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을 날아서(하)
1
우리가 아름다운 로제 언니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사창가 골목 한쪼에 서서 취객들이 그 앞을
오갈 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떡cake, 십 달러dollar.
2
부기주니어는 묻는다 “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도
되겠니?“
마음이 마음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
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도 되겠느냐고
나는 부기주니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로제 언니는 우리들 앞에 사 등분한 가루를 내놓았다
부기주니어는 그것을 코로 힘껏 들이마시며 다시
묻는다 “이봐 나오코, 그러니까 내가, 너조차도 어쩌
지 못하는 너의 마음을, 그것을, 내가 조금 나눠 가
져도 되겠니?“
마음이 마음에게 재차 묻는다는 것
너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가 조금 나눠 가져도 되겠느냐고
마음이 마음에게 묻고
마음이 마음을 멈칫하게 하고
다가서고
벌리려 하고
하나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흔들고
나누고
알게 되는 것
나는 코끝에 묻은 가루를 털며 부기주니어의 얼굴
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얼굴이 참 얇다는 생각이 들자 나뭇잎처럼 벌
벌 벌 떨리는 부기주니어의 얼굴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는다 부기주니어, 나의
마음도 너의 마음을 부르고 싶어 아직은 너의 얼굴에
조금씩 눈발이 흩날리지만, 가루가 몸속에 퍼지면,
그때는 순식간에 눈 속에 파묻힐 너의 얼굴, 더 늦기
전에 너의 마음을, 나는 너에게 아무 말이랃 해주
고 싶어, 주먹을 움켜쥐고,
“이봐, 부기주니어…… 미안하지만, 나는 불러본
적이 없어, 한 번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찾아본 적
이 없다, 널 어떻게 부르지, 너라는 마음을, 지난밤
엔 냐라키 언니가 떠났어, 너도 알지, 매일매일 누군
가는 떠나, 냐라키, 이제 언니를 어떻게 부를까, 너
를 어떻게 부르지, 나는 누구도 부르고 싶지 않아,
냐라키라는 마음을, 그리고 너라는 마음을, 또는 그
전체를…… 그리고 동시에…… 또 그 가운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언니 때문에 한자(漢字)라
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한자를 쓴답시고 종
이 위에 삐뚤빼뚤 몇 개의 획을 그렸을 때, 냐라키
언니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거시 ‘흉(凶)’ 자라
고 일러주었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부기주니어…… 너를 어떻게 부를까, 너라는 두
려움을‘
다락 속의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옷을 참 못 입지 못 입어
말하지만, 옷을 못 입는 게 아닐
어떤 옷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십 년(十年)
그동한 사들인 옷들을 생각하면
mother f■cker big black shit
너는 참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게 아니라
어떠한 가르침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십 년
그동안 받은 질책을 생각하면
mother f■cker big black shit
3
로제 언니는 우리들의 손을 잡았다
우리들도 언니의 둥글고 큰 손을 꼭 쥐었다
테이블 바닥에 흩어진 가루를 뒤집어쓰고
우리는 음악에 맞춰 걸었다 아니 아름다운 로제 언
니의 작은 다락이 들썩, 들썩거리며
눈보라 속을 무겁게 나아갔다
이것은 열 종류의 안주와 독주……
어린 메기는 중얼거리며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 속
에서
로제 언니의 몸을 휘감고 있는 색색의 문신을 보
았다
오스본과 나 그리고 부기주니어는 그런 메기의 표
정을 살피며
Bardo Pond, Hannah Marcus, Jessamine, Coco
Rosie, Four Tet, Blonde Redhead, Jana Hunter,
Sparklehorse, Belle and Sebastian……
오디오가 눈 속에 파묻혀 먹통이 되지 않도록 주의
를 기울였다
로제 언니는 메기에게 자신의 태생과 성장 배경,
그리고 지난날의 사랑과 상처에 대해 들려주었고
메기는 로제 언니가 흘려보내는 소리를 들으며 조
금씩 취해갔다
물과 고기 물과 고기…… 이것은 열 종류의 안주와
독주……
우리는 메기가 그렇게 중얼거리도록 두었다, 로제
언니의 말처럼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개미굴 같은 형태를 하고 있
고 굴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소리들
메기는 시애틀 마이애미 캔자스 혹은 엘에이 어딘
가에서
자신의 귓속말을 들어줄 사람을 향해 그렇게 계속
해서,
물과 고기 물과 고기…… 중얼거린다
우리는 목이 긴 장호를 신고 눈볼 속을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린 메기의 몸이 딸꾹질하듯 허공
으로 튀어 올랐다 아니 로제 언니의 작은 다락이 울
컥, 울컥거리며
눈보라 속으로 날아오를 태세였다
우리는 목이 긴 장화를 벗어던지고 와아, 하는 표
정을 지었지만
로제 언니는 그렇지가 못했다
메기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문신투성이 뚱보, 로제 언니
다락 속의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외투
외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그리고 떠나간 냐라키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
아 헤매는 것은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한 번만이라도
생긴 대로 살고 싶은 것
하지만 그게 안 돼서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나는 엉망으로 늙어간다
내가 어리석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아름다운 소녀는 더 아름다워지고
깊어진 사랑은 영원으로 가야 하는데
아름다운 소녀는 나빠지고
사랑은 깊어갈수록 진흙탕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어리석다면
내가 만든 음악으로
나는 커서 멋지게 날아올라야 할 텐데……
(당신의 목소리는 참 이상하다
당신의 목소리는 자꾸만 나를 머뭇거리게 하지)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가 없어
가난뱅이 창녀, 로제 언니는 결국 우리들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갑고 날카로운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갔다
굴 속의 사람들
“……이봐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해
봐, 지난밤, 잠든 당신의 뺨에 입 맞췄을 때, 당신은
잠결에 속삭이듯 말했지, 로제, 로제로구나, 뽀뽀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지, 그러고는, 달력의 숫자가 하
나도 없네…… 그랬잖아, 당신, 왜 그랬어, 무슨 꿈
을 꿨길래, 그런 당신의 모습이 어쩐지 너무 가엾어
서, 당신이 내게 해준 팔베개를 풀려고 하자, 당신은
나를 와락 끌어안았지……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봐, 어떤 말이든 좋으니 한마디만 해봐, 우리는
오늘 낚시를 가기로 했는데, 당신이 모든 걸 망칠 셈
이군, 왜 그랬어, 바보 자식,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넌 곧 죽을 것 같아, 이 약해빠진 검둥이 자식
아, 내가 누군 줄 아니? 내가 누군 줄 알아? 너에게
총질을 한 그 자식들을 내가 가만둘 것 같아? 어서
일어나, 지금 당장 그 자식들의 머리통을 내가 벌집
으로 만들어줄 테니, 제발, 이 불쌍한 자식아, 사랑
을 하면 왜 모든 게 진흙탕이니, 말해봐, 우리 애기,
어딨어, 나쁜 냄새가 나는 우리 애기……“
4
나는 아직도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세상엔 말이다
날 수도 없을 만큼 뚱보가 되어버린 새, 로제
그리고 냐라키
난쟁이는 우선 작은 녀석을 뜻하지만 감춰진 몇 개
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락방, 가루, 가루 속의 난쟁이 난쟁이의 욑투 외
투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
이 긴 장호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비밀을 한두 개쯤 간직하
고 있지만
그것이 음악이 되기 전엔 차가운 동전이거나 혹은
주머니 속의 밀떡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그리고 떠나간 냐라키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
아 헤매는 것은
굴 속의 사람들
굴 속의 노래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