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의 축
―옴의 법칙
백만 송이의 장미와 백만번째의 키스를 보내고 싶은 당신
에게. 지금부터는 ‘옴의 일생’에 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찌릿합니다. 내가 처음 옴이라는
친구를 알게 된 건 화장실 좌변기 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방울을 흘리며 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가 마흔
두번째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물방울을 흘리던 순간, 옴
은 내게로 왔습니다. 마치 한 알의 환한 백열전구처럼 옴은
내 머리 위에 고요히 떠 있었습니다. 옴은 필라멘트처럼 가
느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태아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그렇습니다. 그 순간 옴 역시 울
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좌변기 위의 나와 내 머리 위의 옴.
우린 둘 다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둘은 모종의 계약
을 맺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옴의 손가락과 마주쳤
습니다. 옴과 나는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신에 대하여, 번
개에 대하여, 전기에 대하여, 나는 무명(無明)시인의 자존
심을 걸고 옴은 220볼트의 자존심을 걸고 말입니다. 우리의
첫번째 저항 대상은 부끄럽게도 한국전력공사(韓國電力公
社)였습니다. 나는 한국전력공사에 저항하는 가장 첫번째
방법으로 ‘전기요금미납’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비
교적 간단한 방법이었습니다. 전업 시인으로 몇 개월가량
을 살면 되는 문제였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전업 시인
으로 몇 개월간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먼저 전기가
끊기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죠! 형광등이 깜
빡, 깜빡거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서 현관문을 열어보
았더니, 송전탑만한 커다란 거인이 문 앞에 우뚝 서 있었습
니다. 대단했습니다. 거인 앞에 선 나는 그의 새끼발가락보
다도 작았으니까요. 거인은 뭐랄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고주파 같은 목소리로 “오…늘까지…전…기요금…을…납
부…하지…않으…면…단전(斷電)하겠…습니…다”라고 더
듬더듬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거인은 한국전력공사 직
원이었습니다. 거인이 말할 때마다 웅얼거리던 입술 밖으로
스파크가 파지직, 튀곤 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송전탑만
한 위엄이 있었고 ‘고압전류조심’이라는 경고문구 같은 아
우라가 있었습니다. 나는 새삼 저 송전탑만한 직원이 득실
거리는 한국전력공사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전기로 샤워
를 하는 듯한 두려움에 젖어버렸습니다. 그날 밤 전기는 끊
겼습니다. 전기가 끊긴 어두컴컴한 방 안에 앉아 있으니까
꼭 거인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 같았습니다. ‘눈앞이 캄
캄하다’라는 말을 그야말로 실감할 수 있었죠. 옴과 내가 태
어났을 때는 이미 자연광(自然光)의 시대가 지나가버린 후
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네온사인처럼 이미지로만 존재하
고 있었져. 에이 포 한 장의 두께 같은 이미지로 살아간다
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전기가 끊기던 그날,
내 곁엔 더이상 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 꺼진 전
구 알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차갑게 식은 전구 알
을 손에 꼭 감싸 쥐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까 자꾸 눈
물이 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캄캄한 눈물방울은 우주처럼
춥고 광활해서 독한 감기몸살처럼 부들부들 외로웠습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옷장 속에 숨겨두었던 옷을 꺼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옷이죠. 바
로 한 벌의 토끼가죽이었습니다. 하얗고 하얀 토끼가죽 옷,
엉덩이에 둥근 눈송이 같은 꼬리가 달린 토끼가죽 옷, 세상
에서 가장 부끄러운 토끼가죽 옷, 그날 밤 토끼가죽 옷을 입
은 채 나는 높은 송전탑 꼭대기로 기어올라갔습니다. 송전
탑 꼭대기에서 불 꺼진 전구 알을 머리 위에 둥지처럼 올려
놓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토끼처럼 두 손을 곱
게 가슴에 모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밤하늘 한가운데 정
확히 말해서 나로부터 삼십팔만 킬로미터 떨어진 그곳 우
주 저편에 거대하고 환한 달 하나가, 오롯이 빛나고 있었습
니다. 송전탑 꼭대기엔 토끼가죽 옷을 입은 내가 있었고 내
머리 위에 불 꺼진 전구 알이 새알처럼 잠들어 있었고 그리
고 거대한 자연광인 달이 그 모든 것을 비추며 오롯이 빛나
고 있었습니다. 나는 토끼처럼 붉게 눈시울이 젖어들었습니
다. 달 또한 수십억 년째 전기 요금을 미납하고 있었다는 사
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한국전력공
사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옴, 달이 내게로 왔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나는 여전히 ‘옴의 제 1법칙’을 준수하며 성실
히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먹으려
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습니다. 냄비 속의 물이 부글부글 끓
어오를 때즈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습
니다. 그랬더니 온몸이 태양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아닌 한국가스공사 직원이었
습니다. 오늘은 가스가 끊기겠습니다.
방독면
조인호, 문학동네시인선 005