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6
이사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짐
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멘 장독 몇개, 헌옷 보
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살이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맥
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 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모두 서
로 얼굴을 마주치거나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확돌이나 헌
덕서, 망태, 절구통 같은 촌 물건들은 대충 이웃들에게 몇
푼씩 주면 팔거나 거저 주며 아주머니는 목이 메이는지 넋
을 놓곤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들이 대대로 힘써 살았던
땅, 논과 밭과 온갖 과일나무들, 뒷산 몇백년 묵은 귀목나
무, 강 건너 평밭, 꽃밭등, 절골, 뱃마당에 두루바위, 벼락
바위, 눈주면 언제나 눈에 익어 거기 정답게 있던, 우리들
이 자라며 나무하고 고기 잡고 놀아주었던 몸에 익은 정든
이름들이 구로동 성남 신길동 명동, 이런 낯선 서울 이름들
과 엇갈리며 우리 머릿속을 쓸쓸하게 지나갔다.
마당의 화톳불이 사그라져가고 새마을 슬레이트집은 휑
뎅그레 비워졌다. 마을회관 마당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
와서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다. 아주머니들은 울먹이며 눈
물을 훔치며 가다가 애들 빵이라도 사주라고 구겨진 돈 몇푼
씩을 치맛속에서 꺼내어주며 복받치는 설움들을 감추지 못
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
은 듬성듬성 줄어들어 있었고 우리들은 얼마나 가슴 아파
했던가. 이제 떠날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회관 마
당엔 어찌하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들과 몇몇 아이들만 남
아 흐린 불빛 속에 어둡고 지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을 사
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는 우리들과 술을 마셨다. 논물 풀
믈 든 구식 와이쳐츠, 장가들 때 맞춘 구겨진 양복과 닳아
진 구두, 아이들은 그래도 좋아서 운전석에 앉아 빨리 가자
고 조르는데, 우리들은 말없이 술잔들을 비우며 낫에 베이
고 가시에 찢기고 삽이나 괭이에 찍힌 우둘투둘한 겁먹은
손들을 어색하게 덥석덥석 잡아쥐며 말문들이 막혀 그저,
잘 있게 잘 가게 하며 서로 어깨 너머 캄캄한 어둠을 보곤
했다. 그는 뿌리치듯 짐 실은 차 뒤칸에 올라타 우리들을
외면했다. 아주머니들은 훌쩍이며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눈
물을 닦고 아이들은 어머니들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저녁 내내 세간살이들과 한데서 시달릴 그를 생각하니 목
이 메어왔다. 차가 회관 마당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물소리
가 크게 쏴쏴 저 앞 강굽이를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노딧거리를 비췄다. 강물소리가 쏴 하며 우리들 가슴
을 크게 쓸었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
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다섯에 이사라니.
동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
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
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
을 빤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
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
졌다. 회관 불빛이 우리들 등뒤에서 각자 꺼지고 시커먼 어
둠이 동네를 가득 메웠다.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
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 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또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 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
지.
섬진강 물소리가 한번 큰 숨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
김용택
섬진강, 창비시선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