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한 달에 한 번 폐휴지 수거하는 날이라서
오전에는 해묵은 문학지들과 신문을 묶어내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잃어버린 열쇠를 복사하러 갔다 오니
오후의 치과 진료 예약시간까지
어중된 몇 시간의 공백이 생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좀 모자라고
컴퓨터 앞에서 죽여 없애기엔 아까운 시간이다
이러다 길에다 시간을 다 깔아버리고 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돌아와
아욱국 데워 밥 한술 말아먹고
그릇들 정갈히 씻어 잘 마르게 엎어놓고
빗자루로 방을 쓸었다
잘게 흩어져 있던 쓰레기와 죽은 벌레들을 치우고
정좌하고 앉아 명상과 기도로 한참을 보냈다
만트라와 함께 몸에서 빠져나간
낡고 어지러운 생각들의 자리 위로
부드럽고 맑은 바람이 들어와 앉는 게 느껴졌다
찬 샘에 들어갔다 나와 바람에 몸을 말릴 때처럼
서늘해진 기운들이 육신을 가볍게 다듬는 것 같았다
단 하루를 때 묻지 않게 사는 일도 쉽지 않은 날에는
다람쥐나 산꿩처럼
순결하지는 않지만 더럽혀지지도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생일 수 없을까
그 생각을 하며 마당에 나가 닭 모이도 주고
새끼 낳을 준비를 하는 토끼들과 놀기도 하였다
들어와 물 끓여 일엽차를 마시며
새로 나온 시집을 읽었다
볼륨 낮춘 티베트 음악을 들었고
너무 짙어 검은빛이 나는 숲을 거느린 산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좋은 시집을 읽고 난 날은
귀한 사람을 만난 것보다 더 뿌듯하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면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니
무엇을 시작하기엔 어중간하고
버리기도 아까운 시간이
이렇게 마음을 풍요롭게 바꿀 수 있다니
신경치료를 하고 이빨을 뽑고
머리끝까지 찔러오는 통증 견딜 일 앞두고도
이렇게 잔잔해질 수 있다니
두 시간,
두 시간이면 이렇게 넉넉해질 수 있다니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