리벽이 서 있고

 또 다른 한 사내가 주먹을 짓이긴다.

 무표정한 얼굴들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색감으로

 경화수월鏡花水月이 되어 메말라간다.


 누군가 한 사내를 위해 두 손을 모았으나

 쿵쿵, 둔탁한 울림은 심박동의 은유가 아니었다.


 가장자리만 남은 말의 타악기,

 그 짧은 삶의 파장으로

 두꺼운 유리벽에도 금이 간다.


 마침내 뜨거운 핏물이 스며들 때

 한 사내는 얼굴들 위로 그려진

 붉은색 지도 한 장을 받아 든다.


 태초의 아담이 주먹을 휘둘렀던 곳

 저마다의 몸속에 매장되어

 죽어서야 꺼내볼 수 있었던 고통의

 축척도縮尺圖 속에서


 한 사내는 두고 온 맥락을 찾는 중이다.


 그렇게도 많은 자서自序들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우는 동안

 지도 밖 묘령의 상처들은 고백 없이 아물고 있다.


 나는 기형도의 성씨를 물려받지 않았음에도 거의

 기형도에 가까운 것들만을 빼앗긴다.


 이를테면 그것은 핏방울을 뒤따르는 눈먼 자의 여정이

거나

 자신의 내부에서 길 잃은 자의 소희

 서로에게 장막이 있다고 믿는 투명함 사이로

 문채文彩라고 불린 한 사내가 떠나간다.


 안개와 어둠, 늙은 개에 대한 사랑조차

 백지 위에선 주먹을 쥔다.


 쿵쿵, 현실의 살에 박힌 허구가

 또 다른 피를 흘리고

 펜을 쥔 주먹 속 대기는 죽음을 묶는 노끈처럼

 풀려나간다.


 한 사내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했지만 믿음은 애써 죽

음에 대한 필명이었다.


 손이 닿아야 태어날 수 있다면 귀신은 스스로를 만질

것이다.


 

 2

 이 건축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안개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비상 조명이 설치되지 않은

벽면 속

 불량한 골재가 기억의 철근을 부식시키고

 붉은 녹물이 핏자국처럼 배어 나오는


 그래서 누군가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필시 주저흔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뒤돌아봄 직한

 금지된 석면이 부스러기를 떨구고 있는

 

 이 건축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화원만당花月滿堂 한 폭의 족작 걸린 방에서

 나를 정복한 당신은 나의 노예가 되길 원했습니다

 내 희망의 내용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의 이야기

 당신의 작가는 동화를 쓴 적이 없었습니다만 옛날 옛

적 이빨 없는 악마의 입에 든

 희고 고운 손가락을 가졌습니다

 그의 손가락을 빠져나온 반지가

 찢어진 금연 스티커가 붙어 있는 환기구 뒤편으로 굴

러갑니다

 그러면 어떤 은밀한 대화도 엿들을 수 있는 사랑이 분

주해집니다

 유일하게 산 사람을 위한 건축이 아닌 고지식한 건축

학자들의 변증법적 해석의 욕망을 부추기는

 창과 문이 없는 방

 먼 지방

 먼지의 방에서


 당신은 권선징악적 첫날밤을 보낼 수 있습니까?


 어쩌면 이 건축은 프랑스식 벽돌쌓기 공법으로 지어지

식민지 시대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는 동안 당신의 청춘은

 곳곳이 파인 대리석 층계참이나 낙서 가득한 담벼락이

되어가고 나는

 식민지 조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서양인 화가의 눈

처럼

 매 순간의 삶을 이미지가 선점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도도한 취향의 눈금자로 호출되는 불법 점유물들은 투

탕카멘의 저주 대신

 우리 모두를 침입자로 만드는 중입니다

 어제는 문화재 관리 부서의 신임 공무원이 유성기 음

반을 취입했던 늙은 여가수를 내쫓기 위해 다녀갔습니다

 늙은 여가수의 음반 속에는 바람 소리만이 남아 있습

니다

 뒷모습으로 버텨온 바람은 마지막 대사에 찍은 마침표

보다도 가볍습니다

 구덩이로 남은 유년의 지층이 아스팔트 위로 나뭇가지

를 꿈꾸고

 그 잎사귀를 흔들면서

 바람은 처녀지處女地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이 건축에서 노래할 수 있는 건 늙은 여가수뿐

입니다 점점 더 실천할 수 있는 대사보다 부정할 수 없는

지문地文이 확고해집니다


 안개의 도시에서 당신은 아프지 않을 만큼 투명한 유

리창과 한없이

 온전한 그림자들로 내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따금 풍문으로 남은 핏자국들이 있지도 않은 숨을

헐떡거리며

 첫발을 내딛습니다

 이 건축에 오면 모두가 육신을 지니고 육신이 건널 수

있는 최대치의 

 이별을 향해 갑니다


 지상의 고독을 철거하기 위해 쥐 오줌으로 얼룩진 천

장을 부순 이들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손전등 불빛을 틈새로 밀어 넣었을 때

 이별은 커다란 가체를 쓰고서 그 무게에 짓눌려

 큰절을 하듯 엎드려 있었습니다

 살점 없는 두개골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재가 되어 삭아 내렸습니다

 나풀거리던 색동저고리는 한 세기가 들어왔다 빠져나

간 폐허를

 감싸고 있습니다

 폐허의 이름은 슬픔이 되었다가 눈물이 되었다가 마

침내

 검은 입이 되었습니다


 실패한 혁명의 자리마다 검은 입이 다시 이 건축으르 쌓

아 올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입속으로 들어와 두 눈으로 비춰지는 이 건축을

 사람들은 빈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극장이라고 불렀습

니다 그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면 이 건축은 프랑스식 벽돌쌓기 공법으로 지어지

식민지 시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이 건축에서 당신을 보았고 이 건축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 입속에는

 당신이 지은 말의 절 한 채가 들어와 있습니다

 말의 절에 가면 소리 나는 모든 허물어짐을 말하고 싶

어집니다

 아무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허물어졌다고 말하는 건 어려운 질투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힘이라고 고백했지만 나는 잘못 쌓아

올린 벽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당신에 대해서도 벽돌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새 담쟁이넝쿨이 벽돌을 집어 삼키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넝쿨의 식욕이 간판을 바꿔 달고 해석을

기다립니다

 건축에 대한 해석은 식물을 닮았습니다

 내가 부끄러움을 알면서 도망가지 않는 건 식물에 대

한 예의입니다


 어째서 건축주에겐 천국이 없습니까?

 어째서 건축주에겐 유배지가 없습니까?


 이 건축에선 소리 나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나는 변명거릴 찾기 위해 매번 소리 내어 입을 닫습

니다


 그래요 처음부터 그건 바람에 흔들리던 잎이었나 봅

니다


 * 무라카미 류의 소설 제목.






 기혁

 소피아 로렌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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