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빌려 사는 세상의 집들이 너무 크
지 않느냐
어여쁘게 물든다
빨갛게 물든다
어여쁘게 물든다
노랗게 물든다
빨갛게나 더 두지
노랗게나 더 두지
어여쁘게 그냥 두지
가을 산
아, 가을 산이 간다
안개비가 내린다.
잎 다 진 가을나무들이 안개 속에 서서 젖는다. 화사
한 봄날 이슬비에 촉촉하게 젖어 날마다 새롭던 잎, 씻
어낼 수 없는 죄는 화려하다. 저 단풍들 좀 보거라. 소
리도 없는 안개비에 속살이 젖어 살아나는 화려한 색깔
들을 좀 보거라.
사람들이 시집을 보낸다. 이 멀고 먼 강가까지, 아이
들이 떠드는 소리 안개 속에서 아득하다. 그들의 시와
사랑, 그들의 고뇌와 외로움, 그리고 그들이 걸어온 흔
적들과 남아 있는 아득한 길. 삶은 때로 아득하니까. 때
로 화려하게 물들고 시은 우리들의 남루한 사랑, 한 편
의 시로 한 채의 집을 지으려는 시인들의 애타는 몸짓들
이 아슬아슬하지만 가을에 집이 그리 쉬운가.
감이 익는다.
아이들이 이파리 하나 없는 감나무를 그리고 감나무
아래 허술한 집 한 채를 짓고, 이 동네 저 동네 이 집 저
집 감나무 감이 익는다고 시를 쓴다. 꽃이 핀다. 노란
산국들이 마구잡이로 피어난다. 운동장가 벚나무는 붉
은 옷을 다 벗는데, 그 나무 사이로 우체부가 빨간 오토
바이에 ‘시의 집’을 싣고 온다.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없는 그 집, 집안에서는 너무 덥고, 집밖에서 눈도 없이
바람만 차다. 보아라. 잠시 놀러와서 빌려 사는 세상의
집들이 내가 살기엔 너무 크지 않느냐.
안개 속에서 돌아온 산하고 놀고 싶다.
안개 속에 가만히 서 있는 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바
라보며 나무야, 나무야, 나랑 놀자. 잎 다 진 나무하고
놀고 싶다.
이슬비가 내린다.
산은 나무의 집이다. 산은 나무를 데리고 어디로 갔다
가 오는 걸까. 안개, 안개가 하얗게 다가오는데, 아이들
이 도화지에 감나무를 그린다. 아이들은 안개 속에서 무
엇이든지 다 그들 세상으로 데려온다. 감나무 검은 가지
의 붉은 감들이 파란 허공에 그려진다. 허공만이 진실일
까. 아무도 따지 않은 감들이 아이들 그림 속으로 들어
가 붉고 둥글게 금방금방 그려진다. 그 그림 속 산아래
강 언덕 감나무가 있는 지붕이 비뚤어진 집으로 나도 들
어가 문을 닫는다.
집을 두고
산은 간다.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가을 강
으로 가고 싶으리라.
가을에 물들지 않는 사랑이 있는가.
가을에 지지 않는 사랑이 있는가.
노랗게 단풍 물든 지리산 물푸레 나뭇잎같이 밟히는
화려한 사랑, 아, 그 선명한 사랑,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감출 수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
들은 산을 내려와 강으로 내려가 젖고 싶으리라.
강물은 흐르고
산은 천천히 강에 내린다.
아, 사람들아 가을비로도
씻어낼 수 없는 화려한 무늬를 가진 사랑을 나는 보았
어라.
어여쁘게 더 두지
빨갛게나 더 두지
노랗게나 더 두지
산이 간다.
김용택
나무, 창비시선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