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귀가 열렸구나
왜 황지우가 생각났을까.
아이들이 다 돌아간 텅 빈, 적막한 운동장 건너까지
햇볕은 빈틈없이 눈부시다. 운동장가에 서 있는 나무 사
이로 파란 호수의 물이 보인다. 짙푸른 녹색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오렌지색 금잔화 몇송이는 촌스럽게 어울린
다. 지우야, 나여. 용택이랑게. 뭐, 용태기 형이라고? 거
기가 어디여? 종합학교라고? 근디 종합학교가 뭐허는
디여?. 그냥, 있어 그런데가. 형 차 몬다고? 그래. 야,
참 진보다 진보야. 버린 거지 뭐. 전주로 갔담서. 어느
동에 살아. 중화산동인가? 거긴 장영달의원 지역구 아
녀? 정동영은 덕진군디. 근디, 요새는 조각 안허냐. 응
서울로 와버리니 작업실도 없고 해서 뭐 그냥저냥 지내.
앞산을 절반쯤 가린 커다란 느티나무 잎들이 몇개 가만
가만 흔들리다가 만다. 꾀꼴새 나는 여름 산허리 햇살이
깊다. 앤솔러지 시집마다 지우의 이름은 맨 끝에 있다.
지우는 맨 꼴찌에서 말한다.
뜯긴 지붕 아래로 새 들어오는 빛 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해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다 그친 하늘이 파
란 날 나는 우리집 골방에 누워서 박용래의 시를 읽고
있었다. 문구멍이 뚫린 곳으로 햇볕이 새어 들어와 방바
닥에 동전보다 조금 큰 하얀 동그라미를 만들어놓고 있
었다. 나는 읽던 시를 놓고 그 동그라미를 가만히 내려
다보고 있었다. 파란 햇살 띠를 따라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깐, 어떤 그림자가 방바닥에 그려
진 밝은 빛 동그라미 안을 지나갔다. 순간 나는 얼른 문
을 열고 뒷산을 보았다. 작은 뱁새 한마리가 눈 쌓인 뒷
산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눈이 눈부셔, 날이 너무나 깨
끗해서, 눈물이 나오는 산천이었다.
잘 지내야인. 그려 형도 잘 있어. 가만, 지금 거기 전
화 한 데가 어디여 형, 지날 일 있으면 들를게. 여그는
섬진강 댐가여. 전주에서 순창 가는 길인디 운암대교 건
거니 전에 오른쪽으로 모텔이 있거덩. 뭐 모텔이라고?
응, 모텔이 네 동이나 있당게. 뭐 네 동이나? 그 사이로
오다가 한굽이 돌면 학교가 있어. 마암분교여, 분교. 수
화가를 놓을 때까지 노란 금잔화가 맑은 햇살 퍼진 운동
장 건너 저쪽 조그만 언덕에 아직도 촌스럽게 가만히 피
어 허공에 떠 있다.
노란 꽃.
아, 김수영이 달라고 하던 노란, 저 샛노란 꽃,
순간 멍먹했던 시의 귀가 환하게 열린다.
아, 배고파.
김용택
나무, 창비시선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