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저 산 넘어 지는 해가
뿌연 유리창으로 붉은 손을 내밀어
눈부시어라 미싱 바늘
자욱이 어른거려 눈 비비며
생산목표 헤아리며
등줄기에 땀이 괴도록 밟는다
오늘은 밀린 빨래, 쌓인 피로
한자공부도 다 제쳐 놓고
연락만 기다린다는 고향친구를 만나
부모님 소식 고향 소식 들으며
회포를 풀어 보자고 열나게
열나게 밟았는데
―수작 부리지 말고 쓰러지지 않을 지경이면
잔업하라고 해―
주임님의 고함 소리에 노을이
검붉게 탄다
조장언니 성화에
잔업명단 위에 이름이 박히고
아침부터 아프다던 시다 명지는
일감 따라 허덕이며 눈물이 어려
미싱 소리 망치 소리 가르며
라디오 스피커에선
―보람된 하루일과를 마치고 그윽한 한 잔의 커피
와 연인과의 대화 속에 포근한 휴식의 시간, 노을
도 아름답고 산들바람도 싱그러운 저녁입니다. 오
늘도 연예가 산책에 이어 프로야구 소식과 멋진
팝 뮤직에 젖어 보세요. 먼저 정수라가 부릅니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이를 갈며,
졸립더라도 꼭 한 장씩 쓰고 자자던
한자공부도 며칠째 흐지부지
생일선물로 받은 소설책도 한 달을 넘긴 채
고향에 편지 쓴 지도 오래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진 계획이
헤아릴 수 없어
꺼지는 한숨 속에
산다는 게 뭔지, 울분으로
드륵 드르륵 득득
밟아 댄다
석양은
마지막 검붉은 빛을 토하며
순이의 슬픔도 명지의 눈물도
정자의 울분도 어둠 속으로
무겁게 거두어 간다
그래, 어둠에서 어둠으로
끝없는 노동 속에 절망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
슬픈 눈물로 기름 부어 타오르며
우리들 손에 손 맞잡고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 품에 안아야 할
포근한 석양빛의 휴식과 평화
우리들의 권리를 찾을 때까지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은 손들을
놓치지 말자
박노해
노동의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