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새벽에 기관총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두두두두두
지붕을 때리는 소리 연못 위로 방울방울 구멍을 내며 쏟아지
는 소리 나뭇단 위에도 다릿돌에도 맑은 총알의 파편이 튀었
다 대나무들은 머리채를 풀어 흔들며 등뼈로 총알을 튀겨내
고 냉이며 쑥이며 풀들은 피할 새도 없이 꼼짝 못 한 채 총을
맞고 있었다 겨울 적막하고 건조한 날들을 이렇게 끝장내겠
다는 듯이 다연발 자동소총을 쉼없이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멧비둘
기 산꿩이 오랜만에 총소리의 서늘한 습도에 목청을 씻었고
총소리 잠시 잦아드는가 싶으니 다람쥐가 꼬리를 치켜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연못물을 마시며 몸을 털었다
어제는 이십몇 년 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이십
몇 년 전의 목소리 태연한 듯 다시 잠든 열망을 깨우는 목소
리 나는 불이 켜지지 않는 창을 올려다보며 밤을 새웠다 그녀
는 그날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새벽은 그만 돌아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새벽 때문이 아니라 결국 새벽이 오고 말았다
는 난감함에 밀려서가 아니라 귀대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밤새 나를 덮었던 어둠은 지워지고 내
등뒤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어둠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와
메마른 봄언덕을 향해 다연발 자동소총을 갈겼다 아카시아
뿌리가 찢어져 허옇게 드러나고 두두두두두 총소리의 끝에
이어지는 침묵의 순간들이 몹시 길어 그 사랑은 옛사랑이 되
고 말았다 소중하여 아끼고 아끼다 날려버린 사랑의 유탄 사
랑은 거기서부터 마지막 몇 개의 탄피처럼 말없음표를 툭 툭
찍으며 떨어져 세월 속에 묻혔다 저예요 구름이 빠르게 흘러
가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날들이 속절없이 저 혼자 지나가고
묻히고 지워졌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끝에서 봄비가 쏟아직고 태연하게
돌아와 풀들을 깨우고 두두두두두 기관총을 난사하고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